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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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간을 집어 삼키는 자  

 

 

 

 

 

프란시스코 데 고야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년

 

여기 눈을 돌리게 싶어지게 하는 그림이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튀어나온 광인(狂人).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더 이상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무엇을 뜯어 삼키고 있다. 이런! 광인이 먹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머리 부분과 오른팔을 이미 물어 뜯겨 없어졌고 하나 남은 팔이 뜯겨 나가려고 한다. 이제는 그림을 보는 관객마저도 집어 삼킬 기세다. 놀랍게도 그가 먹고 있는 것은 광인의 아들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무자비한 신의 모습을 묘사한 무시무시한 그림이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된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시간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소중한 ‘시간’을 거대한 낫으로 싹둑 잘라버린다.

 

사투르누스는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신계(神界)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우라노스의 무시무시한 예언은 사투르누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사투르누스도 자신처럼 자식의 손에 죽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예언에 대한 공포감을 이길 수 없었던 사투르누스는 대지의 여신 레아와 결혼해서 낳은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를 비롯한 다섯 자녀를 집어 삼켰다. 자신 앞에 놓여진 ‘시간’을 집어 삼키듯이.

 

핏물이 줄줄 흐르는 자식의 팔뚝을 한입 베 물은 광기 어린 야만의 표정은 나치 정권을 세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자살로 세계 대전을 마감시킨 히틀러가 묘하게 오버랩된다. 히틀러는 누구인가. 그는 평화로운 세계의 시간뿐만 아니라 유대인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그리고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을 둘러싼 역사마저 완전히 집어 삼켜버린 무서운 인물이다.

 

 

 

 Scene #2  ‘미친 존재감’ 히틀러

 

1934년 총통과 수상을 겸한 지위를 겸하여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되어 1945년 자살로 세계 대전이 종전의 막이 내릴 때 히틀러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마디로 ‘시간과 역사 잡아먹기’의 향연이었다. 아니, 이보다 더한 것들도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는 전 세계를 군림하고 싶은 현대의 크로노스였다.

 

죽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최근에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가 나왔는데 세계 24개 언어로 구성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디피아의 알고리즘을 분석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상의 인물이 바로 히틀러였던 것이다. 2위가 마이클 잭슨, 3위는 마돈나였고 4위는 예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은 위키디피아에서 검색 횟수가 많은 인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키디피아에 기록된 인물의 인생에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사건에 연관이 많이 되는 일종의 ‘링크’ 관계를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섯 단계만 걸치면 연결된다는 링크의 원리를 입증할 때 인용되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틀러의 존재는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동에 따라 전쟁의 판세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또한 달라졌으니까. 히틀러가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펼쳤을 때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원자 폭탄 제조에 관여했다. 만약에 히틀러가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나라 한 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면? 이렇게 역사가 진행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극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역사의 순간이 없었다면 일본은 패전되지 않았을 것이며 1945년 8월 15일은 그저 평범한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광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용소와 가스실은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의 장소였지만, 안네 프랑크와 프리모 레비의 소중한 기록은 살아남아 끔찍한 역사 한 페이지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1)

 

 


 Scene #3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림 실력으로 영 재미를 보지 못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훈장을 두 개나 받은 전쟁용사가 되었지만, 종전 이후에 별 볼일 없는 백수가 되었다. 젊은 히틀러의 시기는 거의 가난, 실패, 무기력함 그 자체였다고 보면 된다.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가끔 세상이 원망스럽고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 본다. 가난과 실패로 점철되는 청춘을 보낸 히틀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으로 변했고, 감정 조절,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되었다. ‘인정받지 못한 자’는 인생 역전을 위해서 ‘총통’이 되기로 결심한다. 결핍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이 바로 ‘정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결합된 나치즘이 탄생되었다. 이때부터 반유대주의에 대한 광기의 그림자가 히틀러를 지배하게 된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히틀러가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사랑도 그의 삶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작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의 삶에 많지는 않아도 몇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그녀들을 하찮게 여겼고,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다. 에바 브라운은 늘 소홀한 대우를 받고 계속 모욕을 받은 끝에(“그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나를 필요로 한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30쪽)

 

 

 

그의 지나친 과대평가는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히틀러는 특별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총통이 된 히틀러는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후계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이을 정당의 후계자도 만들지 않았다.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 돌격대 지도부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만약에 히틀러에게 자식, 특히 아들이었다면 사투르누스처럼 벌써부터 자신의 후환이 두려워서 제거했을 것이다. 그의 밑에서 활동했던 히믈러, 괴링, 괴벨스 등은 히틀러의 권력을 돋보이고 기반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정당도 마찬가지. 권력의 초점뿐만 아니라 독일의 운명도 히틀러에게 향해야만 했다.

