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비웃었지 돌아온 사람 없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무모한 짓일 뿐이라고
하지만 난 알아 달빛 위에 날 그리는 너

 

(조규찬, ‘마지막 돈키호테’ 중에서)

 

 

 

 

 Scene #1  라만차의 늙은 기사, 돈키호테

 

 

 

 

 

 

 

 

 

 

 

 

 

 

 

 

 

 

 

 

 

 

 

 

 

 

 

 

흔히 우리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혹은 현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생각은 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는 사람을 가리켜 ‘돈키호테형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해한다.

 

그는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 곳곳을 모험하고, 불의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둘시네아 공주도, 거대한 거인 풍차와의 대결도 사실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키득키득 웃음을 참으며 정신이 돈 남자의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양 즐기기까지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광기’와 연결시킨다. 사실 그 때문에 돈키호테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광기는 다른 면에서 보면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노력이다. 남들과 똑같이 일생에 매여, 일상의 무료한 삶을 살던 돈키호테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만이 인생은 결코 아닐 것이야!” 그 각성은 그로 하여금 불멸의 명예,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위한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력을 뛰어넘어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그러나 돈키호테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안쓰럽다. 돈키호테는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로시난테가 넘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불행한 사고로 무방비상태가 된 그는 상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만신창이가 된 기사는 골병이 든 몸을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노쇠한 체력은 기사의 몸을 둘러싼 갑옷을 이겨내지 못한다. 땅에 드러누운 돈키호테는 상처 입어 죽어가는 기사의 모습을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달래본다.

 

 

 

 Scene #2  거울 나라의 하얀 기사

 

 

 

 

 

 

 

 

 

 

 

 

 

 

 

 

 

말하는 토끼를 쫓아 땅속으로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고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초겨울 날, 앨리스는 방 안에 걸린 거울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거울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 그곳은 거울 나라답게 모든 것이 반대다. 글자도 거꾸로 보이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반대로 달려야 한다. 벌을 받은 뒤에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이상한 곤충들,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험프티 덤프티 등 우스꽝스럽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만나 기상천외한 소동을 겪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 앨리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붉은 여왕, 하얀 여왕과 함께 즐기던 파티가 엉망이 되면서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존 테니얼의 삽화 #1

 

 

『거울 나라의 앨리스』(줄여서 '거울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이다. 전작이 따뜻한 봄날 땅속 이상한 나라로 뛰어들어 트럼프 카드들을 상대한 내용이었다면, 『거울 나라』는 추운 겨울날 거울 나라에서 체스 말이 돼 경기를 벌이는 이야기다.

 

 

 

 

 

존 테니얼의 삽화 #2

 

 

여기서도 돈키호테 못지않은 늙은 기사가 등장한다. 체스 판의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앨리스를 붉은 기사로부터 구출하고 보호해준다. 이 작품에서 하얀 기사도 특이한 인물이다.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통해 붉은 기사를 무찌르지만, 행동은 어설프게 짝이 없다. 말이 출발할 때마다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앨리스는 기사에게 말 타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돌직구를 던져본다. 기사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충분히 연습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기사는 자신이 발명에도 소질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발명품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앨리스 앞에서 자랑하지만,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거꾸로 메고 다니지만, 안에 있는 물건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자 기사는 자신이 만든 상자는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기사의 발명품은 쥐덫. 이것 또한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말등 위에 쥐가 있을 리가 없다. 앨리스는 그런 기사의 발명품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발명품이 지금 당장은 쓸모없더라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정말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소녀인 것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하얀 기사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체스 게임 규칙상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앨리스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사는 오랜만에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설명을 들어준 앨리스와의 작별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리스 연구가들은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관계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공주를 암시하기도 하며, 작가 루이스 캐럴과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했고 작품 속 앨리스의 모델이기도 한 앨리스 리델이라고 해석한다. 돈키호테, 하얀 기사 그리고 루이스 캐럴. 세 명 다 공통적으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고독한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돈키호테는 가상의 인물 둘시네아를 사랑하고, (비록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지만)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씁쓸하게 생각한다. 체스 게임 규칙만 아니었다면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는 앨리스를 끝까지 보호하고, 여왕의 든든한 친위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위대한 기사로서 명예를 드높여주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체스 판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루이스 캐럴은 11살의 앨리스 리델와 특별한 우정을 쌓지만,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캐럴은 앨리스 리델을 위해 불멸의 작품 『이상한 나라』를 완성시키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삐걱거렸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집착에 불안감을 느낀 리델 부인은 그를 학교에서 내쫓았고 그가 앨리스에게 보낸 편지도 모두 파기했다. 앨리스를 잊지 못한 그는 속편인 『거울 나라』에서도 소녀를 등장시키면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작별은 나이 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캐럴과 앨리스 리델과의 우정의 슬픈 결말인 셈이다. 

 

 

 

 Scene #3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

 

 

 

 

 

 

 

 

 

 

 

 

 

 

 

 

 

 

페터 빅셀의 단편집 『책상은 책상이다』에 수록된 '발명가'의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로 나온다. 1890년에 태어난 발명가는 평생 발명에 몰두하면서 생활한다. 그의 삶은 오직 도면을 그리는 일뿐이다. 남들이 자신의 발명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무시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10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발명에 성공한 발명가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외출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발명가는 21세기의 신식 발명품이 가득 찬 도시의 모습에 감탄한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발명품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이다. 발명가 스스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발명가의 모습을 비웃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지고 상용화된 발명품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겨대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

 

자신의 발명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실망한 발명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고독한 발명은 이어진다. 이미 세상에 나온 발명품이라도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 발명가라고 생각한다. 발명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명으로 달래보려는 발명가의 모습이 처량하다.

 

고독한 발명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현실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외면을 받는다. 발명가는 발명에 몰두한 고독한 삶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좌절감이 만들어 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발명'이라는 이상을 선택하지만, 백년의 고독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의 운명은 항상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명에 미쳐버린 마지막 발명가를 비난할 수 없다. '발명'이라는 신념만으로 우직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박수쳐줄 만하다. 그가 현실주의자였더라면 그동안 수없이 시도했던 발명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발명가로서의 명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명을 통해 명예와 부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인 발명가의 모습이다. 비록 자신을 외롭게 만들고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발명가 본인에게는 발명하는 창작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Scene #4  현실이 그들을 무시할지라도 

 

어릴 적에는 이상의 힘이 컸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녹녹치 않은 삶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품었던 이상, 어릴 적 꾸었던 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보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을 때도 있다. 이상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은 그들을 기억한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에서 도전을 두렵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하얀 기사가 없었다면 앨리스는 여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앓이'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탄생시켰고, 평범한 소녀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문학의 뮤즈가 되었다. 고독한 발명가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하면서도 적극적인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발명'에 살고 '발명'에 죽으려는 제대로 된 발명가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하나씩 자신만의 현실로 실천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은 돈키호테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그 어떤 현실주의자들보다 대단하며 박수를 받을만하다. 현실과 불화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려는 자세가 늘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진실하고,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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