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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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34]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

 

 

 

 

 

  Scene #1  자유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레비는 태어났다

 

 


소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폴 엘뤼아르, ‘자유’ 중에서)

 

 


1947년 1월 27일. 프리모 레비는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다시 태어났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지 9년 뒤, 회복된 삶의 건강 위에 그리고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2년 동안 잊힌 자유의 빈자리를 회상한다. 그 책이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였다. 레비의 글은 자유 그 자체만 소개하지 않는다. 자유를 억압받는 대상의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대상들까지 묘사함으로써 ‘자유’의 의미가 잃어버린 ‘소망 없는 부재’의 시대를 보여준다.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유가 제한된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집단 수용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바로 남자라면 가게 되는 군대라는 곳이다. 그러나 자유가 아예 없는 삶과 자유가 제한된 삶은 확연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흰 종이 위에’(엘뤼아르의 ‘자유’) 등 그 아무 곳에나 자유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안식처라고 할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이 자취를 감출 때 자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유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고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용소 생활을 실감나게 다룬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같은 책을 볼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수용소의 생활은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간수 몰래 아리아를 틀어놓는 낭만적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곳도 아니다. 

 

 


 Scene #2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를 기억하기 위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레비의 증언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폭력적인 현대 역사를 가슴에 새겨 두길 바랐으며, 그래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악한 본능은 단순히 인간의 하나뿐인 삶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자유마저 강탈한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쪽)

 

 

자유는 산소와 같다. 산소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오는 것과 비슷하다. 간수와 군인들은 이미 자유의 호흡이 가쁜 수용소 유대인들의 이름마저 빼앗으려고 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을 쓸 수 없고, 부를 수도 없다. 레비의 표현대로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35쪽)이다.

 

자유가 없는 감정의 빈자리에는 끝이 없는 절망과 공포감이 채워진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과 긍정의 힘은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좌절감만 깊어져 몸과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자유가 박탈된 숨이 턱턱 막히는 수용소를 탈출을 하려면 담대한 용기와 운이 따라줘야 한다. 소중한 자유의 공기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탈출을 감행하다간 영원히 공기의 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으려면 숨이 가쁘고 답답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자유 그리고 삶의 희망이 자취를 감춰버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레비는 자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리고 고민한다. 자유가 박탈된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 될까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할까. 결국 레비는 전자의 삶을 선택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수용소 간수와 군인들의 폭력을 참고 견뎌내고, 그 고통을 잠시라도 피할 수 없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옥의 형벌에 적응해나간다.

 

그러나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일수록 동등한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대감 또한 잃어버리고 만다. 레비는 생애 마지막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의 모습을 목격한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정치범들은 자유가 상실된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 내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수용소 생활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결투이기도 하다. 내 몸 온전히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에 나보다 약하거나 병든 동료까지 지켜주는 것이 귀찮고 버거운 일이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병이 들어 죽어간다거나 간부의 군화에 죽도록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만다. 나보다 약한 동료는 지옥의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런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익사하고 만다. 간신히 구조된 자는 익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야 한다.

 

 


 Scene #3  자유라는 이름을 써도 채울 수 없는 수용소의 기억 

 

끔찍했던 죽음의 수용소가 붕괴되어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 1956년, 레비는 노트 위에 마음껏 ‘자유’라는 이름을 쓰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자유란 그토록 간절했던 소중한 삶의 반이였기에 이런 날을 무척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자유’를 10번, 100번을 쓰더라도 수용소 10개월 생활에 잃어버린 그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살아도 허전함은 여전했다. 그 때 그 기억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가 박탈되어 절단된 그의 삶에 환상사지 같은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무엇이 레비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일까?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비록 수용소가 완전히 사라졌더라도 그 곳에서 탄생된 잘못된 인식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유령처럼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수용소의 유령은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오늘날의 극우파로 옮겨 붙었다. 과거 수용소와 독일 나치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종차별적인 도그마는 지금도 평화와 화합의 건강을 위협하는 잠복성 전염병과 같다. 그러한 인식의 산물은 수용소에 살아남은 레비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자유의 빈자리에 생긴 상처를 쿡쿡 찔러대면서 고통을 안겨 줬다.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하여 유대인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로 다시 태어났지만 수용소 생활에 의한 끔찍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 결정적인 주범이 바로 수용소의 도그마였다.

