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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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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앤 카슨은 특이해 보였다. 인터뷰어의 질문에 위트 있는 대답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인터뷰어는 웃음을 터뜨리는데 말하는 앤 카슨은 웃지 않았다. 

올해 76세. 2년 전 작가는 파킨슨 진단을 받았고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복싱을 통해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새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앤 카슨이란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겨가고 있던 중 구독하는 종이 신문 지면에서 그녀의 시를 읽어 보게 되었다. 읽자 마자 마음에 훅 들어오는 시는 아니었지만 금방 잊혀지지 않고 며칠 동안 계속 생각나는 그런 시였다.
마침내 앤 카슨의 책을 처음 주문해서 읽어보자 하고 고른 것이 '빨강의 자서전'이다. 여러 권이 있었지만 '녹스'는 너무 두꺼웠고, 본격 시집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울 것 같았고, 비교적 분량이 많지 않고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책이 '빨강의 자서전'이었다.
시의 형식을 하고 있는 소설이라는데 읽어보니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술 방식이 여느 소설처럼 서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면 장면이 툭툭 던져있는 듯 쓰여져 있었다. 시의 한 연이 끝나고 다음 연이 나오듯 장면 장면이 계속 바뀌어 가며 진행되는 형식을 하고 있었고 장면과 장면 사이는 읽는 사람 머리 속에서 이어 나가야 했다.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을 꼽자면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일텐데, 이 둘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과 영웅의 이름이다.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인 헤라클레스를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지독히 미워하였고 여러 차례 해꼬지 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그 시도 중의 하나로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일으키게 하여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자기 자식과 아내를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한다. 결국 이에 대한 벌로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했고 그 12가지 과업중 하나가 소를 지키는 게리온에게 가서 그가 키우는 소떼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게리온을 찾아간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지키는 소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게리온을 죽이고 만다. 자기 임무를 하고 있었을 뿐인 게리온안데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하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이것이 그리스 신화중의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이야기이지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에서 게리온은 14살, 헤라클레스는 16살의 소년일 뿐이다. 우연히 버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보게 된 게리온은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헤라클레스와 같이 있고 싶고 그의 마음을 사고 싶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며 지내지만 헤라클레스는 그저 친구로 대할뿐 무심하기만 하다. 서로 친하게 되어 게리온과 어울리고 그와 잠자리까지 같이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뿐, 그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마음이 상한 게리온. 사랑이 시작될때 감정은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불안, 슬픔, 자신의 내면 세계로의 침잠, 이 세상에 대한 탐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고서 게리온의 삶의 세계는 몇 눈금 하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57쪽). 더구나 게리온은 이제 14살의 소년이다. 그리고 빨강 날개를 옷 속에 숨키고 다니는 비밀까지 안고 사는 게리온이다. 
그러는 가운데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떠나고 상심한 게리온은 집을 나와 사진을 찍으러 아르헨티나 어느 지방으로 떠난다. 
예상치 않게 거기서 게리온은 헤라클레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헤라클레스는 앙카시라는 새로운 연인을 옆에 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게리온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헤라클레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된 앙카시. 여기까지 읽으면 세사람이 얽혀 싸움이라도 한판 붙어버리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사람이 함께 앙카시의 고향인 페루로 여행을 떠나는 결말은 결말 같지 않고 오히려 시작이 느낌을 준다. 세사람은 과연 각각 무슨 생각을 하며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일까. 헤라클레스와 앙카시는 몰라도 최소한 게리온은 처음의 게리온이 아니다. 그동안 게리온은 자기가 그때까지 숨기고 살아온 빨간 날개의 의미를 새롭게 알아내게 되었고, 게리온의 날개의 존재를 알아차린 앙카시는 게리온에게 날개를 숨기지 말고 날개를 이용해서 날아볼 것을 권유한다.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의 날개의 존재도 모름) 


