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있는 벽보판까지.

 

 

 

  (중략)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무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 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 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 황지우 「활로를 찾아서」중에서 -

 

 

 

꽃피는 춘삼월이라고 했다. 만물이 희망의 싹을 활짝 틔우는 계절이다. 봄꽃이 평년보다 사흘 정도 빨리 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올 즈음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이 전해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리조트 붕괴로 이제 막 피는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소식의 여운이 지나지 않았건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또 한 번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무엇이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그리 됐을까. 이들은 서울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 고달픈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식당일을 하는 60대 어머니와 병마에 시달리던 30대 큰딸, 그리고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둘째 딸의 기구한 삶은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가장 노릇을 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을 다친 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세 모녀는 방세와 공과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방세와 공과금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까지 세 모녀의 삶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암담하고 견디기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무엇보다도 ‘같이 죽자’하고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세 모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을까? 아마도 엄마는 딸들을 생각하고, 딸들은 노모를 생각하며, 그렇게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을 것이다.

 

반면 세 모녀와 반대로 더러운 마지막도 적지 않다. 선임들의 가혹행위에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사의 죽음을 은폐하고 동료 병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금한 조의금까지 빼돌린 파렴치한 간부들의 행태가 뒤늦게 알려졌다. 온갖 해악을 저지르고도 일신의 안위만 영위하고자 타인의 죽음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군상이 주변에 어디 하나둘인가.

 

경주 리조트 강당 붕괴, 대학생 9명, 사망 70여명 부상 (한국일보 2월 18일자)

“공과금 밀려 죄송해요”, 모녀 셋 안타까운 선택 (중앙일보 2월 28일자)

가혹행위로 자살 육군병사 조의금까지 가로챈 여단장 (동아일보 2월 28일자)

 

눈 뜬 장님처럼 우리는 눈 먼 세월을 보냈다. 약자를 외면하고 따돌렸던 우리가 계속 눈을 감는다면 손 한 번 못 댄 세월은 그렇게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이 이어질 것이다. 열정과 희망의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세월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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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 국회 기자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국회 정치의 모든 것
양윤선.이소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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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슬랩스틱 희극인이자 무성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 그의 1936년작 「모던 타임즈」는 산업화의 폐단과 그 속을 살아내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절묘하게 풍자한 역작으로 불린다. 70여년이 넘도록 각기 다른 국가에서 각기 다른 역사가 생성되는 동안에도 항상 현시대의 고민에 투영돼 재해석 되고 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시계는 생산과 효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에 쫓기는 노동자의 삶을 상징한다. 컨베이어벨트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찰리 채플린 분)은 하루 종일 양손에 든 공구로 나사못을 조이는 단순한 일을 반복한다. 자본가인 사장 지시로 작업반장은 기계의 속도를 점점 더 높인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생산성이 증대되고 사장은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다.

 

공장의 화장실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어 조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동급식기계는 점심식사의 여유조차 사치인 노동자들의 입에 음식물을 투여한다.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조여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과 작업반장이 컨베이어벨트의 커다란 톱니바퀴에 끼여 이리저리 돌며 쫓고 쫓기는 장면은 그야말로 슬랩스틱의 진수를 보여준다. 중년 여성이 입은 옷의 가슴팍에 달린 단추를 나사못으로 착각해 조이려는 장면에서는 웃음보가 터진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날 멈춰선 채 정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국회를 보노라니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떠오른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과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에 국회의원이란 단어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이 속한 곳에서 효율성을 제고해야 하는 산업화, 현대화의 산물이라고 보면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리라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채플린이 나사못을 조이듯 무의식으로 의사봉을 휘두르고, 눈을 치켜뜨며 습관처럼 호통만 치니 말이다.

 

다만 우리와 다른 면이 있다면 둥글게 돌아가는 시간이란 궤적에는 얽매이지 않는 점이랄까. 급한 것이란 없다는 듯 매년 같은 행동을 여유롭게 반복한다. 국민에 고용된 노동자라는 점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듯 대통령이나 권력자에게 고용된 것인 양, 그들이 급여를 주는 것인 양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정치 뉴스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정치인들은 왜 싸울까?’ 매일 저녁 정치인들이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채널을 돌리고, 선거 때마다 뽑을 사람이 없다고 푸념을 하는 건 결코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만 정치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가족이나 주위 사람 중 정치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마음 깊숙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가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과 국익을 위한 정치가 되기를 모두가 소망하고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정치에 많은 불신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 어떤 사람이 해도 ‘정치가 달라질 것이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 우리 국민이 깨어있지 못하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고 이대로 놔두면 정치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고, 정치 자체에 대한 염증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로 굳어져버렸다. 더 이상 정치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정치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려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정치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국회는 또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제대로 알긴 할까.

