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언은 국어사전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실수로 잘못 말함, 또는 그 말”이요, 영어사전엔 “부적절한 말(an impropriety in speech) 혹은 혀의 미끌어짐(a slip of the tongue)”으로 풀이되어 있다. 정언(正言)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바른말을 함, 또는 그 말”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언보다는 실언을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게 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깜짝 놀란다. 그만큼 바른말하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실은 나 역시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실언을 해서 곤혹을 치른 적이 꽤 있다.

 

바른말을 하려면 우선 양심이 정의롭게 서야 하고 그래야만 올바른 행동으로 귀결될 수 있다. ‘정언정행’이란 정(正)으로 ‘언행일치’이어야만 명분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길로의 소통이 가능한 법이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시원한 정직이다. 그것이 정도(正道)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놓고 볼 때 실언을 통한 자기 과오를 은근히 면하려고 한다. 영어로 ‘혀의 미끌어짐’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혓바늘이 돋아서, 혀에 상처가 나서’ 등으로 핑계를 대면서 ‘말이 헛 나왔다, 미안하다’ 하면 실수에 따른 자신의 귀책사유치고는 빠져나갈 이유가 많다.

 

옛 선인들은 말을 함에 신중하게 말하고, 간략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행실에 맞게 말을 해 언행일치가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자신의 행실은 엉망이면서 말만 뻔지르르하게 잘하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놓는 것을 못난 사람의 전형으로 보았다.

 

최근엔 실언을 넘어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착잡하기 그지없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개탄스러운 일은 몰지각한 사람들과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일부가 깊은 생각 없이, 아니 현상에 대한 부정적 해석으로만 무장하여 실수 차원을 넘어 망동과 망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사고 초기에 한 망동꾼이 “해경이 민간 잠수부를 막았다”는 허위 사실 유포로 놀라게 한 것서부터 어느 청년의 ‘국민 정서 미개’ 발언이 또한 그러하다. 심지어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발언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는 경솔한 행동을 저질렀다. 결국 문제의 교수는 문제의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고,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교수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문제의 글을 볼 수 없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발언 외에도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너무 비정상적인 글들이 많았다. 특히 가관인 것은 교수의 글에 대한 ‘페친’(페이스북에서 친구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댓글 반응이다. 문제의 글이 페이스북에 게재되었을 때 유가족을 비하하는 발언에 동조하는 내용의 댓글이 있을뿐더러 교수의 사과문에도 여전히 그의 발언을 옹호하는 페친이 있었다.

 

 

 

 

 

 

 

실언을 한 사람은 사과 한 마디 하면 책임을 질 수도 있지만, 그 실언의 내용에 동조하거나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지적을 하지 않은 주변 사람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가 높은 상대방일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괜히 상대방의 행동에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한순간에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친밀한 진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잘못을 알려주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진정한 예의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논어』술이(述而)편에 노나라 임금에 대한 공자의 태도를 지적하는 무마기의 일화가 있다.

 

 

진나라의 사패(법을 관장하는 벼슬)가 물었다.

 

“(노나라 임금) 소공은 예를 아는 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아는 자입니다.”

 

공자께서 물러나시자 (사패가) 무마기(공자보다 서른 살 연하의 제자)에게 예를 표하며 들어오게 하고는 말했다.

 

“나는 군자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을 가릅니까? 소공은 오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같은 성이기 때문에 그녀를 오맹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

 

무마기가 그 말을 알려주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운이 있구나. 만약 허물이 있어도 남이 그러한 점을 반드시 알려준다.”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김원중 역, 145~146쪽)

 

 

오나라는 주왕조의 희성(姬姓) 중의 한 사람인 태백(泰伯)이 세운 나라로, 노나라와 함께 같은 희성의 나라였다. 진나라 사패가 공자를 비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공이 같은 성의 오나라 여인과 결혼한 사실은 비난받을만한 일이지만 공자는 소공의 잘못은 말하지 않으면서 소공 편을 든다는 것이다. 후에 진사패가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듣고,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오히려 남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다행이라 말하고 있다. 내나라 임금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눈은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남의 눈에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는 교훈의 말이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누구나 남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내려와 보니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었고 한사람은 깨끗했다. 과연 누가 얼굴을 씻었을까? 답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보고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었을 거라 여기고 씻었다.

 

하지만 검댕이 묻은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깨끗 하자 자기 얼굴도 검댕이 묻지 않았을 거라 여기고 얼굴을 씻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남의 얼굴에 묻은 검댕은 잘 보이지만 자기 얼굴에 묻은 검댕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자기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나 남의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야박한 속성을 지녔다. 시체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과 같다.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도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와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용이 상대방의 허물을 용인하고 치부를 숨길 정도로 관대하게 대한다면 옳은 대인관계라고 할 수 없다.