 

비록 레비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비록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의 기억을 상기시켜 그 위에 ‘자유’라는 건강하고 신성한 이름으로 지우려고 노력했다. 레비의 기록문학은 화생방 건물과 같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읽음으로써 자유가 없는 숨 막히는 세상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 입과 코에 드나드는 산소처럼 자유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참으로 안락하게 살면서도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유.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언어로 말하고, 눈으로 세상을 보고, 푹 쉴 수 있는 안식처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자유의 대상을 너무 광범위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레비가 살았던 시대, 아니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마저 박탈된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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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비웃었지 돌아온 사람 없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무모한 짓일 뿐이라고
하지만 난 알아 달빛 위에 날 그리는 너

 

(조규찬, ‘마지막 돈키호테’ 중에서)

 

 

 

 

 Scene #1  라만차의 늙은 기사, 돈키호테

 

 

 

 

 

 

 

 

 

 

 

 

 

 

 

 

 

 

 

 

 

 

 

 

 

 

 

 

흔히 우리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혹은 현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생각은 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는 사람을 가리켜 ‘돈키호테형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해한다.

 

그는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 곳곳을 모험하고, 불의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둘시네아 공주도, 거대한 거인 풍차와의 대결도 사실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키득키득 웃음을 참으며 정신이 돈 남자의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양 즐기기까지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광기’와 연결시킨다. 사실 그 때문에 돈키호테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광기는 다른 면에서 보면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노력이다. 남들과 똑같이 일생에 매여, 일상의 무료한 삶을 살던 돈키호테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만이 인생은 결코 아닐 것이야!” 그 각성은 그로 하여금 불멸의 명예,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위한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력을 뛰어넘어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그러나 돈키호테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안쓰럽다. 돈키호테는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로시난테가 넘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불행한 사고로 무방비상태가 된 그는 상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만신창이가 된 기사는 골병이 든 몸을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노쇠한 체력은 기사의 몸을 둘러싼 갑옷을 이겨내지 못한다. 땅에 드러누운 돈키호테는 상처 입어 죽어가는 기사의 모습을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달래본다.

 

 

 

 Scene #2  거울 나라의 하얀 기사

 

 

 

 

 

 

 

 

 

 

 

 

 

 

 

 

 

말하는 토끼를 쫓아 땅속으로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고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초겨울 날, 앨리스는 방 안에 걸린 거울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거울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 그곳은 거울 나라답게 모든 것이 반대다. 글자도 거꾸로 보이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반대로 달려야 한다. 벌을 받은 뒤에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이상한 곤충들,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험프티 덤프티 등 우스꽝스럽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만나 기상천외한 소동을 겪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 앨리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붉은 여왕, 하얀 여왕과 함께 즐기던 파티가 엉망이 되면서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존 테니얼의 삽화 #1

 

 

『거울 나라의 앨리스』(줄여서 '거울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이다. 전작이 따뜻한 봄날 땅속 이상한 나라로 뛰어들어 트럼프 카드들을 상대한 내용이었다면, 『거울 나라』는 추운 겨울날 거울 나라에서 체스 말이 돼 경기를 벌이는 이야기다.

 

 

 

 

 

존 테니얼의 삽화 #2

 

 

