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반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돌려보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재미있는 만화책을 가져오면 너나 할 것이 서로 보고 싶다고 조른다. 가장 먼저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뇌물(?)로 과자를 슬쩍 건넨다. 심지어 만화책 한 권 때문에 친구 간의 우정이 파탄 날 때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 자신이 먼저 만화책을 봐야 한다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만화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괴담,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특히 ‘공포특급’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공포를 주제로 한 책이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이런 책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서운 이야기 한두 가지 모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이때 ‘빨간 마스크’ 괴담이 유행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옛날에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가 공동무덤이었다는 썰부터 시작해서 놀이터에 새벽이 되면 죽은 아이의 귀신이 떠돌아다닌다는 썰까지 근거 없는 괴담을 벌벌 떨면서 들었다.

 

 

 

 

 

 

이틀 전, 헌책방에서 추억의 책을 발견했다. 1992년에 나온 『세계의 요괴도감』(편집부 엮음, 사과나무)이라는 책이다. 이 책도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귀신 이야기에 귀신이 그려진 그림까지 있는 책이었으니 누구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친구가 가져온 『세계의 요괴도감』을 읽었던 기억은 나지만, 끝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작 십 쪽 읽었을 뿐인데 읽는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자꾸 빨리 읽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떤 녀석이 수업시간에 이 책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 녀석 때문에 책은 압수되었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 녀석을 원망했다. 그 친구 다음에 읽는 친구는 실망이 클 수밖에. 이 책을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면 나름 긴장감이 높아진다. 그만큼 귀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쉬는 시간에 읽으면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요괴도감』은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종이를 가로로 넘기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귀신과 괴물이 그려진 삽화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의 귀신과 괴물을 소개하고 있다. 삽화가 엉성하지만, 흑백의 조화가 나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처음 몇 장 정도는 천연색 삽화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흑백 삽화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삽화에 흰색보다는 검은색을 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삽화가 무섭게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봐서 그런지 눈을 침침하게 만드는 삽화 인쇄가 불편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책에 대한 호기심과 무서운 느낌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친숙한 괴물도 있기 때문이다.

 

 

 

 

 

 

 

헨리 퓌슬리  「악몽」  1781년

 

잠자는 여자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악마 인큐버스(Incubus)를 그린 삽화다. 책은 ‘잉크부스’라고 표기했다. 영문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원래 인큐버스라는 이름에는 ‘위에 올라타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큐버스를 잠자는 여자의 가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요괴도감』의 삽화가는 잉쿠버스, 아니 인큐버스는 눈 뜬 여자를 공격하는 악마로 그렸다. 여자의 뱃살을 살짝 꼬집는 인큐버스의 자세가 재미있다.

 

 

 

 

 

 

 

 

 

 

 

 

 

 

 

 

『요괴도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각종 요괴 이야기를 모은 책을 참고해서 엮은 책이다. 특히 미츠키 시게루의 <세계 요괴 사전>(1985년, 일본 동경당)을 많이 참고했다. 미츠키 시게루는 요괴만화를 그린 거장으로 평가받는 만화가이다. 예전에 투니버스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요괴인간 타요마’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원제는 ‘게게게의 기타로’) 요괴 전문가라고 불릴 정도로 요괴도감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요괴도감』은 원본을 발췌한 내용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고향에 가면 만화에 나오는 요괴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미츠키 시게루 로드’와 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예이츠가 쓴 <켈트 환상 이야기 모음>이라는 책도 참고했는데 『켈트의 여명』(펭귄클래식코리아, 2005년)으로 번역되었다. 예이츠는 192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다. 그도 켈트족 전설과 신화와 환상적인 민담을 복원할 정도로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예이츠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주석집을 내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신비적 경향을 주제로 시와 그림을 남긴 낭만주의의 선구자다.