 

945년에 자살하기 직전에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가 독일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폭파하라고 말할 정도면 삶의 개인적 패배를 독일이라는 국가의 패배와 동일시하는 무시무시한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길지만 짧은 생애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싶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와 함께. 인간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모든 것을 한 인간의 생애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해야 한단 말이지... 남들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쓰는 판에 내겐 겨우 보잘것없는 몇 년밖에 없으니.” (53쪽)

 

 

 

 Scene #4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히틀러라고 하면 에너지가 과다하게 노출되는 듯한 그의 연설 장면이 연상된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통해 대중을 선동할 줄 아는 지능적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히틀러를 연구하고 분석한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입장은 다르다. 히틀러가 집권할 때 600만 명의 실업자가 3년 후에 완전 고용이 되는 ‘경제기적’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은 히틀러 집권기에 있어서 ‘대박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군사력까지 증강시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독일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성과가 더욱 강조될수록 정치인의 업적도 부각되는 법. 그래서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정할 수 있어도 성과만 가지고 역사적 과오를 가릴 수 없다. 우리는 히틀러가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책을 통해 왜 그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시간과 평화, 세계마저 집어 삼키고 싶었던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인 이성과 비판의식을 잃은 한 인간의 광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하겐 크로이츠와 욱일승천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단체2)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다.

(22쪽)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하프너는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피카소처럼 불후의 걸작을 남기지 못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작품은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잔혹한 풍경화를 완성했고, 지금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역사화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가 남긴 작품을 보고 있고 그 속에 살고 있다.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히틀러와 나치를 옹호하고, 전 세계에 각인시킨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쓰고, 역시 히틀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귀도 크노프의 말처럼 히틀러의 볼모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서 독일의 트라우마 히틀러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 이 말 속에 우리가 히틀러를 이해해야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히틀러는 단순히 독일만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전 세계의 트라우마다. 히틀러가 남긴 광기의 유산을 기억하는 것은 제2의 히틀러의 탄생과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을 방지한다.

 

사투르누스는 우라노스의 예언을 피할 수 없었다. 레아가 사투르누스의 광기가 삼키기 직전에 제우스를 따로 숨겼다. 결국 성장한 제우스는 사투르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뱃속에 들어간 신들은 살아남았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하나로 이어지면 역사가 된다. 20세기의 사투르누스 히틀러는 시간과 자신의 삶마저 지배하려다가 자멸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제우스 같은 강력한 견제자가 있었더라면 광기의 시간을 길지 않았을 것이며 자멸에 이르는 시간이 더 앞당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곡된 히틀러 현상을 바로잡고, 광기의 풍경화가 다시 나오지 않기 위해서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제우스와 같은 견제자가 되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히틀러가 왜 미쳤는지, 그리고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싫어도 그를 이해하고 검토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1) 히틀러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를 첨가하자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故 손기정과의 관계도 빠질 수가 없다.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이 히틀러였다. 참고로 서울시 기념물이 된 일명 ‘손기정 월계수’는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히틀러가 직접 준 선물이라고 전해졌지만, 근거가 없는 허구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당시 독일에서는 월계수를 구하기 힘들어서 참나무로 대체했다.

 

2) 사진출처: 극우 "히틀러 기리자"나치들고 도쿄시내 행진

(오마이뉴스, 201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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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다. 그는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을 때, 졸업증서에는 ‘유대인’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이 가슴에 노란색으로 된 ‘다윗의 별’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과 유사한 인상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레비는 자신도 독일 유대인들처럼 ‘다윗의 별’을 표시된 옷을 입은 채 수용소에서 폭력과 차별의 세월을 보낸 줄이야 생각이나 했을까.

