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반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돌려보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재미있는 만화책을 가져오면 너나 할 것이 서로 보고 싶다고 조른다. 가장 먼저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뇌물(?)로 과자를 슬쩍 건넨다. 심지어 만화책 한 권 때문에 친구 간의 우정이 파탄 날 때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 자신이 먼저 만화책을 봐야 한다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만화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괴담,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특히 ‘공포특급’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공포를 주제로 한 책이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이런 책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서운 이야기 한두 가지 모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이때 ‘빨간 마스크’ 괴담이 유행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옛날에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가 공동무덤이었다는 썰부터 시작해서 놀이터에 새벽이 되면 죽은 아이의 귀신이 떠돌아다닌다는 썰까지 근거 없는 괴담을 벌벌 떨면서 들었다.

 

 

 

 

 

 

이틀 전, 헌책방에서 추억의 책을 발견했다. 1992년에 나온 『세계의 요괴도감』(편집부 엮음, 사과나무)이라는 책이다. 이 책도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귀신 이야기에 귀신이 그려진 그림까지 있는 책이었으니 누구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친구가 가져온 『세계의 요괴도감』을 읽었던 기억은 나지만, 끝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작 십 쪽 읽었을 뿐인데 읽는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자꾸 빨리 읽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떤 녀석이 수업시간에 이 책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 녀석 때문에 책은 압수되었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 녀석을 원망했다. 그 친구 다음에 읽는 친구는 실망이 클 수밖에. 이 책을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면 나름 긴장감이 높아진다. 그만큼 귀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쉬는 시간에 읽으면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요괴도감』은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종이를 가로로 넘기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귀신과 괴물이 그려진 삽화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의 귀신과 괴물을 소개하고 있다. 삽화가 엉성하지만, 흑백의 조화가 나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처음 몇 장 정도는 천연색 삽화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흑백 삽화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삽화에 흰색보다는 검은색을 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삽화가 무섭게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봐서 그런지 눈을 침침하게 만드는 삽화 인쇄가 불편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책에 대한 호기심과 무서운 느낌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친숙한 괴물도 있기 때문이다.

 

 

 

 

 

 

 

헨리 퓌슬리  「악몽」  1781년

 

잠자는 여자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악마 인큐버스(Incubus)를 그린 삽화다. 책은 ‘잉크부스’라고 표기했다. 영문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원래 인큐버스라는 이름에는 ‘위에 올라타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큐버스를 잠자는 여자의 가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요괴도감』의 삽화가는 잉쿠버스, 아니 인큐버스는 눈 뜬 여자를 공격하는 악마로 그렸다. 여자의 뱃살을 살짝 꼬집는 인큐버스의 자세가 재미있다.

 

 

 

 

 

 

 

 

 

 

 

 

 

 

 

 

『요괴도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각종 요괴 이야기를 모은 책을 참고해서 엮은 책이다. 특히 미츠키 시게루의 <세계 요괴 사전>(1985년, 일본 동경당)을 많이 참고했다. 미츠키 시게루는 요괴만화를 그린 거장으로 평가받는 만화가이다. 예전에 투니버스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요괴인간 타요마’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원제는 ‘게게게의 기타로’) 요괴 전문가라고 불릴 정도로 요괴도감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요괴도감』은 원본을 발췌한 내용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고향에 가면 만화에 나오는 요괴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미츠키 시게루 로드’와 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예이츠가 쓴 <켈트 환상 이야기 모음>이라는 책도 참고했는데 『켈트의 여명』(펭귄클래식코리아, 2005년)으로 번역되었다. 예이츠는 192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다. 그도 켈트족 전설과 신화와 환상적인 민담을 복원할 정도로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예이츠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주석집을 내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신비적 경향을 주제로 시와 그림을 남긴 낭만주의의 선구자다.

 

 

 

 

 

 

이 책의 인쇄 정보를 보면 펴낸이가 '김충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충원 미술교실’을 세울 정도로 드로잉의 재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한 그 김충원 교수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 교수는 출판사 ‘사과나무’를 운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는 아동도서도 아이들이 즐겨 읽었다. 특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시리즈와 ‘IQ 게임 만화퀴즈’ 시리즈를 좋아했다. 이 책들을 펴낸 진선출판사는 현재까지도 김 교수의 드로잉북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나 만화를 즐겨 읽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책들이 지금도 나오더라도 잘 안 읽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무서운 이야기나 괴담을 접할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냥 글자가 적힌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때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공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자꾸 그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인간에게 주는 위력이다. 공포 이야기 모음집은 괴기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런데 요즘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요괴들의 세상이 아닌 요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흉측하고도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요괴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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