 

상대방의 실언에 관대하고 묵인하는 잘못 또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 혹은 유명인사의 실언에 지적하고 발끈한다면  자기 편 사람만 편드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가깝다. 공자는 그런 태도를 경계했다. 친하든 안 친하든 상대방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으면 얼굴을 씻을 수 있도록 알려주거나 서로 닦아주면 좋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엄격하게 허물을 꾸짖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발언 때문에 곤혹을 치른 문제의 교수는 자신의 사과문에 달린 페친의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수가 깊이 반성하면 좋겠지만, 친구의 허물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는 페친의 행동 때문에 괜한 자기위안을 할까봐 걱정된다. 그 교수는 자신을 지지하는 페친은 많겠지만, 그 중에 교수의 단점을 헤아리고 고쳐줄 수 있는 훌륭한 벗은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공자의 표현처럼 교수는 관계 운이 없다고 해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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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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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오래된 이 논쟁과 관련,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달걀 쪽 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 때문이다.

 

닭은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임기를 다하면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명의 숨을 이어온 알 속의 DNA야말로 진정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닭이라는 생명에게는 말이다. 닭은 알이 더 많은 닭을 낳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다.

 

달걀 속의 DNA는 물론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의 DNA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어느 성공적인 한 복제자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DNA은 오로지 자기의 분신을 만드는 일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 불렀다.

 

이제 ‘이기적 유전자’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유전자가 어떻게 이타적 인간을 만들어내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도킨스는 유전자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동종의 유전자가 번식할 수 있도록 한 개체가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돕는 혈연선택 가설을 주장하지만, 나와 전혀 혈연관계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이나 친절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 매트 리들리는 인간이 과연 이기적 존재인가, 이타적 존재인가라는 해묵은 논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타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저술한 『상호부조 : 진화의 한 요소』』에 대한 언급으로 책을 시작한다. 귀족계급 출신이자 혁명가였던 크로포트킨은 삶이 피투성이의 난투 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 당대의 홉스나 헉슬리와는 달리, 삶의 특징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결정적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책에서 그 사례를 들고 있다. 187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었던 크로포트킨은 동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옥에 성공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감옥으로부터 그를 탈출시킨 것은 바로 ‘상호부조’였고, 이것은 그 자신이 혁명가로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한 ‘신뢰’의 산물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이기성은 동물성의 유산이며 도덕성은 문명의 유산’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협동은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동물적 전통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부여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절반은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회의 뿌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처럼 이타주의적 본능이 어떻게 삭막한 경쟁과 도태의 이기적 세계에서 살아남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로 똘똘 뭉친 무리는 다른 무리들과 싸우거나 먹이를 찾는 데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단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신을 선호하는 이기주의자들과 이타주의자들이 경쟁할 때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기주의자들이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도 쓰이고 있는 게임이론은 배신과 협력을 하는 경쟁자들 간의 갈등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이론인데, 이타주의가 전투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이기는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한 번만 볼 것 같은 사이라면 이기적인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인간의 두뇌는 게임이론이 보여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한 회로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잘 웃고 호의를 베풀며 대화를 하는 습성이 있다. 함께 술자리를 같이하며 뭉치자고 외치는 이상한 습관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적대적인 배신행위에도 민감하다. 회사에서도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관례나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잘리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리들리는 네가 주면 나도 준다는 식의 이 같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은 관계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또한 경쟁적이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두 개체의 만남이 일회적이고 우연성이 높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마주친 녀석한테 뭘 줘 봤자 언제 그것을 되돌려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의 주장과 비슷한 반복-호혜성 가설은 반복되지 않는 상황, 다시는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 보이는 호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들을 먼저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승무원 故 박지영 씨가 그렇다. 헌혈도 내 피가 누구에게 수혈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덕망 있는 이들을 칭송하고 희생과 협동을 사회 제일의 덕목으로 존중하지만 우리 사회가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박지영 씨 같은 이들보다는 남의 불행을 나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동방예의지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철저하게 ‘동방무례지국’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변화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전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비록 한 몸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제가끔 다른 족보를 가진 유전자들이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화장품 회사 긴자마루칸의 회장이자 유명 저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먼저 자기 앞가림을 해야 남을 도울 방법이 떠오른다. 인간의 뇌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DNA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DNA안에 있어도 제각기 자기만의 복제를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흔히 유전자를 국회의원에 비유한다. 자신의 지역구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면 나라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유전자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 손을 잡을 줄 안다. 즉 개체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이기적 유전자가 일시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생명의 모습은 언뜻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약간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면 내 스스로가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리곤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겸허한 자세를 갖는다면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우리에게 사회를 선물한 미덕이다. 이타적 유전자가 나타난 것도 결국 종족 보전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자신은 전혀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이기적 돌연변이체가 나타나지 않아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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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민음사입니다.