 

 

 

 

 

 

이 책의 인쇄 정보를 보면 펴낸이가 '김충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충원 미술교실’을 세울 정도로 드로잉의 재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한 그 김충원 교수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 교수는 출판사 ‘사과나무’를 운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는 아동도서도 아이들이 즐겨 읽었다. 특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시리즈와 ‘IQ 게임 만화퀴즈’ 시리즈를 좋아했다. 이 책들을 펴낸 진선출판사는 현재까지도 김 교수의 드로잉북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나 만화를 즐겨 읽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책들이 지금도 나오더라도 잘 안 읽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무서운 이야기나 괴담을 접할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냥 글자가 적힌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때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공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자꾸 그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인간에게 주는 위력이다. 공포 이야기 모음집은 괴기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런데 요즘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요괴들의 세상이 아닌 요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흉측하고도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요괴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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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달까지 - 경이의 여행,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5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을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61년 4월 12일 오전 6시 7분으로 돌려본다. 우리는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 발사장면을 만나게 된다. 가가린이 지구 한 바퀴를 돈 다음 무사히 착륙했을 때 세계인은 경악했다.

 

과학 발전에 있어 상상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주 개발에서도 많은 과학자들에게 상상의 날개를 펴게 했던 공상 과학 소설이 있다. 로켓이 추진되는 원리를 이론화한 러시아의 치올코프스키는 이 공상 과학 소설’을 쓴 작가의 존재를 높게 평가했다. “이 발상의 첫 씨앗을 뿌린 것은 위대한 판타지 작가 쥘 베른이었다. 베른이야말로 내 생각의 인도자였다.” 이 소설로 인해 많은 이들이 우주여행을 꿈꾸기 시작했고,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미국의 남북 전쟁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진 대포 제작자들이 ‘대포 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달까지 날아가는 포탄을 제작해 발사한다는 내용이다. 포탄이 우주를 날아다니는 이야기는 속편 격인 『달나라 모험』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대형 포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포탄이 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발사 위치와 날짜,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길이가 300 m나 되는 거대한 대포에 지름 3m, 높이 4m의 포탄이 제작된다. 이 무거운 포탄을 멀리 날려보내려면 화약 20만 kg이 필요하다. 베른은 포탄을 초속 12 km의 속도로 달을 향해 쏘아 올리면 발사한 지 4일 만에 달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포탄은 정확히 12월 1일 밤 10시 46분 40초에 발사된다. 만약에 날짜와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18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포탄의 이름은 콜럼비아드. 이곳에 탑승하게 되는 사람은 총 3명. 처음으로 달에 포탄을 쏘아 보내는 생각을 한 대포 클럽 회장 바비케인, 그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적극적으로 달나라 여행에 동참한 프랑스인 아르당 그리고 바비케인을 싫어하고 달나라 여행 계획마저 반대한 캡틴 니콜까지. 포탄이 만들어지는 과정 내내 캡틴 니콜은 바비케인의 계획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고 과장되었다고 비난한다. 자존심이 센 바비케인이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니콜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과 논쟁을 참지 못해 결투를 신청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르당은 두 사람의 결투를 막는다. 결투에서 바비케인이 사망한다면, 달나라 여행이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당은 극적으로 두 사람의 결투를 막는데 성공했고, 지독한 갈등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자신과 함께 달 여행을 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베른의 상상처럼 사람이 포탄에 실제로 탑승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발사되자마자 무서운 가속도 때문에 몸무게가 몇 천 t이나 돼 납작해져 사망하게 된다. 베른도 이 점을 걱정했는지 발사 충격을 물로 만든 쿠션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살아남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베른은 우주에서 희박한 산소 문제를 과학적 원리를 인용하면서 그럴듯하게 설명하지만, 이 문제 또한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지구에서 달까지 편안하고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도 지나친 과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열차는 충돌하지도 탈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승객들은 꿀벌이 날아가듯 일직선으로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테고, 피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0년 안에 지구인의 절반이 달을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192쪽)

 

 