게리온은 궁금했다. 
게리온은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선사시대 바위들을 바라보며 생각들에 대해 생각했다.
둘이 연인이었을 때도
게리온은 헤라클레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나 몇 년 전 중국집에서 먹은 요리 같은
이상한 걸 생각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게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라클레스는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의 공간에 위험한 구름이 생겨났다.
게리온은 다시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219쪽)



갑자기 뭐가 확 달라지는 그런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게리온은 이제 달라지고 있구나. 성장하고 있구나. 더 이상 자신의 날개를 숨기고 살지는 않겠구나.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얻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겠구나. 스스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며 살겠구나.
일종의 열린 결말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와 이 책에 나오는 게리온과 헤라클레스를 연관지어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꼭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스신화에선 헤라클레스, 즉 영웅이 주인공이고 게리온은 영웅의 과업 수행용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대신 앤 카슨은 게리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게리온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물론 게리온을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앤 카슨이 처음은 아니고 스테시코로스라는 시인이었다. 앤 카슨은 이 스테시코로스의 시를 해석하던 중 그의 시 속에서 게리온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기존의 작품 속 전형적인 역할과 특징으로 알려진 주인공과 상대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다시 쓰기 시도를 한 책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백설공주를 계모의 입장에서 다시 쓴다든지 하는)
이 책은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원전과 완전히 다른, 하지만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이야기로 다시 탄생시킨 작품이다.     

다시 쓰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다시 쓰는 차원이 기존의 다시 쓴 작품들의 수준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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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소식 듣고 나서 무엇을 할거냐는 물음에 대한 앤 카슨의 대답은 전화를 피하기 위해 숲속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I'm going to hear the qu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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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려줘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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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각기 다른 전작 소설의 주인공 셋을 한권의 새로운 소설로 다시 등장시켰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올리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루시, <버지스 형제들>의 밥이 그 세 사람.

올리브는 90세가 되었고, 밥 버지스는 65세, 루시는 66세.

배경은 역시 미국 메인 주의 크로스비이다.

밥 버지스는 첫번째 부인 팸과 이혼후 목사인 마거릿과 결혼하여 살고 있고 자식은 없다. 남편 헨리가 죽고 나서 혼자 살고 있는 올리브는 어느 날부터인가 한 동네 사는 작가 루시를 집으로 불러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 중 루시가 글로 쓸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털어 놓기로 한다. 강직한 성격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올리브의 성격으로 볼때 의외적인 일로서,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하나의 축이기도 하다. 9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들, 기록되지 않았던 일들을 풀어놓는 올리브와, 그 얘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루시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이 소설의 또 한 축으로서 서로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두 사람이 나온다. 루시 바턴과 밥 버지스이다. 각자 배우자가 있고 평탄해보이는 결혼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루시와 밥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몇 시간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있지만, 갖고 있을 뿐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밥은 그의 아내와, 루시는 그의 남편과 얘기하면서 얻을 수 없는 이해와 교감을 둘 사이에서 주고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루시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오, 밥."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밥은 이해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그의 두 아내 중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 (96)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 걷고 대화하고 - 그저 행복했다. (353)


그들은 산책을 시작했다. 루시가 말했다. "내게 모든 걸 말해 줘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요, 아무것도 빼놓지 말고요." (392)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불꽃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시간들을 다 겪어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다 겪어낸 후에도 여전히 어떤 방식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랑에서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연인이라기 보다 친구에 가까운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친구라고만 할 수 없는 사이. 뜨겁지 않을지 몰라도 성찰이 있고 배려가 있는 사이. 더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어 나눌 수 있는 교감. 내 얘기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상대의 얘기를 다 들어주고 어루만져주고 싶고, 그를 또는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 

꼿꼿하고 강직한 성격의 올리브가 루시를 불러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기록되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자기 삶의 핵심을 찾고 싶다는 의미로 보인다. 살아왔다는 것은 그만한 분량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 

나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누군가에게 그동안 하지 않고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질까? 그런 방식으로 내 삶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해보고 싶어질런지. 올리브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무엇이 될지. 더 궁금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그 상대는 누구일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사람이 주위에 없다면) 혼자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앞서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른 소설들의 깊이와 밀도에 미치지 못하는 듯 아쉬움은 남는다. 작가의 주제 의식은 흥미롭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다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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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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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독특한 사람이었구나.'

