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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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오래된 이 논쟁과 관련,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달걀 쪽 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 때문이다.

 

닭은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임기를 다하면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명의 숨을 이어온 알 속의 DNA야말로 진정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닭이라는 생명에게는 말이다. 닭은 알이 더 많은 닭을 낳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다.

 

달걀 속의 DNA는 물론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의 DNA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어느 성공적인 한 복제자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DNA은 오로지 자기의 분신을 만드는 일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 불렀다.

 

이제 ‘이기적 유전자’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유전자가 어떻게 이타적 인간을 만들어내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도킨스는 유전자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동종의 유전자가 번식할 수 있도록 한 개체가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돕는 혈연선택 가설을 주장하지만, 나와 전혀 혈연관계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이나 친절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 매트 리들리는 인간이 과연 이기적 존재인가, 이타적 존재인가라는 해묵은 논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타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저술한 『상호부조 : 진화의 한 요소』』에 대한 언급으로 책을 시작한다. 귀족계급 출신이자 혁명가였던 크로포트킨은 삶이 피투성이의 난투 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 당대의 홉스나 헉슬리와는 달리, 삶의 특징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결정적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책에서 그 사례를 들고 있다. 187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었던 크로포트킨은 동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옥에 성공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감옥으로부터 그를 탈출시킨 것은 바로 ‘상호부조’였고, 이것은 그 자신이 혁명가로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한 ‘신뢰’의 산물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이기성은 동물성의 유산이며 도덕성은 문명의 유산’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협동은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동물적 전통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부여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절반은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회의 뿌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처럼 이타주의적 본능이 어떻게 삭막한 경쟁과 도태의 이기적 세계에서 살아남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로 똘똘 뭉친 무리는 다른 무리들과 싸우거나 먹이를 찾는 데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단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신을 선호하는 이기주의자들과 이타주의자들이 경쟁할 때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기주의자들이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도 쓰이고 있는 게임이론은 배신과 협력을 하는 경쟁자들 간의 갈등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이론인데, 이타주의가 전투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이기는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한 번만 볼 것 같은 사이라면 이기적인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인간의 두뇌는 게임이론이 보여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한 회로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잘 웃고 호의를 베풀며 대화를 하는 습성이 있다. 함께 술자리를 같이하며 뭉치자고 외치는 이상한 습관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적대적인 배신행위에도 민감하다. 회사에서도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관례나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잘리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리들리는 네가 주면 나도 준다는 식의 이 같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은 관계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또한 경쟁적이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두 개체의 만남이 일회적이고 우연성이 높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마주친 녀석한테 뭘 줘 봤자 언제 그것을 되돌려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의 주장과 비슷한 반복-호혜성 가설은 반복되지 않는 상황, 다시는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 보이는 호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들을 먼저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승무원 故 박지영 씨가 그렇다. 헌혈도 내 피가 누구에게 수혈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덕망 있는 이들을 칭송하고 희생과 협동을 사회 제일의 덕목으로 존중하지만 우리 사회가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박지영 씨 같은 이들보다는 남의 불행을 나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동방예의지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철저하게 ‘동방무례지국’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변화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전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비록 한 몸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제가끔 다른 족보를 가진 유전자들이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화장품 회사 긴자마루칸의 회장이자 유명 저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먼저 자기 앞가림을 해야 남을 도울 방법이 떠오른다. 인간의 뇌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DNA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DNA안에 있어도 제각기 자기만의 복제를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흔히 유전자를 국회의원에 비유한다. 자신의 지역구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면 나라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유전자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 손을 잡을 줄 안다. 즉 개체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이기적 유전자가 일시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생명의 모습은 언뜻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약간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면 내 스스로가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리곤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겸허한 자세를 갖는다면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우리에게 사회를 선물한 미덕이다. 이타적 유전자가 나타난 것도 결국 종족 보전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자신은 전혀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이기적 돌연변이체가 나타나지 않아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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