 

사실 레비는 대학 졸업을 못할 뻔 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938년 파시스트 정권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유대인에게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경제적 활동을 제한함)을 모방해 ‘인종법’을 제정한다. 유대인은 공립학교 입학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재학생은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인종법 공포 이후로 잠잠했던 반유대주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생계가 막혔던 레비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서클에 가입하여 저항 활동을 한다.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점령했을 때 레비가 소속된 유격대가 체포되고 만다. 이때부터 레비의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레비의 작품은 반유대주의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그들의 왜곡된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레비는 광기의 전쟁 앞에서 파멸되고 불안에 떠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이성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의 허상을 고발한다.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전쟁의 살상과 죽음의 수용소를 탄생시킨 인종차별 도그마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레비의 말은 언뜻 반유대주의의 끔찍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의 광기를 염두에 둔 듯한 느낌이 난다. 우리는 히틀러라고 하면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가 생각난다. 그는 유대인을 지독하게도 혐오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반유태주의 감정을 가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히틀러에 관한 기본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출신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 개인적 인간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이해된다. 『나의 투쟁』에서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곳에 지배민족인 게르만족의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게르만족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세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세균’을 제거하는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히틀러를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했던 빈은 오래전부터 반유대주의가 남아있던 지역이었다. 비록 『나의 투쟁』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주장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논리적으로 허술하지만, ‘유대인은 모두 적이다’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고, 병적인 증상으로 인한 집착은 학살과 수용소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라도 확신이 강할수록 전염병처럼 더욱 퍼지게 된다. ‘유대인=적, 세균’이라는 전제는 ‘적과 세균은 제거해야 한다’로 이어져 ‘유대인은 제거’라는 끔찍한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세균 같은 유대인을 제거한 자는 청결하고 건강한 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반유대주의의 삼단논법은 수용소에서도 곳곳이 퍼져나갔다.

 

벽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그린 이상한 벽화들이 있다. 예컨대 웃통을 벗은 착한 포로가 짧게 이발을 한 혈색 좋은 머리통을 비누로 열심히 씻는 모습과 전형적인 유대인의 코와 푸르스름한 피부를 지닌 나쁜 포로가 눈에 띄게 더러운 옷을 껴입고 머리에 빵모자를 쓴 채 마지못해 손가락 하나만 세면대의 물에 담그는 모습이다. 첫째 그림 밑에는 ‘So bist du rein’(이렇게 해서 너는 깨끗해진다), 둘째 그림 밑에는 ‘So gehst duein'(이렇게 해서 너는 뒈진다)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좀 더 밑에는 고딕체의 흐릿한 프랑스어로 ’La proprete, c'est la sante'(청결은 건강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55쪽)

 

유대인은 불결하고 씻지 않는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을 ‘세균’처럼 멸시하던 히틀러의 발상과 유사하다. 유대인이 아닌 자는 비누칠을 할 수 있고, 깨끗한 물로 세척할 수 있다. 그러나 옷, 신발, 이름마저도 빼앗겨버리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 유대인은 씻을 수가 없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세면실이 아닌 가스실이다.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독일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나 빨치산 활동에도 제약을 준다.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치열한 삶을 그린 『지금이 아니면 언제?』에 유대인을 싫어하는 빨치산 부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유대인 멘델은 사랑하는 부인이 독일군에 처형당한 사실에 유대인으로서 독일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 율법에서는 살인을 금지하는데 멘델은 아내의 복수를, 그리고 유대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독일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기로 한 것이다. 오랜 여정 끝에 게달레 부대를 만나 무장활동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에 괴로워한다.

 

 

멘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피오트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헌데... 그러니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대체 뭔데 그렇게 뜸 들여?”
“정말 예수를 고자질한 게 유태인들이 맞나요?”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중에서, 149쪽)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마치 ‘한 지붕 두 가족’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다름’보다 ‘같음’을 강조하며 양자 사이의 화해를 꾀하는 움직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서로 화해하고 상생하기 위한 길은 순탄치 않다. 여전히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레비가 경고한 것처럼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불쑥 나타나 유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미국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가 유대인 마을에 총기를 난사하고, 그리스 국적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 유대인 진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의사의 집에 수색하는 과정에 나치의 문양이 새겨진 칼도 발견되었다.

 

아우슈비츠가 무너지고 사라졌어도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레비는 화학자이면서도 글쓰기를 통해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 만들어 낸 비극을 증언하고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가 경고했던 ‘불길한 경종’을 다시 한 번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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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슨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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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Scene #1  심령술에 빠진 추리소설가

 

탐정하면 셜록 홈즈를 떠올리지만 셜록 홈즈하면 코난 도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완벽에 가까운’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반해 그 창조주인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흥미진진한 소설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도일은 그러나 “홈즈가 지겨워졌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홈즈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893년. 작가는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폭포에 떨어뜨려 죽인다. 작중 인물에 싫증이 난 것일까. 작가의 명성을 압도하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일까.