누군가에게 독특하다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릴까? 

배우 김혜자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이룬 명성을 뽐내지도, 무작정 겸손하기만 하지도 않았다. 

배우 김혜자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내가 굳이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이 책에 대한 소개글에서 어딘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책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출판사 측의 공개적인 글을 보고서 실망보다 오히려 신뢰가 갔다.

이 책은 2021-2022년 배우 김혜자와 나눈 긴 시간에 걸친 대면 및 전화 인터뷰, 구술,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평생을 써 온 일기 형식의 글들,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초고를 만들고, 저자가 다시 기억과 사실을 수정하고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병약하고 우울한 아이였고, 우연히 연극을 알게 되어 배우의 길에 들어섰지만 자신의 연기에 실망하여 결혼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선배의 격려와 도움에 아이 둘을 낳은 몸으로 다시 시작한 배우의 길은 그녀에게 평생 연기에 올인하는 인생으로 이끌었다. 

나는 아무 것도 잘하는 것이 없고 특별하지 않지만 연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기 속에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었기 때문에 허물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내며 살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영리했다.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제대로 한게 없다는 말이 겸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고 자기 자신에 정직했다.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다. 아내 역할, 엄마 역할, 며느리 역할, 자식 역할, 배우로서의 삶을 사느라 힘들었다고 말하기 보다 자신에게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 모든 역할을 다 해내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가장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그렇게 살아온 것도, 그런 삶을 살아왔노라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자기의 아픔과 상처를 속에서 오랫동안 곪게 하고 평생 그렇게 상처와 아픔으로서 끌고 사는 대신, 어떤 한가지에 올인하여 그 상처와 아픔을 녹여낼 수 있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의 김혜자 아니더라도, 이런 인생이 있구나, 이렇게 자기 인생을 끌고 살아온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주위의 상황에 휘둘리며 살지 않는 인생. 휘둘리며 살았노라 억울해하지 않는 당당함.

생에 감사하다는 말은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마 자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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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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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애초에 읽으려고 했던 책은 이 책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를 읽기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이 소설은 작가의 이전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 <루시 바턴>, <버지스 형제>의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스트라우트 소설의 결정판과도 같은 소설이라는 것을. 앞의 두 작품은 읽었지만 <버지스 형제>는 읽지 않았고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 그래서 우선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책 <버지스 형제>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이런 소설이 다 있었어?' 하면서.


2. 장편 소설

크고 작은 문학 잡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해오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첫 장편 소설을 펴 낸것이 1998년 (42세) <에이미와 이저벨>이었고 이후 <올리브 키터리지>가 나온 것이 2008년 (56세), 장편 소설로써 세번째 소설이다. 그리고 2013년 (61세) 에 네번 째 소설 <버지스 형제>를 발표하였다.


3. 어떤 인물이 나오나

미국 메인 주의 작은 마을 셜리폴스가 배경. 

엄마와 나는 버지스네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다. "버지스네 아이들". 엄마는 그렇게 불렀다. (9)

이 책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자신이며, 읽어보건대 버지스 가족은 작가와 어릴때 한동네 살던 사람들이고, 작가의 엄마와 그들의 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것을 글로 써봐야겠다 결심을 한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프롤로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소설의 끝과 시작이 다시 보이며 이해가 된다.

짐 버지스, 밥 버지스, 수전 버지스. 이중 짐 버지스가 첫째 아들이고 밥 버지스와 수전 버지스는 쌍둥이 남매이다. 어릴 때부터 잘 생기고 두각을 나타내었던 짐 버지스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되어 뉴욕에 살고 있다. 동생 밥 버지스 역시 변호사로 일하다가 그만 두고 법률구조협회 항소부에서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형 짐 버지스에 비해 소심한 밥 버지스는 아내와도 이혼한 상태로 자식 없이 뉴욕에서 살고 있다. 유일하게 어릴 때 마을 셜리폴스를 떠나지 않는 수전은 스웨덴 출신 남편과 이혼하고 열아홉 살 아들 잭을 키우며 살고 있다.