그렇지만, 이 작품은 과학적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지구에서 달까지의 비행 속도와 시간, 포탄이 발사할 수 있는 조건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 베른의 공상 과학 소설이 그저 아동을 위한 흥미 위주의 작품으로 오해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비케인의 달나라 여행 아이디어는 과장되고 허술해 보일지 몰라도, 축약된 아동문고 버전이 아닌 완역본을 직접 읽어보면 베른의 치밀한 전개에 감탄한다. 그 당시에 나온 최신 천문학 지식을 동원하여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달나라 여행을 문장으로 실현한 것이다. 비록 상상력에 근거한 내용이라고 하지만, 훗날 우주 개발의 개척자들에게 우주여행의 꿈을 심어 준 위대한 발상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베른은 과학 지식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 이 작품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있다. 베른의 공상 과학 소설이 지금까지도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과학에 문외한인 독자도 읽게 만드는 쉬운 글쓰기에 있다. 지구의 자전 으로 인해 달의 앞면만 보는 현상을 식탁으로 비유를 해서 설명한 문장을 보면, 베른의 문장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쉽게 설명하다니.

 

“당신네 식당에 들어가서, 식탁의 중심을 계속 바라보면서 식탁을 한 바퀴 돌아라. 식탁을 다 돌았을 때는 당신 자신의 자전축을 중심으로 한 번 돌았을 것이다. 당신의 눈은 식당의 모든 점을 지나쳤을 테니까. 식당은 하늘이고, 식탁은 지구이고, 당신은 달이다!” (58쪽)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이 과학 진보의 힘을 우주로 펼치려는 야심찬 계획을 단순히 찬양하지 않는다. 베른은 나날이 발전되는 근대 문명을 예찬하면서도 화려하고 눈부신 진보의 불빛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한 어두운 그림자를 주시했다. 작품 곳곳에 과학문명 사회의 오점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바비케인이 자신의 달나라 여행 계획을 전 세계적인 계획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나라에 협력을 요구하는 장면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이제 종교에서 과학으로 넘어갔음을 암시한다.

 

또 베른은 진보의 법칙을 믿고 오만해진 인간을 풍자하기도 한다. 바비케인이 달나라 여행 계획을 공식 선포한 뒤에 사람들은 달을 ‘금발의 포이베’(달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리고 이미 달을 정복한 것처럼 열띤 분위기에 취한다.  

 

달이 제 소유라도 되는 듯이 편안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금발의 포이베(달의 여신)는 그 대담한 정복자들 손에 들어가 벌써 미국의 영토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겨우 포탄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상대가 위성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교섭을 시작하는 것은 좀 무례하지만, 문명국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36쪽)

 

지구의 위성인 달은 제국주의적 욕망이 투영되는 순간, 지구의 식민지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달을 향해 쏘는 포탄은 단순히 미지의 영역인 우주를 알아내기 위한 과학적인 목적이 아니다. 원래 포탄은 적을 무력화시켜 지배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였다. 지구 다음으로 또 하나의 영토가 될 수 있는 달을 지배하려는 문명국의 야욕으로도 볼 수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공상으로 여겨졌던 우주여행의 꿈을 무럭무럭 자라게 해준 희망의 씨앗이면서도, 우주에서도 세계질서 구축을 지향하기 위한 지배권을 뻗치려는 강대국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불행의 씨앗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희망의 씨앗 속에 있는 영양분, 베른의 상상력 덕분에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엄청난 수준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도전과 모험의 우주 탐사는 과학 연구 목적으로만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우주를 지배해야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인류가 우주의 비밀을 알기 시작하는 ‘우주의 시대’를 넘어서  ‘우주 개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강대국이 우주 탐사에 막대한 비용과 자원을 투자하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우주 탐사 및 개발 사업이 한층 더 발전된다면 우주에 쏘아 올리는 인공위성이나 로켓이 경쟁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탄이 될까봐 쓸데없는 기우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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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조지 웰스의 단편선집(『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2014년)에 ‘아이피오르니스 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화석 조류 아이피오르니스를 만난 남자의 경험담이다. 상상 속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아이피오르니스를 웰스는 상상력으로 복원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이피오르니스가 살았던 섬에 거대한 화석 알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알에 아이피오르니스 새끼가 부화한다. 남자는 새끼를 정성스럽게 키운다. 새끼는 남자를 어미라고 생각하면서 졸졸 따라다닌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끼는 빨리 성장했다. 이제 남자의 몸집보다 클 정도로 자랐다. 그러나 다 자란 아이피오르니스는 점점 야생의 본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과 발톱으로 남자를 공격한다. 남자는 아이피오르니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사투 끝에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이피오르니스의 공격에 남자는 흉터가 남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아이피오르니스(왼쪽), 화석이 된 아이피오르니스의 알(오른쪽)

