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아니 어쩌면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자부했듯이 실제 조선이라는 새 국가 건설의 최고 주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건국 후 7년이 채 못 되어 이성계의 아들이자 정적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그에게는 ‘역적’이라는 불명예가 따랐고 조선의 역사에서 한동안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정도전이 조선의 국정방향을 제시한 『조선경국전』에 피력된 정치사상은 그의 비참한 죽음의 단서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총재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총재라는 것은 위로는 군부(君父)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자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크다. 또한 인주에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현명한 이도 있으며, 강력한 이도 있고 유약한 이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총재는 인주의 장점(美)을 살리고  단점(惡)은 고쳐야 하며, 옳은 일은 받들어 봉행하고, 옳지 않은 일은 바꾸도록 해야 한다.” (46쪽)

 

정도전이『조선경국전』에서 밝힌 재상의 역할 부분이다. 군주는 현명함과 무능함의 차이가 있지만 재상은 가장 능력 있는 자가 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재상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1394년에 편찬된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의 이념과 통치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책. 훗날 조선의 헌법이 되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 ‘주례(周禮)’에 바탕을 두고 치(治), 부(賦), 예(禮), 정(政), 헌(憲), 공전(工典)의 6전 체제로 정리하였으며, 6전의 앞부분에는 치국의 기본이 되는 정보위(定寶位), 국호, 국본, 세계(世系) 등의 내용을 기술하였다. 6전에서는 능력본위의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 선발,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군현제도와 호적제도의 정비, 언로의 개방, 사대외교의 중요성, 인(仁)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의 지양 등 고려 말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건국한 조선사회가 가야 할 방향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도전은 새로운 조선을 이끌 중심은 왕이 아닌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점, 즉 왕권보다는 재상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확보를 위해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연합하여 그녀의 소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다. 태조의 적자 소생의 아들보다는 계비 소생의 어리고 허약한 왕자가 그의 구미에 맞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재상권 강화 시도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된다. 왕자들의 병권약화를 위해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추진하자, 1398년 왕권 강화론의 대표주자 이방원은 그가 지휘한 군사들을 보내 송현(松峴)의 남은의 첩 집에서 방심하고 있던 정도전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꿨던 정도전에 대한 왕실의 대반격이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정도전은 단지 시운을 타고난 정치가이자 야심가가 아니라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개혁가이자 국가 경영에 필요한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절세의 경륜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사, 총무, 예산, 의전, 국방, 법무, 건설 부문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각 조항 곳곳에서 느껴지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깊이 느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정치가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그가 그린 이상국가의 모습은 수도 서울의 사대문 이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종각역에 있는 보신각의 이름을 모두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한다. 숙정문의 정자가 지(智)와 매한가지라 하니 사대문 이름 속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들어있고, 보신각의 신자가 ‘믿을 신’(信)이니 수도 서울을 인의예지신의 본향으로 삼고자 했던 그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민유방본(民惟邦本). 조선시대 부흥을 이끌었던 세종, 정조를 비롯한 대다수 제왕들의 통치이념, 리더십을 관통하는 정치사상이다. '백성이 근본'이라는 정신을 담고 있다. 그 핵심 덕목은 위민(爲民),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경외(敬畏)에 있다.

 