4.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요 사건

어느 날 짐과 밥은 수전의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수전의 아들 잭이 마을의 소말리족 난민 공동체가 신성시하는 이슬람 사원에 잘린 돼지 머리를 던져 넣는 일을 저질렀고 잭은 증오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게 생겼다는 것이다. 

짐과 밥은 조카 잭을 됩기 위해 수년 만에 고향 셜리폴스로 향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기만 하고 오랜 만에 만난 세 남매가 이야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묻혀 있던 갈등과 상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버지스 집안의 삼 남매 짐, 밥, 수전에게는 공통의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이 있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것인데, 짐이 여덟 살, 밥과 수전이 네살 때, 아버지가 어린 삼 남매를 차에 태워놓고 잠시 아래로 내려간 사이 밥이 장난으로 페달을 밟는 바람에 굴러내려간 차에 치여 아버지가 목숨을 잃게 된 일이다. 그 날 이후로 밥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자존감 낮고 소심한 성격으로 살아오고 있다. 이런 밥을 짐은 놀리고 구박을 하기 일쑤이지만 그런 형에게 제대로 반발도 하지 않는다. 

이제 중년이 된 삼 남매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수전의 아들이 저지른 사고로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짐은 일도 진전이 없고 아내 헬렌과의 갈등도 깊어지면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동생 밥에게 엄청난 사실을 실토하게 된다. 어릴 때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밥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기억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형의 말만 듣고 자기 잘못으로 알고 살아온 밥은 당장 혼란에 빠지고, 불륜을 저지른 일이 아내 헬렌에게 들통이 난 짐은 결혼 생활도, 직장도 잃고 외곽의 소도시로 떠나 혼자 지내게 된다. 

수전의 아들 잭은 짐과 밥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건의 증인인 소말리족 출신 주민의 선처 덕분에 기소를 면하게 된다. 


5.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 맞아?

이전에 읽은 두 작품 <올리브 키터리지>와 <루시 바턴>에 비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가족 내 갈등에 플러스 사회적, 인종적 문제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끌고 나가는 주요 소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전 작품들의 시야를 한 단계 더 넘어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이런 사회 문제, 인종 문제, 이민자 문제에도 관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읽어가는 동안 낯선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올해 70세가 된 작가가 계속 소설을 발표한다면 아직도 새로운 세계를 읽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하지만 소재가 달라지고 이슈가 달라지더라도 작품을 맺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을 보는, 인간을 보는 작가의 바탕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역자 후기를 인용해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늘 다시 균형을 찾는 쪽의 결말을 선택하는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불안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흔들림이 잠잠해져 화합의 상태가 되려면 어떤 시선들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572)


읽는 사람의 불안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잠재워주며 마친다. 어떤 과정을 거쳐왔든, 그것이 삶의 어둡고 절망적인 경로일지라도 결국 인간은 희망 쪽으로 키를 잡아 그쪽을 향하여 일어서는 힘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 무너진 듯 보이는 상황이지만 금방은 아니더라도 주인공은 어떡해서든 다시 일어난다.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가 아니라,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서.


아무리 어둠이 새어들어와도 이곳에는 늘 불 켜진 창문들이 있었고, 각각의 불빛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밥 버지스,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162)



"어떻게 하면 좋지, 밥? 나는 이제 가족이 없어."