 

그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런던 시내에는 검은 상장을 단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군중은 소설 속 홈즈의 집이 있는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로 몰려가 가상의 인물을 연호했다. 항의편지에 시달리던 출판사는 작가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원성에 결국 홈즈를 부활시켰다.

 

도일은 ‘홈즈의 작가’가 아닌 ‘역사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사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도일은 역사소설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초현상을 소재로 다룬 공포소설도 쓰기도 했다. 홈즈는 초현상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이성과 명석한 논리로 무장한 인물인 반면에 도일의 실제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만은 않았다. 도일은 말년에 심령술에 무척 관심이 많아 세계심령학회 회장도 지냈다. 1920년대 영국은 심령학이 엄청난 유행이었는데 그 때 ‘코팅리 자매의 요정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코팅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요정’으로 추정되는 사람 형상과 함께 사진에 찍힌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조작된 사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일은 이 사진가 진짜라고 믿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요정들의 출현』이라는 책도 발표했다. 유명 인사가 사진을 진짜라고 주장하자 꽤 많은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자 사진의 위조사실이 밝혀졌다. 코팅리 자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사진 속 요정은 마분지와 실로 만들어낸 요정이라고 실토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홈즈의 작가 도일마저 조작된 사진을 쉽게 믿고 만 것일까. 당시 1920년대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우울한 심리상태는 요정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믿게 만들었다.

 

 

 Scene #2  초현상적 사건을 소재로 다룬 네 편의 소설

 

간혹 우리는 매사가 불안하며 심약해지만 헛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짜로 믿고 만다. 아니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수록 가짜라고 해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아마도 도일은 평소에도 초현상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세계의 불가사의를 모은 책에서도 종종 소개되는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리 설레스트 호는 처음 건조되었을 때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 후에 ‘마리 설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872년에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지기 직전에 배는 미국 보스턴을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항해하는 설레스테 호가 발견되는데 돛을 펼쳐져 있었으나 장난감 배처럼 수면 위에 고정되듯이 멈춰져 있었다. 문제의 배를 발견한 데이 그라티아 호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배의 승무원은 8명이었으며 선장 브릭스의 처와 5살 된 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마리 설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은 채 표류하듯이 배는 그렇게 움직였다. 가장 의심스런 일은 외부의 습격을 받을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도일은 마리 설레스테 호의 승객으로 실종된 폐결핵 전문가 하버쿡 젭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의 진술을 토대로 설레스테 호가 실종된 이유를 독자에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낸다. 물론 화자는 하버쿡 젭슨이다. 

 

젭슨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게 된다. 그의 병상을 돌보던 흑인 노파로부터 젭슨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돌멩이를 받는다. 노파는 이 돌이 아버지에, 그 아버지에, 또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귀중하고 성스러운 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젭슨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을 주게 되었다. 둥그스럽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돌을 젭슨은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보관한다.

 

상처가 회복된 젭슨은 요양을 겸해서 마리 설레스트 호에 승선하게 된다. 선원을 제외한 또 다른 승객은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셉티미어스 고링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데다가 밤이 되면 그의 얼굴에 나오는 음흉한 표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느껴진다.

 

항해할수록 설레스테 호에 괴이하고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선장의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고, 가족을 잃은 선장은 실의에 빠져 멘탈이 붕괴되고 만다.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하고 만다. 선장을 잃은 설레스테 호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돈 채 목적지를 향하지만, 엉뚱하게도 배는 목적지에 완전히 떨어진 아프리카 대서양 쪽에 표류한다.

 

이 때 수수께끼의 인물 고링이 드디어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선장과 그의 가족을 제거했다. 배에 탑승한 선원 중에 고링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선원과 승객을 한명씩 제거할 수 있었다. 고링은 왜 셀레스테 호에 탑승해서 이런 잔인무도한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젭슨이 가지고 있는 검은 돌 하나 때문에 치밀한 살인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사실 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돌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가죽 깔때기』는 오컬트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라이어넬 데이커는 탐험가 로버트 리플리처럼 진귀하고 마술적인 물건을 수집하고, 초현상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수집한 물건 중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 깔때기가 있는데 데이커는 친구인 ‘나’에게 깔때기에 관한 불가사의한 비밀을 언급하는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의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 직접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해보라고 제안한다. 친구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받아들이는데 머리맡에 깔때기를 둔 채 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꺼림칙하게 여기면서 잠을 청하는데 기괴한 내용의 꿈을 꾼다. 죄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그녀를 벌하기 위해서 검은 옷을 입은 몇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목마에 포박당한 여인의 옆에는 물을 가득담은 세 개의 양동이와 국자가 있다. 그리고 사내 한 명이 문제의 가죽 깔때기를 여인의 입 속으로 찔러 넣는데... 끔찍한 벌을 받는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나’가 목격한 꿈의 내용은 어떤 장면일까?