민음사 신간 <스토리텔링 애니멀>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수만 년 전 원시인에서 현대의 영화 관람객까지,

인간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스토리텔링은 생존의 기술이다
이야기는 인류 진화의 핵심 요소이자
성공적인 미래의 필수 조건이다

 

인간을 웃기고 울리는 스토리텔링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학적 질문에 과학으로 답하다

 
과학적 인문학 운동의 선두 주자인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진화 생물학, 심리학, 신경 과학의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능을 밝힙니다.

 

 

김탁환 (소설가) 

: 유쾌하다. 맑다. 위험하고 짜릿하다. 조너선 갓셜은 이야기판의 인파이터이다. 응달에서 양달까지, 현실에서 꿈까지, 지옥에서 천당까지, 영웅에서 독재자까지 상대를 바꿔 가며 거침없이 맞붙는다. 시각 청각 공감각 가리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나아간다. 카운터펀치에 쓰러지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 하나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고른다. 돈과 실용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야기족의 승리를 확신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신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 그 용기가 놀랍고 그 사랑이 벅차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통섭』의 저자, 퓰리처상 수상자) 

: 아주 훌륭한 책이다.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를 사로잡으며, 이 이야기들을 한데 엮어 스토리텔링이 어째서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인가를 설명해 낸다.

 

 

▶ 『스토리텔링 애니멀』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와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5월 12일(월)~2014년 05월 14일(수) (3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넷, 발표일은 2014년 05월 15일 (목) 오후에 공개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5.16(금)~05.25(일) 10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스토리텔링 애니멀』서평 발표 페이지에 개인블로그/예스24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 서평단 지원자가 모집 인원에 미달할 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일부 인원만 선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작성하지 않을 시에 다음 서평 모집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민음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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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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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은 아름답다. 그녀의 평온하면서도 기품 있는 표정을 보노라면 진정한 미모는 선명한 이목구비나 날씬한 목이 아니라 얼굴 뒤에 숨은 열정과 단단한 내면, 세상을 바라보는 애정과 연민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서전 『희망의 이유』에서 본 그녀의 어린 시절의 한 토막에서 이 여성의 ‘오늘’이 어떻게 있게 됐는지를 볼 수 있다. 그녀가 만 두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 어린 소녀는 가족들과 바닷가에 갔다가 달팽이들을 물통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달팽이는 바다를 떠나면 죽는다고 얘기했을 때 제인은 발작할 지경이 되었고 그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은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제인을 도와 달팽이들을 바다로 바삐 돌려보내야 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과의 교감이 뛰어났던 구달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는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를 따라 세렝게티 초원으로 가서 초기 인류의 화석 발굴에 참가했고 인간의 과거 모습을 추적하다가 침팬지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연구를 위해 탄자니아 곰베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는 침팬지를 관찰하면서 인간과의 유사성에 놀라워한다. 도구를 사용하여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는 ‘도구적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위협하는 보고였다. 또한 침팬지도 의사소통을 하고, 원한과 배려의 감정을 나누며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는다는 점은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구달의 보고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동종 집단의 갓 태어난 새끼를 잡아먹는 암컷 침팬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배신자 집단과 잔인하게 전투를 벌이는 침팬지들의 모습은 인간의 유전자 안에 이기적 폭력성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달은 인간의 문명을 걱정한다. 개별적 경험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집합 문화를 이루고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바로 ‘문화종분화’이다. 문화종분화가 극단화되면 민족, 종교, 이념, 성별 등에 따른 배타적 패거리주의가 발생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구달은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성은 극복이 불가능한 것일까. 구달에 의하면 사랑도 동물적 본성이다. 그녀는 40년간의 영장류인 침팬지 연구와 보호활동을 통해 인간을 보다 풍부하게 알게 됐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됐다. 네덜란드의 한 동물원에 살고 있는 암컷 침팬지는 두 마리의 수컷 침팬지가 싸운 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을 때마다, 둘 사이에 끼어들어 ‘털 고르기’라는 놀라운 솜씨로 화해를 주선한다. 침팬지는 부모 자식뿐 아니라 형제자매 간, 그리고 같은 처지의 고아들끼리 극진한 동정심을 보인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남을 구조하는 이타적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또 어른 수컷 침팬지가 물에 빠진 동료의 새끼를 구하려다 익사했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인간이 침팬지보다 못할까. 침팬지는 동료 침팬지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 있을지언정,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을 의식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정의를 지키고, 이웃을 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구달은 인간이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라고 말한다. 침팬지도 친구를 돕다가 죽을 수 있지만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인간은 고문을 알면서도 저항운동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낯선 타인을 위해 철도에 뛰어든다. 악과 사랑의 두 가지 방향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 인간만의 독특한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그녀는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힘’을 강조한다. 선한 영혼을 따라 과학의 이름으로 헤쳐 놓은 지구를 생명 가득한 공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정신, 즉 ‘희망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공존할 수 있고, 우리를 품은 환경을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침팬지 연구가로서 동물보호와 환경보호에 나섰다는 그녀의 프로필만을 봤을 때, 소박한 자연보호 의식을 가진 서양의 여성과학자였다.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제인 구달은 세상과 유리되어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환경파괴로 인해 그녀의 친구들인 침팬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봤으며, 곰베 지역 주변의 분쟁으로 인해 연구생들이 납치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JGI)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침팬지와 야생동물의 현장 연구 및 보호사업을 펼쳤다. 침팬지 등 포획된 동물의 보호에도 나섰다.