정도전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낙생(樂生)에 있다 했다. 즉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를 부모처럼 따르고 나라를 뒤엎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민유방본에 녹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목표는 민본에 있다. 민본정치를 위해 정치의 틀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적 요구라면 독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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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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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성계,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1392년 이성계가 왕좌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8도 도통사 최영과 우왕, 창왕을 제거했을 때 이미 예견됐다. 그의 조선건국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논쟁적인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학자들 중에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던 최영 장군과 ‘이 몸이 죽고 죽을 때까지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는 정몽주를 죽인 점을 보더라도 이성계는 잔혹한 쿠데타 세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문적으로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칭한다. 쿠데타는 지배자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혁명과 달리 민중의 지지가 없다. 쿠데타는 또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의 체포. 탄압, 정부요인의 납치, 암살, 군사적 강압 등을 배경으로 한다. 또 언로를 장악하고 대국민 선전에 나선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명백히 쿠데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성계의 건국 과정이 아니라 그의 집권이 대다수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건국과정의 불법과 폭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지배층간의 권력투쟁만 살피는 오류에 빠진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오직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을 뿐인가, 대다수 국민의 삶을 이전보다 나아지게 했는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조선을 건국할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왜구가 날뛰었고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비옥한 땅과 소금 생산, 목축에 유용한 토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조세수입은 줄었고 해로를 통한 운송은 불가능했다. 해안의 조세 창고는 모두 내륙으로 이동했다. 왜구가 날뛰고 있었지만 고려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권문세족의 토지 장악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은 도를 넘었고 국가 재정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세금을 낼 수 없는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한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권문세족의 농장을 해체하고 신진사대부에게 고루 토지를 나눠줬다. 문란한 조세제도를 고쳐 농민생활을 안정시켰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지방을 8도로 개편하고 고려 때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중앙에서 직접 전국 구석구석을 살피겠다는 의지였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명백히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의 쿠데타가 다수 백성에겐 유익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 이성계가 가장 크게 비판을 받는 부분은 새 왕조 건설이다. 굳이 기존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있는 한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와 국민은 왕과 왕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정부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고려 왕조가 유지돼야 할 이유는 없다.

 

정도전은 ‘임금은 하늘이 만들어 준다’고 했다. 민심이 떠나면 왕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분명히 고려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의 변명이다. 그러나 ‘민심은 언제든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이 진리는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 왕조에나 똑같이 적용된다.

 

 

 

 Scene #2  두 건국 공신의 엇갈린 운명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한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 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

삼봉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의 건국과 치세 이념을 밝힌 대목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자는 천하를 한순간에 잃게 된다는 사실을 건국에 즈음해 만든 법전에 명시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그는 역성(易姓)혁명의 당위성을 국민저항권에서 찾았다. 정도전은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라 했다. 임금보다는 나라가 더 위에 있고 나라보다는 백성이 더 상위 개념임을 제시했던 것이다.

 

 

 

왕(王)이란 글자는 본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조선왕의 면복에도 도끼 무늬가 들어 있었다. 정도전과 이방인은 서로 도끼를 쥐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다. (77쪽)

 


이성계의 뜻에 따라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이 아닌 재상이 중심이 되는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바로 이러한 재상중심체제와 세자 책봉문제 탓에 정도전은절치부심 비수를 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살해당한다.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 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에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국권의 조건도 너무나도 달랐다. 어느 왕조에서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다툼은 치열했다. 조선 왕조 초기, 태종과 정도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표방한 왕도정치도 곧 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반면 이방원은 강력한 왕의 권위를 고집했다. 결국 정도전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태종은 역대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정도전이 혼신의 정열을 쏟으며 이루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백성을 근 본에 둔 이상적인 국가였다. 정도전의 천재적인 열정과 천년대계의 꿈은 왕권에 눈먼 이방원 일파에 의해 허망하게 꺾였고 조선조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폄훼되고 소외 됐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혁명정신은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시켰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Scene #3  부흥의 기지개를 켜다


경도 한성부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92~93쪽), ‘민음 한국사’ 시리즈는 풍부한 도판뿐만 아니라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기존의 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한국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자였던 방석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가장 먼저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래서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사병을 없애 군사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의정부를 두어 재상들이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왕이 크고 작은 나라 일을 결정하고 6조로 하여금 왕명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왕권이 확립되자 호패법을 실시하여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조세 징수와 군역을 활용했다. 대내외적으로 태종은 18년간의 왕위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일본·여진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특히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병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을 주도했다.