"형은 가족이 있어." 밥이 말했다. "형을 미워하는 아내가 있잖아. 형한테 잔뜩 화난 자식들도 있고, 형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동생들도 있고. 머저리같이 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머저리가 아닌 조카도 있고. 그런 게 가족이야." (536)


자신이 이미 만들어낸 작중 인물들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모이게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작가는, 진정 그 주인공들에게 하나하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이 책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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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8-2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버지스 형제는 읽지 못했는데, 스트라우트 작품과 다른 점이 많이 보이네요. 저는 비교적 최근작 루시 시리즈가 저한테 잘 맞는거 같아요. 다음 책으로 넘어가시게 된 거 축하드립니다 ㅎㅎㅎ 다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hnine 2026-08-28 12:09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널리 확산 시키지 않고 초반에 제시한 소재를 끝까지 붙들고 가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가고 있네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 맞아? 했다가 역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야, 하면서 마쳤답니다.
그런데 지금 루시 바턴도 내용이 가물가물하네요 ㅠㅠ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은 한번만 읽어선 안되는걸까요? ^^

다락방 2026-08-2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저는 버지스 형제 읽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고 싶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후기에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시야가 더 넓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참 좋아했는데 루시 시리즈를 읽다보니 또 루시 시리즈가 좋아지고요 이번에 나온 신간 The Things We Never Say 도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글을 써줘서 참 감사한 작가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줘요] 독서 후의 감상도 기다릴게요!

hnine 2026-08-28 12:12   좋아요 0 | URL
너무너무 좋다는 신간에 관심이 확! 급등합니다.
올리브 키터리지도 두번째 읽을때 소감이 매우 달랐는데, 루시 시리즈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참 대단한 작가 맞죠? 70의 나이에 여전히 소설을 발표하고 있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시야를 넓혀간다는게 어려운 나이인데 말입니다.

망고 2026-08-2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를 들려줘요˝ 에서 밥 버지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니까 ˝버지스 형제˝를 먼저 읽어 두신 점 너무나 좋은 선택 같습니다. 앗 ˝바닷가의 루시˝에서도 밥 버지스가 나오는 군요 암튼 ˝버지스 형제˝는 ˝올리브 키터리지˝까지 읽고 나서 읽어보면 ‘엇 갑자기 이런 주제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라우트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어요.

hnine 2026-08-28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야 할 것 같더라고요. 이걸 안 읽고 바로 <이야기를 들려줘요> 읽었더라면 제대로 이해를 했을까 싶어요.
제가 바로 ‘엇 갑자기 이런 주제를‘ 했다는거 아닙니까.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좋아요. 스트라우트에게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면들이 있을 것 같아요. 이해했다고 하는 순간 오해가 시작된다잖아요.

Jeanne_Hebuterne 2026-09-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 그 커다란 세인트 버나드같은, 술통을 목에 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눌 것 같은 사람. 버지스 형제는 제게 그렇게 남았는데, hnine님에게는 이렇게 좋은 리뷰로 남았군요.
이 책이 참 좋아요. 겉보기엔 퉁명스럽지만 다정한 스트라우트의 세상.

hnine 2026-09-10 15:29   좋아요 0 | URL
이 소설에서 밥은 제게 연민의 대상이었어요. 어릴 때 기억의 시작이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절대 잘난 척 하며 살 수 없었던 사람. 그럼에도 대화에서 보는 그는 기지가 살아 있어서 나름 매력도 있었고요. 결혼 대상으로는 글쎄 이지만 친구로는 얼마든지 웰컴인 남자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지금 70세라는데 작품에 대한 열의가 조금도 식지 않은 것 같으니 작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대단한 직업일까요.
 
라캉, 들뢰즈, 바디우와 함께하는 도시의 정신분석 1 - 과잉 도시 ㅣ 현대 도시의 철학적 모험
장용순 지음 / 이학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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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세 권의 책을 빌려오며, 이 책은 다른 두 책 먼저 읽고난 후 여유가 되면 읽게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처음 몇장을 읽어보자 펼쳤다가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게 되었다. 