 

 

아이피오르니스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했던 거대한 새이다. 학명은 Aepyornis maximus. 키는 약 3m 정도에, 무게는 450kg 이상 나갔다고 한다. 몸집이 큰 편이었는데 날개 뼈가 작고 퇴화하여 하늘을 날지 못했다. 생김새와 특성이 타조와 비슷하다. 영어권 나라에서는 아이피오르니스를 ‘Elephant Bird’라고 부르기도 했다. 웰스의 소설에서는 아이피오르니스는 인간을 공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괴물 새’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몸집이 큰 것만 빼면 적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쉬운 존재였다. 특히 아이피오르니스의 알은 지름이 30cm 이상이나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의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아이피오르니스가 매우 겁이 많은 편이라서 어두운 습지에 주로 살았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절멸되었는지 알 수 없다. 멸종 시기를 대략 추정하면 19세기 중반으로 잡고 있다.

 

남자는 자신이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피오르니스를 ‘괴물’이라고 말한다. 새의 공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드바드의 로크 이야기까지 언급한다.

 

흉터 난 남자가 말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놈은 정말로 괴물이었으니까요. 신드바드의 로크 이야기는 아이피오르니스에 대한 전설 가운데 하나였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 뼈를 찾아낸 게 언제죠?” (웰스  ‘아이피오르니스 섬’ 중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81쪽)

 

 

로크는 『천일야화』(앙투안 갈랑 판, 열린책들 / 2010년)에 나오는 전설상의 새이다. 신드바드는 두 번째 여행에서 로크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신드바드는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물체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알을 품고 있는 로크였다. 신드바드는 터번으로 로크의 거대한 다리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로크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 함께 실려가 무인도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2권, 353~355쪽)

 

 

 

 

 

 

 

 

 

 

 

신드바드는 다섯 번째 여행에서 또다시 로크를 만난다. 신드바드는 로크의 알이 있는 무인도에 정박했다. 그는 이미 로크의 존재와 알을 본 적이 있어서 동료 선원들에게 로크의 알을 절대로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로크를 죽여 구워 먹는다. 마침 두 마리의 로크가 나타나 둥지를 침입한 선원들을 공격한다. 신드바드와 선원 일행은 배에 올라 로크의 섬을 탈출하게 되지만, 로크는 하늘 위에서 큰 바윗덩어리를 떨어뜨려 신드바드가 탄 배를 명중시켰다.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은 사망하고, 신드바드만 살아남는다.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2권, 391~393쪽)

 

신드바드 일행이 로크의 섬에 도착해서 새끼 로크를 잡아 먹는 장면은 웰스의 ‘아이피오르니스의 섬’ 줄거리 일부와 흡사하다. 이 작품의 남자도 아이피오르니스 섬에 정착하고 난 뒤에 부화되지 않은 알을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그러다가 마침 알에서 아이피오르니스 새끼가 깨어나 키우게 된다. 남자와 아이피오르니스의 첫 만남은 이렇다.   

 

로크는 신드바드의 이야기 이전인『천일야화』 1권에 처음 등장한다.