여기서도 돈키호테 못지않은 늙은 기사가 등장한다. 체스 판의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앨리스를 붉은 기사로부터 구출하고 보호해준다. 이 작품에서 하얀 기사도 특이한 인물이다.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통해 붉은 기사를 무찌르지만, 행동은 어설프게 짝이 없다. 말이 출발할 때마다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앨리스는 기사에게 말 타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돌직구를 던져본다. 기사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충분히 연습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기사는 자신이 발명에도 소질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발명품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앨리스 앞에서 자랑하지만,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거꾸로 메고 다니지만, 안에 있는 물건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자 기사는 자신이 만든 상자는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기사의 발명품은 쥐덫. 이것 또한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말등 위에 쥐가 있을 리가 없다. 앨리스는 그런 기사의 발명품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발명품이 지금 당장은 쓸모없더라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정말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소녀인 것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하얀 기사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체스 게임 규칙상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앨리스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사는 오랜만에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설명을 들어준 앨리스와의 작별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리스 연구가들은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관계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공주를 암시하기도 하며, 작가 루이스 캐럴과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했고 작품 속 앨리스의 모델이기도 한 앨리스 리델이라고 해석한다. 돈키호테, 하얀 기사 그리고 루이스 캐럴. 세 명 다 공통적으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고독한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돈키호테는 가상의 인물 둘시네아를 사랑하고, (비록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지만)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씁쓸하게 생각한다. 체스 게임 규칙만 아니었다면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는 앨리스를 끝까지 보호하고, 여왕의 든든한 친위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위대한 기사로서 명예를 드높여주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체스 판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루이스 캐럴은 11살의 앨리스 리델와 특별한 우정을 쌓지만,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캐럴은 앨리스 리델을 위해 불멸의 작품 『이상한 나라』를 완성시키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삐걱거렸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집착에 불안감을 느낀 리델 부인은 그를 학교에서 내쫓았고 그가 앨리스에게 보낸 편지도 모두 파기했다. 앨리스를 잊지 못한 그는 속편인 『거울 나라』에서도 소녀를 등장시키면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작별은 나이 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캐럴과 앨리스 리델과의 우정의 슬픈 결말인 셈이다. 

 

 

 

 Scene #3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

 

 

 

 

 

 

 

 

 

 

 

 

 

 

 

 

 

 

페터 빅셀의 단편집 『책상은 책상이다』에 수록된 '발명가'의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로 나온다. 1890년에 태어난 발명가는 평생 발명에 몰두하면서 생활한다. 그의 삶은 오직 도면을 그리는 일뿐이다. 남들이 자신의 발명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무시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10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발명에 성공한 발명가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외출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발명가는 21세기의 신식 발명품이 가득 찬 도시의 모습에 감탄한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발명품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이다. 발명가 스스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발명가의 모습을 비웃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지고 상용화된 발명품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겨대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

 

자신의 발명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실망한 발명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고독한 발명은 이어진다. 이미 세상에 나온 발명품이라도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 발명가라고 생각한다. 발명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명으로 달래보려는 발명가의 모습이 처량하다.

 

고독한 발명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현실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외면을 받는다. 발명가는 발명에 몰두한 고독한 삶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좌절감이 만들어 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발명'이라는 이상을 선택하지만, 백년의 고독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의 운명은 항상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명에 미쳐버린 마지막 발명가를 비난할 수 없다. '발명'이라는 신념만으로 우직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박수쳐줄 만하다. 그가 현실주의자였더라면 그동안 수없이 시도했던 발명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발명가로서의 명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명을 통해 명예와 부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인 발명가의 모습이다. 비록 자신을 외롭게 만들고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발명가 본인에게는 발명하는 창작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Scene #4  현실이 그들을 무시할지라도 

 

어릴 적에는 이상의 힘이 컸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녹녹치 않은 삶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품었던 이상, 어릴 적 꾸었던 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보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을 때도 있다. 이상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은 그들을 기억한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에서 도전을 두렵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하얀 기사가 없었다면 앨리스는 여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앓이'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탄생시켰고, 평범한 소녀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문학의 뮤즈가 되었다. 고독한 발명가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하면서도 적극적인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발명'에 살고 '발명'에 죽으려는 제대로 된 발명가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하나씩 자신만의 현실로 실천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은 돈키호테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그 어떤 현실주의자들보다 대단하며 박수를 받을만하다. 현실과 불화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려는 자세가 늘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진실하고,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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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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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바다보다 깊어라

깊이 담그면 아주 푸르게

그 속에 바다가 다

물통 속 스펀지처럼 담긴다

 


여류시인 디킨슨은 직감으로 뇌 자체를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뇌의 깊이는 디킨슨이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무한히 깊다. 바다처럼 깊은 것이 아니라 깊이를 전혀 알 수 없는 심해와 같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머릿속에 있는 뇌를 본다면 생각만큼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무게로는 커봤자 2kg 안팎에 불과하며 한 움큼 크기의 회백질 고기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태어나고 명멸한다.