내게는 아직 낯설기만 한 철학자들. 그 중에서도 더 낯선 이름, 들뢰즈, 라캉, 바디우를 내세우는 책이라서, 그리고 얼마전에 읽은 비트겐슈타인은 그나마 관심을 갖고 있던 철학자임에도 읽는데 쉽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당연히 이 책도 읽기가 쉽지 않으려니 했는데, 그런 생각을 미리 하고 있어서 그런지, 워낙 잘 쓴 책이라서 그런지, 읽는데 생각만큼 어렵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관심두지 않고 살던 분야를 처음으로 알아가는 맛까지 더해져 중간에 손놓지 않고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들뢰즈나 라캉, 바디우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은 아니다. 건축과 교수가 도시의 정신 분석을 목적으로 쓴 세권의 시리즈 중 한 권이다. 도시를 정신 분석한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었고 갈수록 원하는, 또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는 도시라는 체계를 정신분석과 철학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해보겠다는 의미가 되겠다. 

문명과 함께 도시가 생겨나고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한한 혼돈 (chaos) 으로부어 유한한 질서 (cosmos) 가 발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여기부터 시작한다.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푸코, 한병철, 들뢰즈, 콜하스, 벤야민, 바타유, 맑스, 라캉, 바디우.

혼돈이 가지는 무규정적인 흐름을 한시적으로 고착화한 것이 정신, 도시, 사회, 문명이라고 본다. 이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12)

자연, 혼돈, 흐름, 에너지 --> 인공, 질서, 규제, 기계

왼쪽의 자연, 혼돈, 흐름, 에너지 상태에서 오른쪽의 인공, 질서, 규제, 기제 쪽으로 가는 것이 '문명화', 반대 방향을 '붕괴'라고 도식화하야 그려놓았다. 도시는 이렇게 문명화와 함께 생겨난 것이다.

도시는 무규정적 흐름으로부터 인간을 방어하고 자연을 조절해서 활용하는데에 매우 효과적인 거대한 기계였다. (25)

자연의 무한한 흐름을 채취하는 것에서 시작된 도시는 점차 커져서 자체적 흐름을 만들어냈고 그 흐름이 점점 가속화되어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유한한 도시는 그 안에 무한성을 담으려했다.

도시가 커지고 인구도 늘어나면서 국가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세밀한 규칙이 필요해지고 이것은 생산력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해진다. 그렇게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근대사회는 확장된 흐름을 법과 질서에 따라서 통제하는 사회가 된다. 근대 규율 사회의 탄생이다.


시대 연도 에피스테메 경제 사조 사회 구분 성격
르네상스 시대 1500-1650 유사성 대항해시대 봉건 해체기 종교개혁, 인쇄술의 보급
고전주의 시대 1650-1800 재현 상업자본주의 절대왕정 과학혁명의 시대
근대 1800-1950 역사 산업자본주의 규율사회 프랑스혁명 이후, 시공간적 확대
현대 1950- 흐름 신자유주의 성과사회 이동과 순환의 극대화

*에피스테메 epistime: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한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


책에서 자주 언급이 되기 때문에 위의 표는 머리 속에 담고 읽는 것이 좋다.

근대 초기는 자본주의, 자유주의시대이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수정자본주의가 도입되어 정부의 개입이 시작된다. 현대에 오면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근대 규율사회에서 현대 성과사회로 진입한 시점과 같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근대 규율사회의 규범과 질서로 시공간을 통제하는 방식을 넘어선 신자유주의 사회의 보다 미시적인 통제를 말한다.

들뢰즈는 현대사회가 근대 규율사회와는 다른 '통제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근대의 규율사회가 닫힌 공간을 만드는 고정된 주형의 방식을 따르는 반면 현대의 통제사회 (성과사회)는 연속적이고 열린 공간을 만드는 변조의 방식을 따른다고 설며한다. 변조의 방식은 더 유연하고 촘촘하게 개인을 길들이면서 통제할 수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규율사회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성과사회, 피로사회를 제시한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흐름을 분절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 20세기 중후반부터는 흐름을 무한히 흘러가게 하는 성과사회이자 피로사회다. 