 

『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의 공저자이자 국회의 24시간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국회방송 소속 양윤선, 이소윤 기자는 국회의원들을 ‘용병’에 비유한다. 나를 대신해 싸워 줄 용병. “국회의원은 지역과 직능을 대변한다. 모든 사람이 링에 올라갈 수는 없다. 대표 선수를 올려 대신 싸우게 하는 이유다. 우리는 코치가 되어 선수를 지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 싶지만 국회의원은 원래 ‘싸우는 사람’이다. 하나의 법안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이를 조율하고 타협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들은 그저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흔히 언론과 브라운관을 통해 본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내 한 표가 무엇을 바꾸겠나'라는 생각으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치는 미래를 위해 미리 들어놓는 보험이고, 투표행위는 보험료라는 정치인의 말을 인용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악순환될 수 밖에 없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차선, 차악, 차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점진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기를 꿈꾸며 바른 민주주의의 정치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얻고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혜택과 국익을 위한 정치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역감정을 만든 정치꾼들에게 속지 말고 자신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서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잘못된 정치를 바꾸고 진정한 민주주의로 도약하는 귀한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중요한 정치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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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를 소재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는 한 시골 처녀가 백화점 쇼윈도를 처음 구경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드니즈와 일행은 무엇보다도 오밀조밀한 윈도 디스플레이에 매료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을 마치 못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진열창이었다. (중략) 이렇듯 상품이라는 모티브가 바뀌고 진열대라는 생생한 악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지막이 계속되는 반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크림빛 스카프의 나풀나풀한 주름장식 끈이었다.”

 

‘금발 여인의 보드라운 살갗’, ‘감미롭게 일렁이며 섬세하기 그지없는 꽃들의 다양한 빛깔.’ 온갖 관능의 어휘들로 치장한 졸라의 묘사 안에서 쇼윈도는, 벤야민이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전이’라고 풀이한 19세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창(窓)이다. 창 너머에는 필요에 앞서 펼쳐지는 욕망에 의한 소비의 시대적 매혹이 극장의 판타지처럼 펼쳐져 있다.

 

 

 

 

 

 

 

 

 

 

 

 

 

 

 

 

 

인류가 윈도쇼핑의 쾌락에 처음 몰두하게 된 것은 1784년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필립 오를레앙이 자신의 성 팔레 루아얄의 1층을 개조해 상점 거리를 만든 것.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긴 회랑을 따라 줄지어 입점한 당대의 패션상점들을 비 맞을 걱정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려는 물건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커녕 매장에 들어서서도 원하는 물건을 말한 뒤에야 점원이 갖다 주던 식이던 이전과 달리 팔레 루아얄을 한 바퀴만 돌면 당대의 멋쟁이들이 지닌 유행 상품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산책보다 구경, 즉 윈도쇼핑을 목적으로 그 곳을 찾았고, 쇼윈도는 비유도 과장도 아닌,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파리 곳곳에는 유리지붕을 얹은 아케이드 상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기름 램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밝기의 가스등이 등장하면서 윈도 쇼핑은 조명의 세례까지 입게 된다.

 

19세기는 ‘진보’라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였고, 파리는 명실상부 그 신앙의 성지였다. 시민들은 쇼윈도의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 곧 도래할 지상 천국의 약속을 보았고, 그 약속 안에서 쇼윈도는 천년왕국 성전의 제단이자 임박한 미래였다.

 

진보의 신앙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게 처절하게 확인된 뒤로도 쇼윈도는, 비록 '물신(物神)'의 제단쯤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건재했다. 의미의 층위에서 추락하는 대신 현실의 저변을 넓혔고 치장의 정성도 날로 더해졌다.

 

그 공간은 이제 저마다 '쇼핑 천국'의 입구와 벽면을 장식하며, 비주얼 머천다이징(VMD), 곧 시각 마케팅 기법과 행위의 총체라 해도 좋을 첨단 소비문화산업의 전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쇼윈도는 빛과 색채의 마법 공간이다.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소품과 조명이 달라졌고 동시대인의 달라진 취향과 욕망을 겨냥하느라 기법과 분위기가 나아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천국의 꿈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같다. 주력 상품들을 전면에 돋보이게 배치한 고전적인 쇼윈도들 사이에는 상품의 진열 공간이라는 인식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듯 소비 낙원의 이미지만 드러내는 파격적 은유의 쇼윈도도 있다. 그 때의 상품은 천국의 소품처럼 기둥 뒤나 LED 조명의 그늘 속에 실루엣처럼 배치되곤 한다. 그야말로 벤야민이 변화무쌍한 물신의 세계로 비유한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1969년

 

 

비좁은 폐쇄공간의 그 호사스러운 확장성은 외양과 개성의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소비 욕망을 선도적으로, 또 압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 멋과 풍요와 여유와 기대 등 억눌린(혹은 억눌러온) 시민들의 욕구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분출하게 유혹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쇼윈도는 그 자체로는 만질 수도 들쳐볼 수도 없는 시각 공간일 뿐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쇼윈도의 벽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소비자의 발길을 매장 안으로 유인하거나 상품의 상징적 가치를 돋보이게 과시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쇼윈도를 향한 개별적 시선의 주체인 소비자는 그 판타지에 대한 욕구의 연대를 통해, 바로 그 집단의 판타지 안에서, 비로소 공동체임을, 이 소비공화국의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그렇게 쇼윈도는, 벤야민이 '물신을 향한 집단 예배의 방식'이라 칭했던 유행을 창조하고 확산시킨다.