 

“이 로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흰색 새로, 그 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들판에 있는 코끼리를 들어 올려 산꼭대기에 잡아다 놓고 쪼아 먹을 정도라고 합니다.”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1권, 276쪽)

 

앙투안 갈랑은 주석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로크가 언급되어 있다고 적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상상동물 이야기』(까치, 1994년-절판)『동방 견문록』에서 묘사된 로크에 관한 내용을 인용했다.

 

 

 

 

 

 

 

 

 

마다가스카르 섬 주민들은 1년 중 특정 기간이 되면 남쪽에서 굉장히 몸집이 큰 새가 날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새의 이름이 로크라는 것이다. 새의 생김새는 독수리와 비슷한데 크기는 독수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로크는 대단히 힘이 좋기 때문에 발톱으로 코끼리를 낚아채서 하늘로 들어 올렸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서 잡아먹는다. 로크를 본 사람에 따르면 날개 길이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가 열여섯 걸음이나 된다고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로크 편, 140~141쪽)

 

폴로는 중국으로 간 황제의 사절들이 로크의 깃털을 가져온 적이 있다고 기록했다. 흥미롭게도 로크가 마다가스카르 섬에 사는 새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새가 바로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서식했던 아이피오르니스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아이피오르니스는 날 수가 없는 새이다. 이러한 오류는 『동방견문록』이 무용담 전문 작가였던 루스티첼로의 덧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과장에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폴로는 처음으로 마다가스카르를 유럽에 널리 알렸지만, 직접 그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원나라에서 귀국 도중 만난 아랍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썼다. 당시 아랍상인들은 이미 마다가스카르에 무역 기지를 설치면서 교역을 하고 있었다.

 

아이피오르니스는 17세기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아이피오르니스를 로크와 같은 전설의 새와 비슷한 동물로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이피오르니스 같은 거대한 몸집의 새를 본 적이 없어서 ‘괴물’로 오해하기 쉬웠다. 특히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인간을 공격하고, 코끼리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둔갑했다. 원래 아이피오르니스는 낯선 적을 몹시 두려워하고, 날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인간은 한때 그를 괴물로 여기면서 두려워했지만, 상상력이 주는 방어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피오르니스에게 인간이야말로 진짜 ‘괴물’이었다. 그리고 근대의 ‘괴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 힘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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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공식 - 우리의 관계, 미래, 사랑까지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세계
루크 도멜 지음, 노승영 옮김 / 반니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Scene #1  별 걸 다 시간 지키는 남자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시간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이야기다.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이른 시일 안에 세계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 모험은 세계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시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소설이다. 국제 표준시가 도입됨으로써 시간을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수량화 혁명』(심산, 2005년)의 저자 알프레드 W. 크로스비의 분석을 빌리자면 19세기 유럽은 수량화와 시각화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간다. 실재를 설명하는 세계관이 질적 모델에서 양적 모델로 바뀐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 실천과 인식을 셀 수 있는 수량으로 시각화한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자신의 삶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근대인의 모습이다.

 

그는 하인 파스파르투에게 정확성과 규칙성을 요구한다. 면도용 물은 무조건 섭씨 30도여야 한다. 29도의 물을 가져온 하인을 해고한 뒤에 후임자로 파스파르투를 결정했다. 포그의 일과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시간이 꼼꼼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파스파투르)는 자기 방 시계 위에 쪽지 한 장이 붙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일과표였다. 필리어스 포그 씨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침 8시부터 혁신 클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11시 반까지 하인이 해야 할 일이 조목조목 적혀 있다. 8시 23분에 차와 토스트, 9시 37분에 면도용 더운 물, 10시 20분 전에 머리 손질 등등. (『80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 김석희 역, 열림원)

 

이뿐만 아니다. 포그는 바지, 조끼, 재킷 그리고 구두에 일일이 번호를 매겨 출납부에 기록했다. 계절과 특정 상황에 따라 맞는 옷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어느 모임에 가면 무조건 1번 재킷, 13번 바지를 입고, 25번 구두를 신는 것이다.