 

『경매품 249호』는 미라가 등장한다. 옥스퍼드 올드칼리지 기숙사에 미라가 있다. 흑마술에 탐닉하는 올드칼리직 학부생 벨링엄은 자신의 방에 미라를 보관한다. 그것이 기숙사 전체를 발칵 뒤집는 무시무시한 사건의 전말이 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경매품 249호’라는 상표가 붙인 미라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공격한다. 주인공 스미스는 기숙사에 발생하는 괴사건을 비웃었지만 자신도 공포스러운 일을 경험한다. 벨링엄의 방에 보관된 미라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라는 왜 기숙사 학생들만 골라 습격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북극성호의 선장』은 도일이 젊은 시절에 고래잡이배에 탔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배경과 전개가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과 유사하다. 의학도 존 멜리스터 레이가 북극성호에 탑승하면서 겪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이다. 배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는 곳에 갇히고 만다. 주위에는 온통 하얀 빙하만 있을 뿐이다. 유빙이 배에 부딪히는 순간,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로 침몰할 위기에 놓여졌다. 그런데 북극성호의 선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밤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거대한 얼음의 땅을 향해 멀뚱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얼른 빙하의 세계를 탈출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 선장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니. 존은 선장의 모습에 어이 없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이없는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한다. 선원이 유령을 목격했다는 등 항해가 지체될수록 선상에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항해하면서 일용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선장이 실종되고 만다. 선원들은 배에 저주를 받았다고 두려움에 떤다. 북극성호도 마리 설레스트 호처럼 저주받은 배가 된 것일까? 그리고 선장과 선원을 두렵게 만든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Scene #3  '오컬트 소설가' 코난 도일

 

네 편의 작품에 장르를 구분하자면 똑부러지게 말하기가 애매모호하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도일 나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마술과 심령술에 대한 코일의 독특한 관심을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훗날 『가죽 깔때기』와 『경매품 249호』그리고 홈즈 시리즈에 포함되는 일부 작품들에서도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네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초현상을 믿지 않는 이성적인 인물과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는 인물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물도 초현상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순간 믿게 된다. 상당히 이성적일 것 같은 도일이 평생 심령술에 푹 빠진 채 살았던 그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도일의 작품 세계는 흥미진진하다. 도일은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SF소설도 쓸 정도로 장르소설의 시초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동안 홈즈 시리즈만 읽은 독자라면 잠시 홈즈를 잊고 도일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본다면 특별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역사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던 도일의 수식어에 ‘오컬트 소설가’라고 하면 본인은 만족스러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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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도정일 산문집 도정일 문학선 1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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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쓰잘데없이 고귀한 그들의 선물

 

가난한 부부에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축복하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고작 1달러 87센트를 가진 델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백금 시곗줄을 사주고 싶은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시곗줄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구하기 위해서 길고 탐스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대신 짐에게 머리를 잘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백금 시곗줄을 구입했지만 델러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 때문에 짐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애를 태운다.

 

드디어 짐이 돌아오고 그는 델러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럴 수가! 짐은 델러가 무척 갖고 싶었던 머리빗 세트를 선물로 사온 것이다. 자신이 받는 주급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머리빗이다. 그러나 머리빗을 꽂을 수 있는 머리카락이 없다니. 애써 미소를 짓는 델러는 머리는 금방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짐에게 보여줬다. 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고 시곗줄을 산 델러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동안 어디에다 간직하도록 해요.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훌륭한 것 같소. 나는 당신의 빗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계를 팔아버렸다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날 밤 세상에 어떤 부부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판 것을 알고는 깊은 사랑을 확인했으니까, 선물은 상대방을 향한 고마움의 징표이다. 받는 이에 대한 배려가 핵심이다. 따라서 가격보다는 물건에 담기는 의미가 중요하다. 짐과 델러가 서로에게 받은 선물은 당장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부 간의 진한 사랑과 희생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곗줄과 머리빗은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선물이다.