피로사회에서 개인은 외부에서 주어진 법이나 규율이 아닌, 개인에 내재화된 법에 의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한다. 노력하는 만큼 보상받는다는 성과주의에 사로잡혀서 과도하게 자기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렇게 우리는 긍정성 과잉의 소진증후군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왜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생겨났을까? 왜 엄청난 인구와 잠재력을 가진 중국에서 더 일찍 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들뢰즈에 의하면 11세기 유럽은 봉건 체제의 위계 조직과 도시 간의 네트워크 조직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었고 14세기에 이르러 네크워크의 핵심 도시들은 더욱 분화된 네트워크를 이루며 생산력을 발전시켜 상업 자본이 발달해나갔던 반면 이슬람이나 중국은 중앙집권체체로 거대 제국을 형성하는데 집중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이 원시사회의 코드화 사회에서 탈코드화로 나가는 동안 중극은 초코드화로 나아가는 쪽을 선택하였다.


매끄러운 공간, 홈파인 공간

들뢰즈가 제시한 개념에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와 '홈파인 공간 (striated space)'가 있다. 생물학에서 수정란의 발생 단계를 연상해보면 쉬운데, 좌표를 표시하기 어려운 사막이나 바다는 '매끄러운 공간'이며 길과 필지로 구분된 도시는 '홈파인 공간', 즉 분화가 이루어진 공간이다. 매끄러운 공간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는데 첫번째 의미는 바다, 사막, 수정란 같은 무한한 잠재성의 공간이다. 두번째로 매끄러운 공간은 자본에 의해 견고한 것들이 모두 녹아버린 세계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매끄러운 공간에 규범이나 규정성이 개입되면 그 공간은 홈파인 공간이 되는데, 홈파인 공간에서 흐름을 가르는 선들이 무수할 정도로 많아져서 경계가 점점 사라지면 그곳은 마치 매끄러운 공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첫번째 의미의 매끄러운 공간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이지만 두 번째 의미의 매끄러운 공간은 새로운 억압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날 도시에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 날 도시에서는 마치 경계가 사라진 연속적이고 유연한 공간이 형성된 것 같지만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라간 도시의 구조가 정말로 자유로운지는 의문이다. 신자유주의 성과사회는 개인이 억압을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환경 자체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94)


가속화된 흐름이 만드는 장소

편의점, 은행, 패스트푸드 식당, 쇼핑몰, 터미널, 공항, 호텔 등 요즘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의 소비 동선을 따라 이어지는 기능을 하는 건물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택배를 보내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 은행에서 업무를 본다. 고속터미널과 이어져 있는 대형 쇼핑몰과 호텔. 매우 실용적이니만 특별히 기억되지도 않고 정체성도 없는 장소를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대향소비사회에 나타나는 특이한 장소들이라고 해서 '비장소 (non-place)'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성, 역사성, 관계성을 갖지 못하는 현대적인 장소들인데, 고속도로, 항공기 내부, 호텔, 공항, 철도역, 주유소, 편의점, 쇼핑몰, 아울렛 같은 장소들이다. 

이런 장소들의 특징은 흐름과 관련된다는 점, 그리고 소비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 칸은 건축공간을 서비스하는 공간과 서비스 받는 공간으로 나누었다. 

현대에는 비장소에 대한 혐오와 열망이 공존한다. 자본주의 도시가 등장한 것은 물류와 자본의 흐름이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과시욕, 호기심과 결합하면서다.

비장소와 정크 스페이스 역시 유한의 공간에 무한의 흐름을 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 도시의 많은 문제가 무한을 유한 안에 재현하려는 이런 욕망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117)


한병철의 피로사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

"안된다"는 억압이 신경증을 일으킨다면, "무엇이든 된다"는 과잉 긍정에 사로잡힌 정신병적 상태는 피로사회의 특징이다.

프로이드의 정신의학 관점에서, 리비도가 과도하게 억압되면 '강박증', 리비도가 억압을 뚫고 나와 신체의 증상으로 표현되면 '히스테리', 리비도가 대상에 투여되지 못하고 자아에 고착되는 것이 '우울증'인데, 한병철은 소진 증후군과 우울증을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질환들로 들었다.