 

 

 

 Scene #2  알고리즘이 당신의 쌍둥이를 만든다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의 편집자 게리 울프와 케빈 켈러‘숫자를 통한 자기 이해’를 강조하는 ‘자기 수량화(Quantified Self) 운동’을 주장했다. 자신의 삶을 수량화하여 숫자로 측정하는 것. 두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기 수량화 운동을 몸소 실천한 인물은 필리어스 포그였다. 그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동작까지 숫자로 측정하고 점검하는 최초의 ‘셀퍼’(Selfer)인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초의 셀퍼 포그가 사는 방식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다윈의 사촌 아우 프랜시스 골턴은 따분한 감정을 측정하려고 했다. 일명 꼼지락 측정법.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꼼지락거리는 행위 횟수로 따분한 정도를 수치로 표현했다. 자주 몸을 꼼지락거릴수록 따분함 지수는 높았다.

 

혹자는 모든 것을 수량화하려는 인류의 역사를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수량화된 방법에 익숙해졌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 살고 있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 시험을 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안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문제를 공부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문제의 해결 방법을 만들기 위해 수집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문제 해결에 적합한 모델과 절차를 얻게 되면, 컴퓨터 프로그램의 형태로 표현해 컴퓨터가 실행한다.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에게나 필요한 특별한 공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만물의 공식’이기도 하다.

 

내비게이션이 최단 경로를 찾는 것도 알고리즘의 힘이요 인터넷 검색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알고리즘 덕분이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소셜 네트워크에도 알고리즘의 원리가 작동되고 있다. 당신이 방금까지 구매를 망설이던 상품이 페이스북 광고란에 떠서 놀란 적이 있는가? 페이스북은 쿠키 분석을 통해 당신이 어느 사이트를 돌아다녔는지 모두 알고 있다. 또 페이스북은 복잡한 관계추적을 통해 당신의 첫사랑과 빚쟁이들에게 당신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있다.

 

이 정도에 놀라선 안 된다. 거대한 알고리즘 세계의 20%만 봤을 뿐이다. 이프아이다이(IfIDie)과 데스소셜(DeadSocial)이라는 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녹음된 페이스북 예약 메시지를 사후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서비스가 활성화된다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다 모인 뒤에 유언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리브스온(LivesOn)이라는 앱은 당신이 과거에 남긴 소셜 네트워크 게시물을 추려내어 분석한 뒤에 이와 비슷한 주제의 게시물을 대신 올려준다. 리브스온은 당신의 취향과 선호도, 심지어 문체까지 학습하는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브스온을 만든 개발자의 포부가 살짝 무섭게 느껴진다. “리브스온 서비스의 목표는 쌍둥이가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공식』 중에서, 118쪽) 알고리즘은 얼마든지 당신의 쌍둥이를 만들 수 있다. 

 

 

 

 Scene #3  우리가 알고리즘을 만드는가 아니면 알고리즘이 우리를 만드는가?

 

더 정확한 검색, 더 똑똑한 스마트폰과 사물 인터넷을 구현해 줄 새로운 알고리즘이 개발되고 있다. 똑똑한 알고리즘이 미래의 생활을 주도할 것이다. 이제는 인간 두뇌의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당신이 자는 사이에 새로운 정보기술, 아니 그 기술을 구현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알고리즘이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의 공격으로 무너진 영국 하원 의사당의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당시 총리였던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건물을 짓고, 그 뒤에 건물이 우리를 짓습니다.”(『만물의 공식』에서 인용, 59쪽) 알고리즘의 힘이 커진 지금, 우리는 알고리즘을 만들고, 그 뒤에 알고리즘이 우리를 만든다. 심지어 알고리즘은 당신의 배우자를 결정한다. 짝을 찾아주는 중매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은 ‘디지털 중매쟁이’다. 당신의 이상형이나 성격을 알고리즘이 분석하여 가장 잘 어울릴만한 짝을 소개한다. 이를 묘사한 2장의 제목이 재미있게도 ‘컴생연분’(컴퓨터+천생연분)이다.

