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은 신성한 공간이다. 거기엔 가장 강력한 정화의 기능을 가진 물과 불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장 깨끗한 것, 즉 음식을 만들어 낸다. 그 음식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또한 그 아궁이의 열기는 집을 덥혀 살린다. 식구들과 집을 살리는 공간, 그래서 부엌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키우고 낳는 공간이다. 자고로 부엌의 신이자 불과 물의 신인 조왕신을 떠받드는 풍습이 생겨난 것도 부엌이 가지는 그런 현상학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김소진의 <부엌>에서 주인공 '나'는 부엌에서 태어난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는 아이를 방에서 낳으면 안 된다는, 동네 할머니들의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설적 설정은 절묘한 데가 있다. 물과 불로 정화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부엌이란 공간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부엌은 통과제의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하나의 생명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제의적 성격은 부엌의 신성성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부엌은 단순하게 주인공이 태어나는 공간으로만 역할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학생이 된 '나'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부엌에 딸린 다락방의 옹이 구멍을 통해 나는 부엌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다. 거기에는 목욕하는 누나의 부끄러운 나신이 내려다보이고, 늘상 마누라를 세끼 밥 먹듯 두들겨 패는 털보와 언제나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는 마누라 필례 사이의, 그 원수 사이처럼 보이는 부부의,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이고도 질펀한 정사가 펼쳐진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식칼로 오리의 목을 쳐서 피를 받는 장면이 의식처럼 행해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그러한 광경은 아릿하고 숨 막히고 사위스럽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그 비릿한 어둠의 냄새, 비밀한 아름다움, 불가사의한 열정, 일상적인 폭력성을 접하면서 '나'는 혼란스럽고 불쾌하다. 그래서 '나'는 어둑어둑한 부엌방에서 모든 식욕을 잃은 채 더 오래 신열을 앓는다. '나'는 차라리 온몸에 피어나는 열꽃 속에서 성장을 멈추고 싶어 한다. '언제까지나 다락방의 아이이자 부엌의 아이로 남고 싶어'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첫눈처럼 다가온다. 어느 첫눈이 오는 날 '나'는 그 신열을 털고 다락방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감각들이 일거에 되살아나는 느낌' 때문이다. '나'는 맹렬한 식욕을 느끼며 다락방을 내려와 안방으로 향한다. 통과제의의 고통을 이기고 마침내 어른의 세계로 입성한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부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부엌의 풍경 중에는 우리를 어른의 세계로 훌쩍 데려갔던, 몹시도 강렬하여 낙인처럼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매일 부엌방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다락방을 내려와 어제와는 조금 더 어른스런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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