 

 


 무엇과도 비견될 수 있는 고귀한 것들

 

지금까지 살면서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을 하나라도 가진 적이 있던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소중하게 여긴 보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와 구슬치기에서 얻은 알록달록 색깔 구슬들 아니면 산타 할아버지가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와 양말에 선물을 놓고 간 것. 비록 그 선물이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것은 아니었지만 순수했던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준 진짜 선물이라고 생각해 애지중지 여긴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겐 보물 상자가 있었다. 아끼던 상자를 가지고 이사를 할 때면, 작은 상자 안에 소중한 물건들을 더 많이 넣으려고 물건들을 넣었다 뺐다 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마음속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과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면, 그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을 채워갈수록 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좁아질 것이고, 상자 안에서 재물과 욕심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우리 마음속 상자는 따뜻한 사랑만으로 충만해져갈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 나의 보물상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욕심과 사랑 중에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행복할까? 그리고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오늘 하루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갈까?

 

너무나 여유 없이 앞만 보며 메마른 길을 달려온 삶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 보물 상자에서 욕심과 재물은 조금 덜어내고 사랑과 행복을 좀 더 채워야 한다. 보물 상자에 채울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은 세상이 쓰잘데없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소풍에 가면 즐거웠던 보물찾기 게임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찾기 힘들다면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어보면 좋다. 제목만 봐도 책 속에 우리가 찾아야 할 고귀한 것들이 목록처럼 나열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이 책 속에 목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남의 목록에 의존해서 찾는 것보다는 독자와 자신이 앞으로 계속 찾고 만드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자발적인 삶을 위한 임무이다.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삶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스스로 찾아보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한 번 뿐인 삶이 마감할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결국 소중한 것의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놀이 방식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나름 고귀한 것을 두 개만 소개해본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1 : ‘너는 누구인가’, 자기 인식의 질문

 

일단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을 우리는 왜 질문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갑작스럽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하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네가 누구인가는 마침내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너보다 더 큰 것, 너를 연결할 더 큰 어떤 것을 찾았는가?” (‘누구시더라’ 중에서, 14쪽)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식할 수 있다. 일찍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만든 철학의 명제로 삼았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골몰하는 일에 대해, 폐쇄성의 혐의를 둔다. 혹은 관계에 무관심하다고 여기거나, 공동체로부터 도피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란 우선은 사회적인 원리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기 안의 격률을 갖고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이들은, 자기 안의 격률로 인해 타인과 그의 흔적들에 역시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너는 누구인가’라는 이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또는 쓰잘데없는 질문 속에는 ‘자각(自覺)’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를 알아야 ‘나’를 둘러싼 세상도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이 질문은 기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이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굳이 대학교나 철학책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이 질문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도정일 교수는 평생을 바쳐 인문학적 질문을 위해 집요하게 몰두한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비참한 참상을 기록한 이탈리아 출신 작가 프리모 레비를 들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기억 투쟁’)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 시절 때 탐독했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나는 짐승으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레비는 이런 구절을 통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2 : 문학

 

백범 김구 선생의 건국이상이 ‘문화국가’였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아직 궁핍하던 시절, 백범은 ‘부강한 나라’를 가로질러‘문화국가’를 역설했다. 몇 단계 건너뛴 화술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과 대조되는 평화주의자의 안목이 경탄스럽다.

 

백범 선생이 말하는 ‘문화’에는 여러 가지 분야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문학’이 빠질 수 없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문학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책을 멀리하고 학창시절에 문학을 외우는 과목이라는 기억이 강하게 남은 사람은 문학이라는 말을 어렵게 느낄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단순히 문학(소설, 시)을 읽고 즐기는 행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시 배달부의 인기’) 특히 문학 읽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게 만드는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문학적 연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은 정신의 성장이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문학을 수능시험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절대로 문학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알 수 없다. 수능에 나올 문제를 기막히게 맞힌 족집게 강사도 문학 독서를 통한 ‘위대한 감각’을 가르치지 못한다. ‘위대한 감각’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를 깨닫는 능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 독서가 쓰잘데없은 시간 낭비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성과 감성을 겸비하는 윤리적 인간이 되려면 문학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Epilogue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고 나면 꼭 자신만의 고귀한 목록을 찾아보라. 쓰잘데없는 것도 좋다. 나는 ‘자기 인식의 질문’, ‘문학’ 이외에도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관용, 도서관 등등. 최소 5개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목록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오늘에 감춰진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내줄 아는 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쏟는다면 기분 좋아지는 나 자신을 덤으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 사랑, 관용, 선물, 희망. 아무나 좋다. 이 세상에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꼭꼭 숨겨져 있어도 좋지만, 그래도 찾기 쉽도록 눈에 띄면 좋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중함과 고귀함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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