 

알고리즘 덕분에 우리 삶은 편리해졌다.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은 알고리즘에 맡겨도 된다. 알고리즘이 한 번 오류가 나면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프로그램 알고리즘 오류로 종종 일어나는 대형 금융사고가 그렇다. 우리가 수학문제를 푸는데 공식 하나 잘못 쓰면 잘 풀리지 않는다거나 엉뚱한 답이 나오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알고리즘을 만드는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우리를 만드는지 인식해야 할 때다. 세상의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힘이 신기함을 넘어서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짜인 프로그램은 우리 삶을 통제한다. 구글의 ‘인간 분석팀’은 직원들의 행복을 수량화하는데 직원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 분석한다. 아마존의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제품 운반원은 포켓용 컴퓨터를 몸에 달고 일을 해야 한다. 이 포켓용 컴퓨터는 직원에게 제품 운반을 지시하기도 하며 직원의 실시간 움직임을 조사한다. 거대한 크기의 물류 창고에서 제품을 쉽게 옮기기 위한 최단 경로를 조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글과 아마존의 알고리즘 정책은 테일러리즘에 가깝다.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테일러리즘은 노동자를 기계처럼 인식하여 통제하는 문제점이 있다.

 

알고리즘은 정말 ‘만물의 공식’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심지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이런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힘을 눈으로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알고리즘이 우리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정보와 현실이 알고리즘에 의해 분류되어 검열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인간의 편견은 단지 두뇌의 장난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알고리즘이 악용된다면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 혹은 우리를 감시하는 ‘빅 브라더’가 될 수도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파스파르투는 집착에 가까운 ‘셀퍼’이자 주인인 포그의 일상을 엄청 좋아한다. 그런 삶이 무척 피곤한 일인지 모르는 채 말이다. 주인이 왜 그런 특이한 생활을 고수하는지 의심하지도 않는다. 이런 파스파르투의 태도는 인간의 삶을 대신해주는 만물의 공식 알고리즘에 지배된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리즘을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만물의 공식』의 저자 루크 도멜은 우리가 알고리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제안한다. 알고리즘이 만든 세상을 알아야 우리에게 부닥치는 상황들이 정당하고 윤리적인지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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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하우스의 유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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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동요 ‘섬집 아기’)

 

 

외딴 섬, 외톨이, 외딴 집 등 그냥 말만으로도 외롭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속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소설가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All the Lonely People)이라는 단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롭고 외롭다는 저 많은 사람.

 

우리는 소통과 사랑의 마음이 향하는 곳, 바로 ‘내 마음의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집에 안 들어가니?”라는 질문에 흔히 “집에 들어가도 집 같지가 않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앞의 집은 부동산으로 거래되는 건축물이지만, 뒤의 집은 추위, 더위,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 속에 살기 위해 지은 안식처다. 우리가 마음에 되찾아야 하는 '집'은 말하자면 'House가 아니라 'Home'이다. 소통과 사랑의 마음이 향하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가 모두 가야 할 '집'이다. 그곳에 가면 사람의 체온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주인을 잃어버린 집은 사람의 체온과 숨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흉가’로 변해버린다.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에 나오는 힐 하우스는 흉가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제는 옛 집주인이 남긴 삶의 흔적이 희미해질 정도로 한적하다. 심지어 힐 하우스가 위치한 힐즈데일 사람들도 그 집의 존재를 모른다. 아니면 힐 하우스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 탓에 애써 집의 위치를 모른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힐 하우스는 마을 사람들의 체온과 숨결마저 전달될 수 없을 정도로 저 먼 곳으로 떨어진 채 서 있는 저주 받은 집이 되었다.