뇌는 인간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사령탑이다. 뇌 없이는 생존은 물론, 관계를 맺고 창작하는 인간다움도 없다. 단순하게 보면 뇌는 정보를 들여온 뒤 그에 맞는 반응을 내보내는 일을 한다. 당연하고 간단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뇌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뇌의 신경세포는 무려 1000억 개나 된다. 뇌는 이 세포 간 연결 통로인 시냅스의 작동으로 기능한다. 시냅스는 사용빈도에 따라 생성, 강화, 소멸을 반복하며 뇌 구조를 변화시킨다. 알고 보면 디킨슨의 시구처럼 뇌의 구조는 수많은 시냅스가 구성되어 작동되는 광활한 세계인 것이다. 지금도 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뇌 지도를 제작함으로써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두뇌가 특정 부위에 손상을 입게 되면 사람은 기이한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사라진 신체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신을 보고, 상상임신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두뇌가 사고하는 메커니즘에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이 책의 원제처럼 뇌 속에 살고 있는 '유령'이 지독한 장난쳤을 뿐이다.


저자가 든 임상사례들은 그야말로 기이하다. 사고로 팔을 절단하고도 환상손가락이 환상손바닥을 후벼파는 고통에 시달리는 '환상사지', 시각에 생긴 맹점 때문에 의사 선생님의 무릎에서 원숭이 환각을 보는 '찰스 보넷 증후군', 자신의 부모님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카프그라 증후군' 환자 등이 나온다.


환상사지는 수술이나 사고로 갑작스럽게 손발이 절단됐을 경우, 없어진 손발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환자들은 환상 팔 혹은 환상 다리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한다. 뇌 속 유령이 일으키는 장난 중 가장 고통이 심한 증상이 아닐까 싶다.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존재하는 통증을 어떻게 치유할까? 처음에 의사들은 절단 부위의 밑동을 계속 잘라나가거나, 감각 신경을 잘라버리는 치료를 행했다. 그러나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다. 대뇌피질의 표면에는 신체의 여러 부위가 매핑(mapping)되어 있는데 팔 다리를 잘라내면 이에 따른 신체상(body image)이 빠르게 재구성된 결과 환상사지가 나타난다.


저자는 환상사지 치료를 위해 가상현실 상자를 고안했다. 상자 가운데 거울을 넣은 가상현실 장치를 만들어 정상적인 팔의 움직임을 환상사지가 느껴지는 팔 방향에 비춘다. 기형이 되거나 마비된 환상사지의 통증을 없애고 나아가 환상사지를 사라지는 데 성공한다. 이는 일종의 트릭이다. 팔이 사라져도 신체감각을 느끼는 대뇌 두정엽은 활동을 계속한다. 절단되고 없는 팔의 감각을 인지하려니 환상사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뇌가 거울에 비친 팔을 진짜라고 믿으면서 고통도 사라졌다.


이처럼 대뇌 두정엽 표면은 신체감각을 느끼는 곳이다. 성기, 발, 몸통, 손, 엄지, 얼굴, 입술, 목구멍 순으로 표면마다 느끼는 신체부위가 다르다. 또 각 부위는 민감도가 다 다른데 얼굴과 손, 입술이 민감하고 몸통과 다리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손, 입술의 움직임과 감각이 예민한 이유다.

 

뇌 속의 유령은 뇌 신경조직 활동의 산물이다. 그것은 팔과 다리가 내 몸에 붙어있다는 신체상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는 지각으로 절대로 볼 수 없다. 뇌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측면에서 뇌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나 변화가 아직은 미흡하다. 한 움큼밖에 안 되는 두뇌 세포질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환상이라는 책의 결론은 때로 허무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를 위로하고 겸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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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인간관계 모두가 사이로 통하고 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은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이는 소통의 공간이며 시간 속에 존재한다. 또한 사이는 틀림이 아닌 서로 다름의 영역일 것이다. 사이가 망가지면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왜곡된 신념으로 굳어져 공격적인 분노의식으로 표출되거나 우울감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인간, 시간, 공간의 삼간을 떨쳐버리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하여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겠지만 결국 섬이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고립이라는 심리적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누군들 고립이 두렵지 않을까. 고립을 피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갈림길이다. 하나는 고립을 피해 경쟁하는 길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섬에 갇힌 이들과 함께할 수는 없다.