과도하게 흘러가는 것과 과도하게 고착되는 것, 이런 대조적 현상은 도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고속도로, 기차역, 공항, 쇼핑몰 같은 흐름을 담당하는 시설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한 잉여가치가 축적된 사적영역인 초고급 주택, 빌라, 아파트, 클럽하우스가 건설된다. 전자의 시설들은 누구나 접근해 소비를 즐길 수 있지만 후자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즉 어디든 갈 수 있는 흐름의 과잉이 발생함과 동시에 흐름의 고착이 생긴다. 편집증적 장소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가 외부로 나오지 못하고 고착되는 것이다. (129)


좀비영화는왜 인기가 있을까?

영화속 타자의 유형 1단계는 밖에서 침략해온 외계인, 2단계는 에일리언. 내 몸속에 알을 낳고 몸속에서 자라다가 튀어나온다. 나와 타자의 경계가 애매하다. 세번째 유형은 좀비다. 좀비가 나를 물면 나는 좀비가 된다. 타자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한병철은 타자와 나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규율사회 vs 피로사회'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규율사회에서 인간은 법에 대항하며 타자와 맞서지만, 피로사회에서 인간 주체는 맞설 타자 없이 각자의 성과에 의해서 평가된다. 바로 공산권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습이다.

들뢰즈는 "현대의 유일한 신화는 좀비 신화이고 이 살아 있는 죽은 자 (undead)의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지 전쟁의 신화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노동을 하는 현대 성과 주체의 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좀비 영화가 유행하는 원인이다. (145)

타자도 유토피아도 사라진 매끄러운 세계에서는 나 자신이 바로 잠재적 타자이다. (151)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흐름을 탈영토화, 탈코드화한 것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다만, 흐름을 재영토화, 초코드화한 것은 부정적이라고 보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재영토화, 초코드화에 의한 과잉 축적에 있다고 했다. 


이런 들뢰즈의 관점에 부응하며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흐름이 증가하는 것은 생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보면서, 생명체에서 흐름의 확장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혈류가 고착될때 발생하듯이, 정신 병리에서 방어기제로서의 자아는 필요하지만 자아에 리비도가 지나치게 집중되어 과잉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하듯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지점은 두 방식 사이의 중간이라고 했다. 적당한 규율과 억압은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지만 과도한 초자아의 통제는 리비도가 지나치게 집중되어 과잉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도한 규제는 경제를 안정시키지만 경제의 흐름 자체를 막아버릴 수 있다.

규제가 최소화된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는 흐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경제, 사회, 도시에서 경계를 적절하게 구성하고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데 적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생물학적이고 생태학적인 관점이다. 우리가 새롭게 상상해야 하는 체계는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생태학적 체계인 것이다. (193)


결국 우리가 찾는 답은 자연 생태계 속에 있나보다. 


건축도 원래 나의 전공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읽어보자고 집어 든 책이었는데, 3권 시리즈 중 첫권이라서 그런지 배경이 되는 철학적 이야기가 잔뜩이었다. 저자가 한국에서 건축을 전공하였고, 석, 박사도 여전히 건축 전공이며 현재도 건축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이렇게 자신의 전공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철학 이야기로 몇 권의 책을 내는 것을 보며 철학은 철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이렇게 이해 가능한 언어로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을 써내다니.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지만 아예 소장용으로 한권 구입해서 맘껏 줄을 좍좍 쳐가면서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감히 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지 않던,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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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8-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재밌겠어요. 좋은 리뷰 덕분에 좋은 책을 담아갑니다.

hnine 2026-08-01 15:04   좋아요 1 | URL
휴대폰 앱에서 열어보니 인용구 박스와 표가 제대로 나타나질 않는데,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 좋아요. 그동안 저도 모르게 제 관심 분야의 책들만 읽어오다보니 읽는 책들만 읽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영역이 확장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경우엔 그랬는데, 바람돌이님은 친숙한 내용일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