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다. 그는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을 때, 졸업증서에는 ‘유대인’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이 가슴에 노란색으로 된 ‘다윗의 별’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과 유사한 인상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레비는 자신도 독일 유대인들처럼 ‘다윗의 별’을 표시된 옷을 입은 채 수용소에서 폭력과 차별의 세월을 보낸 줄이야 생각이나 했을까.

 

사실 레비는 대학 졸업을 못할 뻔 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938년 파시스트 정권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유대인에게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경제적 활동을 제한함)을 모방해 ‘인종법’을 제정한다. 유대인은 공립학교 입학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재학생은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인종법 공포 이후로 잠잠했던 반유대주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생계가 막혔던 레비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서클에 가입하여 저항 활동을 한다.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점령했을 때 레비가 소속된 유격대가 체포되고 만다. 이때부터 레비의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레비의 작품은 반유대주의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그들의 왜곡된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레비는 광기의 전쟁 앞에서 파멸되고 불안에 떠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이성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의 허상을 고발한다.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전쟁의 살상과 죽음의 수용소를 탄생시킨 인종차별 도그마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레비의 말은 언뜻 반유대주의의 끔찍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의 광기를 염두에 둔 듯한 느낌이 난다. 우리는 히틀러라고 하면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가 생각난다. 그는 유대인을 지독하게도 혐오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반유태주의 감정을 가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히틀러에 관한 기본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출신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 개인적 인간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이해된다. 『나의 투쟁』에서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곳에 지배민족인 게르만족의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게르만족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세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세균’을 제거하는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히틀러를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했던 빈은 오래전부터 반유대주의가 남아있던 지역이었다. 비록 『나의 투쟁』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주장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논리적으로 허술하지만, ‘유대인은 모두 적이다’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고, 병적인 증상으로 인한 집착은 학살과 수용소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라도 확신이 강할수록 전염병처럼 더욱 퍼지게 된다. ‘유대인=적, 세균’이라는 전제는 ‘적과 세균은 제거해야 한다’로 이어져 ‘유대인은 제거’라는 끔찍한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세균 같은 유대인을 제거한 자는 청결하고 건강한 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반유대주의의 삼단논법은 수용소에서도 곳곳이 퍼져나갔다.

 

벽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그린 이상한 벽화들이 있다. 예컨대 웃통을 벗은 착한 포로가 짧게 이발을 한 혈색 좋은 머리통을 비누로 열심히 씻는 모습과 전형적인 유대인의 코와 푸르스름한 피부를 지닌 나쁜 포로가 눈에 띄게 더러운 옷을 껴입고 머리에 빵모자를 쓴 채 마지못해 손가락 하나만 세면대의 물에 담그는 모습이다. 첫째 그림 밑에는 ‘So bist du rein’(이렇게 해서 너는 깨끗해진다), 둘째 그림 밑에는 ‘So gehst duein'(이렇게 해서 너는 뒈진다)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좀 더 밑에는 고딕체의 흐릿한 프랑스어로 ’La proprete, c'est la sante'(청결은 건강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55쪽)

 

유대인은 불결하고 씻지 않는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을 ‘세균’처럼 멸시하던 히틀러의 발상과 유사하다. 유대인이 아닌 자는 비누칠을 할 수 있고, 깨끗한 물로 세척할 수 있다. 그러나 옷, 신발, 이름마저도 빼앗겨버리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 유대인은 씻을 수가 없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세면실이 아닌 가스실이다.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독일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나 빨치산 활동에도 제약을 준다.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치열한 삶을 그린 『지금이 아니면 언제?』에 유대인을 싫어하는 빨치산 부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유대인 멘델은 사랑하는 부인이 독일군에 처형당한 사실에 유대인으로서 독일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 율법에서는 살인을 금지하는데 멘델은 아내의 복수를, 그리고 유대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독일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기로 한 것이다. 오랜 여정 끝에 게달레 부대를 만나 무장활동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에 괴로워한다.

 

 

멘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피오트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헌데... 그러니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대체 뭔데 그렇게 뜸 들여?”
“정말 예수를 고자질한 게 유태인들이 맞나요?”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중에서, 149쪽)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마치 ‘한 지붕 두 가족’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다름’보다 ‘같음’을 강조하며 양자 사이의 화해를 꾀하는 움직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서로 화해하고 상생하기 위한 길은 순탄치 않다. 여전히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레비가 경고한 것처럼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불쑥 나타나 유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미국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가 유대인 마을에 총기를 난사하고, 그리스 국적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 유대인 진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의사의 집에 수색하는 과정에 나치의 문양이 새겨진 칼도 발견되었다.

 

아우슈비츠가 무너지고 사라졌어도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레비는 화학자이면서도 글쓰기를 통해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 만들어 낸 비극을 증언하고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가 경고했던 ‘불길한 경종’을 다시 한 번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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