 

힐 하우스의 심령 현상에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 몬터규 박사는 함께 관찰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해 초대한다. 몬터규 박사와 함께 힐 하우스에 머물게 될 사람은 세 명이다. 어머니의 병시중 때문에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엘리너 밴스, 엘리너와 달리 성격이 활발하면서도 격렬한 면이 있는 시어도라 그리고 힐 하우스를 상속받게 될 루크 샌더스.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사람이 힐 하우스에서 같이 생활한다. 몬터규 박사 일행은 낯설고 기이한 현상을 겪기 시작한다. 시어도라가 머무는 방에 온통 붉은 페인트가 뿌려져 있고, 한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잦아졌다. 수많은 방과 복잡하게 만들어진 구조 때문에 힐 하우스 내부는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집은 지켜보고 있어.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물론, 다 상상력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140쪽)

 

시간이 지날수록 공포의 강도는 더욱 거세지고, 성격이 예민한 엘리너는 몹시 두려워한다. 타인에게 의존적인 성향이 있는 엘리너는 시어도라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시어도라는 엘리너의 마음을 모른다. 오히려 의기소침한 엘리너를 은근히 무시하기도 한다. 엘리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힐 하우스의 초자연적 현상에 괴로워한다. 몬터규 박사의 부인이 힐 하우스 모임에 뒤늦게 합류한 이후부터 엘리너의 마음은 위축된다. 몬터규 박사의 부인은 남편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심령 현상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노력한다. 집 내부에 ‘도와줘요 엘리너 집으로 와요’라는 글씨가 발견될수록 사람들은 엘리너의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엘리너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시어도라가 루크를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질투하게 된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어둡고 음산한 힐 하우스의 분위기에 압도된 인물들의 심적 변화와 그 미묘한 갈등을 긴장감 있게 묘사했다. 불가사의한 고딕풍 분위기에 하드보일드 문체가 곁들어진 인물의 대화를 읽으면 독자가 그들과 함께 힐 하우스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흡인력이 있는 문체는 이야기 중반부가 잠깐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읽게 한다.

 

소설은 ‘The haunting’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나 영화화되었다. 1963년에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1999년에 얀 드봉 감독이 1963년 작품을 리메이크했는데 원작 영화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원작 소설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영화로 재탄생한 『힐 하우스의 유령』을 잊고,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으로 읽는다면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한 소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너는 작가 셜리 잭슨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엘리너처럼 잭슨도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남달랐던 잭슨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잭슨이 요조숙녀로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어머니의 기대는 잭슨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잭슨은 어머니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을 피하려고 공상과 상상에 자주 빠졌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배경 힐즈데일은 그녀가 정착했던 노스 베닝턴 마을을 암시한다. 힐즈데일 사람들은 외지인에 불친절하고, 힐 하우스에 관해 물어보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잭슨의 남편이 대학교수로 발령받아 노스 베닝턴이라는 마을에서 살게 된 잭슨은 그곳 주민들과 잦은 불화를 겪었다. 잭슨을 두고 마을에서는 ‘마녀’라는 악의적인 소문도 돌 정도였다. 잭슨은 마을 주민의 편견과 차별을 증오하면서 살았다. 마을 주민들과 융화되지 못한 그녀의 고립된 삶은 고딕 미스터리 작품을 탄생시켰고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힐 하우스의 유령』의 엘리너다. 엘리너는 시어도라가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불가사의한 글자가 발견된 사건 이후로 일행은 엘리너를 의심한다. 힐 하우스의 공포에 휘말려 혼란스러운 엘리너는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였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결말에 대해 호불호의 평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말까지 다 읽은 독자 중에는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그러나 그 결말은 누군가에게는 슬플 것이다. 혼자 지낸 사람은 안다. 엘리너가 힐 하우스에 가장 먼저 도착할 때부터 철저히 혼자였다는 사실을.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으로 엘리너의 힐 하우스 여행은 슬프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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