 

물론 쇼윈도가 백화점이나 패션 부티크만의 공간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가게의 거의 모든 벽들이 투명 유리로 바뀌면서 이제 옷 가게나 자동차 매장 등 어지간한 상점들은 공간 전체가 쇼룸이 됐고, 그나마 남은 쇼윈도는, 음식점들이 더러 그러한데, 메뉴판 수준으로 왜소해진 곳도 적지 않다. 사이버 쇼윈도, 즉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상거래가 활성화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공간의 물리적 투명성과 무관하게, 꼼꼼한 소비자들이 실물을 확인하는 곳으로만 기능하기도 한다. 그 때의 오프라인 매장은 매출보다 홍보에 치중하는, 쇼룸이 된다.

 

소비의 대중화와 유행의 확산시차 단축으로 쇼윈도의 마네킹이 어제 입고 쓰고 신은 신상품을 오늘 거리에서 실제로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선보인 상품이 거의 실시간으로 조회되고, 또 소비된다. 그 때의 평면 모니터 역시 전자 쇼윈도다. 멋에 민감한 이들로 북적대는 서울 도심의 어떤 거리들은 그렇게 그 자체로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쇼윈도가 된다. 도시가, 아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 공간이라는 말은 그렇게도 확인된다.

 

원형으로서의 쇼윈도는, 그래서 사회의 축소판인 동시에 시(詩)적인 시연무대, 시장 자본주의의 내일을 향도하는 깃발이다. 쇼윈도가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혹은 집단의 소비 판타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 시즌에 소비해야 할 것들을 미리 보여주면, 내일 우리는 그 분위기와 양태를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된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핵심에는 기술 발전보다도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의 논리가 있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풍요로울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새롭게 개발되고 생산되는 상품들의 리듬과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이에 맞춰 인간들도 더욱 사물 의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대는 말 그대로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 곧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비사회’인 것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소설 『사물들』에 관한 인터뷰에서 소비사회에 유혹된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 (두 주인공) 실비와 제롬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것입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현상은 거꾸로, 쇼윈도의 변신에 대한 사회의 끊임없는 요구로 작용한다. 사회보다 한 발짝 앞서야 하는 그 공간이 더 이상 앞서 나가지 못할 때, 혹은 대중적 욕망의 관성에서 지나치게 벗어날 때, 쇼윈도만큼 금세 남루해지는 공간도 없다. 그 때의 쇼윈도는 물신의 제단이 아니라 상품의 무덤이 된다. 화려함의 그늘은 그렇듯 짙어서, 불 꺼진 쇼윈도와 먼지 앉은 마네킹은, 패잔병의 찢어진 깃발만큼이나 참담하고 스산하다. 그래서 쇼윈도는 밤낮없이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도 된다. 그 전투는 경쟁업체와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앙다문 지갑과도 치러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간과 치르는 고독한 전투다. 행복을 원하는 도시인들은 오늘도 쇼윈도에 있는 물신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 인적 끊긴 세모의 거리에서도 쇼윈도의 조명이 꺼지지 않는 것은, 그 적막의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멈추고 싶은, 멈출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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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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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굴복하여 할복을 결정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주인공 '나'는 성장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몇 가지 이미지를 접한다.

 

 

 

 

 

 

귀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616년  / 세바스티아누스로 분한 유키오  

 

 

히르슈펠트가 성도착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회화 및 조각 1위로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림’을 꼽은 것은 나의 경우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성도착자, 특히 선천적인 성도착자에게는 도착적 충동과 사디스틱한 충동이 구별하기 어렵게 착종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에 아주 적합한 예다. (49쪽)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레니의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티아누스는 주인공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이미지가 된다. 유키오에게 죽음이란 불완전한 삶의 보완양식으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자신이 뜻을 품고 있는 가치가 훼손되거나 그 길이 어긋나 버릴 것 같은 경우,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해 그 유한한 삶의 완전함을 이루고 또한 그것에 완벽한 방점을 찍으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의 은밀한 미학과 완벽한 죽음에의 동경을 꿈꾸어 왔던 그에게 죽음이란 바로 일생의 유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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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5: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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