 

또다른 길이 있다. 고립을 피해 연대하는 길이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우리들 다수는 두 눈 질끈 감고 이 길을 외면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비겁에 익숙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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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서평단 모집]

논어는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라! 

『한글 논어』퍼스트 서평단 모집(5/28~6/3)


 

안녕하세요. 파니파니 입니다 :) 요즘 유난히 자주 찾아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신간소식과 함께 특별한 이벤트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바로바로 신간을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는 퍼스트 서평단의 기회

(응? 별로라고요? 책소개를 보고 나면 달라지실걸요?!)


 

 

 


 

일단 책 소개부터 차근차근히 드려보겠습니다.

이제 딱 일주일 아..아니 2주 뒤면 출간될 예정인 판미동의 신간은

바로바로바로바로 『한글논어』입니다! 

(위에서 벌써 다 말해놓고 기대감 만들기 ㅋㅋㅋ )
 

파니파니가 표지 디자인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디자이너님께 달려가서 찍어 온 따끈따끈한 『한글논어』의 표지!

 

디자이너님의 말로는 지금은 시안이라 초록초록부분이 그냥 종이이지만

실제로 책이 나오면 저 부분이 무려 반짝반짝 (뭐..뭐라하죠? 금박?;;;)한 종이를 덧씌워서

완전 럭셔리하게 양장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벌써부터 무지하게 기대됩니다)

 

『한글 논어』는 대한민국의 대표 인문학자!

고려대학교 신청호 교수님이 만든 논어의 한글독해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뭐...뭐라? 논어가 뭐냐고요?!!!!

논어는 사서 중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입니다.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아는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죠.


 

공자가 좋은 말을 많이 쓰신 건 알지만, 중국의 책이기에

한자로 쓰여져 있어 그 풀이를 쉽게 할 수 없었고 이해도 어려웠는데요.

저처럼 『논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진 책이

바로 『한글논어』인거죠! (책에 대한 관심이 마구마구 샘솟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의 본론인 [퍼스트 서평단] 소식을 전하겠습니다!!(와아와아~)



 


[서평단 모집]

『한글논어』 퍼스트 서평단(리뷰어)를 모집합니다.


좋은 책일수록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바로 파니파니의 마음! 

그래서『한글 논어』를 가장 빨리 만나볼 퍼스트(First) 서평단을 뽑기로 하였습니다.

 

▶ 대상 도서 : 논어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버려라!『한글논어』

▶ 모집인원 : 『한글 논어』를 읽고 생생한 리뷰를 전달해줄 독자 딱 5명!


▶ 퍼스트 서평단 혜택 :

하나,『한글논어』양장본을 무료로 그것도 제일 먼저 받아볼 수 있다!

둘, 다음 판미동 신간도서를 조건없이 제일 먼저 받아 볼 수 있다!

셋, 가장 생생한 리뷰를 작성한 단, 1명의 독자는 특별 선물까지 받을 수 있다!

(특별 선물은 비밀이오, 쉿쉿 나중에 공개할거에요)


★퍼스트 서평단 신청하기★

하나, 개인 SNS(블로그,페이스북,트위터)에 서평단 모집글을 공유한다!

둘, 공유한 URL과 함께 퍼스트 서평단이 되고 싶은 이유를 게시글에 댓글로 작성한다!


▶ 퍼스트 서평단 모집기간 : 5/28(수)~6/3(화) / 당첨자 발표 : 6/5(목)




 

삶의 지혜를 배울수 있는 논어책을 재미있게 읽자! 판미동 6월의 신간도서

『한글논어』많이 기대해주시고 퍼스트 서평단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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