 

그녀에게서 ‘영혼을 담은 과학’은 곧 실천임을 배운다. 우리가 어머니 지구 안에서 어린아이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너와 나의 구체적 행동에 그 결과가 달려 있다.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인 구달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철학과 평화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하는 종교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침팬지를 제3자의 시선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직접 감정을 이입해서 이해하고 대화할 존재로 바라본다. 젊은 나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침팬지 연구에 뛰어들어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는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 이상으로 그녀에게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희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그녀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침팬지 탐구는 결국 인간탐구였다. 침팬지도 우리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분노를 느끼는데도 그저 이용과 도구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침팬지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식탁의 별미로 마구잡이로 사냥되고 인간 병의 백신을 위한 실험재료로 사용된다. 인류의 환경파괴와 전쟁, 이기와 탐욕을 우려한다.

 

“인간이 품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합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기쁨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 (278쪽)

 

하지만 이러한 잘못을 극복해낼 힘 또한 인간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조금씩이라도 노력하는 길 밖에 없으며, 인간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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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은 신성한 공간이다. 거기엔 가장 강력한 정화의 기능을 가진 물과 불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장 깨끗한 것, 즉 음식을 만들어 낸다. 그 음식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또한 그 아궁이의 열기는 집을 덥혀 살린다. 식구들과 집을 살리는 공간, 그래서 부엌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키우고 낳는 공간이다. 자고로 부엌의 신이자 불과 물의 신인 조왕신을 떠받드는 풍습이 생겨난 것도 부엌이 가지는 그런 현상학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김소진의 <부엌>에서 주인공 '나'는 부엌에서 태어난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는 아이를 방에서 낳으면 안 된다는, 동네 할머니들의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설적 설정은 절묘한 데가 있다. 물과 불로 정화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부엌이란 공간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부엌은 통과제의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하나의 생명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제의적 성격은 부엌의 신성성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부엌은 단순하게 주인공이 태어나는 공간으로만 역할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학생이 된 '나'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부엌에 딸린 다락방의 옹이 구멍을 통해 나는 부엌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다. 거기에는 목욕하는 누나의 부끄러운 나신이 내려다보이고, 늘상 마누라를 세끼 밥 먹듯 두들겨 패는 털보와 언제나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는 마누라 필례 사이의, 그 원수 사이처럼 보이는 부부의,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이고도 질펀한 정사가 펼쳐진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식칼로 오리의 목을 쳐서 피를 받는 장면이 의식처럼 행해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그러한 광경은 아릿하고 숨 막히고 사위스럽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그 비릿한 어둠의 냄새, 비밀한 아름다움, 불가사의한 열정, 일상적인 폭력성을 접하면서 '나'는 혼란스럽고 불쾌하다. 그래서 '나'는 어둑어둑한 부엌방에서 모든 식욕을 잃은 채 더 오래 신열을 앓는다. '나'는 차라리 온몸에 피어나는 열꽃 속에서 성장을 멈추고 싶어 한다. '언제까지나 다락방의 아이이자 부엌의 아이로 남고 싶어'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첫눈처럼 다가온다. 어느 첫눈이 오는 날 '나'는 그 신열을 털고 다락방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감각들이 일거에 되살아나는 느낌' 때문이다. '나'는 맹렬한 식욕을 느끼며 다락방을 내려와 안방으로 향한다. 통과제의의 고통을 이기고 마침내 어른의 세계로 입성한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부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부엌의 풍경 중에는 우리를 어른의 세계로 훌쩍 데려갔던, 몹시도 강렬하여 낙인처럼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매일 부엌방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다락방을 내려와 어제와는 조금 더 어른스런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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