이렇게 태종 때에 확고한 왕권의 안정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의 발판을 다졌다. 이런 태종의 노력으로 세종 때에 조선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태종 시우리가 눈여겨 봐야하고, 이제는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이하 ‘강리도’)이다. 지도 이름인데 너무 길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는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정말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조선 건국 초기에 나온 이 지도도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계의 지리학자들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만들어진 강리도를 보고 놀란다. 유럽도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페인은 금방 식별할 수가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 1492년에 아메리카를 조우하게 될 제노아 사람 콜럼버스가 이 지도를 보았다면, 자신의 고향을 이 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지팡구(일본)와 카타이(중국)가 얼마나 큰 지 놀랐을 것이다.


일본의 모습이 비록 작게 그려져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들은 큐슈와 혼슈의 위치 잡기가 상당히 정확하고, 간토 이북의 묘사도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교기 지도보다 낫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 열도의 위치를 한반도 남쪽에다 그려 넣어 전체구도가 일그러졌고, 위도도 뒤집어져 있지만, 이는 여백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편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대교린의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애써 세계지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에서 가져온 지도를 그냥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자주적으로 세계지도를 그렸다. 국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동수복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태종은 권근과 이회에 일러 우리 시각에 선 세계지도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남쪽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기 때문에 건국 초기 조선은 해외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의 세부 설명 (65쪽)

 

 

이회는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명에서 가져온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성하였고, 일본에도 사람을 두 차례나 보내 지도를 구하고, 실제조사를 하게 하였다. 강리도는 15세기 조선의 지도제작자들이 얼마나 외부의 정보를 가공하고 합성하는데 뛰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그리스의 위대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아랍-페르시아의 지도 제작자, 중국과 일본의 지도 제작자들의 지식이 훌륭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실측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과 조선이 대단히 크게 그려졌고, 일본은 왜소하게 그려졌다. 실제로 중국과 조선의 상대적 크기는 50:1이지만, 지도에서는 5:1로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크기가 10배나 부풀려진 것이다. 한반도보다 2배의 크기를 지닌 일본열도도 지도에서는 1/5 가량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역시 이것도 10배나 부풀려져 있는 셈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 나머지 세계도 대단히 축소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인도 대륙도 해안선에 붙어있어 금방 식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당대 조선의 국제정치적 관심을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심상지도(心象地圖)인 것은 분명하다.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왕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간다. 너는 태평의 시대를 열어라.”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반을 굳건히 했다. 이런 태종의 노력은 세종 때에 그 결실을 맺게 된다. 건국의 꿈으로 뒤척이던 조선은 이제 부흥의 기지개를 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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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가오리」 1725~1726년경

 

 

“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우리 집의 식사를 끝낸 후의 식탁, 걷어 오른 식탁보의 한쪽 끝, 굴 껍데기에 기대어 있는 나이프 같은 정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네” 소설가 프루스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날 샤르댕의 그림을 마주한 체험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미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곳에서 미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의 고백을 깊이 공감하는 것은 샤르댕의 그림들을 통해 사소한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일상의 나날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시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1699년 가구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 시메옹 샤르댕이 활약하던 당시의 프랑스는 역사화를 가장 고귀한 화화장르라 생각하여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순으로 자리매김한 후 평범한 사물을 묘사한 정물화를 천대했으니 식기, 과일, 악기, 책등 사실적인 소재들을 그려낸 그는 소재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당시 미술을 주도하던 아카데미 취향과 많이 달랐다.

 

플랑드르에서 유행하던 정물화를 능가하는 섬세함과 프랑스미술의 세련미를 두루 갖춘 그의 작품들은 하찮은 사물들과 그 주변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부엌살림도구들도 역사화나 인물화처럼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는데 무엇보다 내가 샤르댕에게 감동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미를 간직하고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의 사물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름다운을 경험하려고 미술관을 찾고, 음악회를 가고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지만. 우리 곁에 있으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물들, 그것이 그릇이든, 과일이든 시들어버린 꽃이든, 모든 사물은 미의 평등함을 지니고 있음을 잊은 채 아름다움을 일상이 아닌 특별한 공간속에서 찾으려 한다.

 

사실 샤르댕은 자칫하면 무명화가로 생을 마칠 뻔한 거리의 화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 삼류화가들이나 손대던 정물화와 풍속화를 부여잡고 살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출세하려면 역사화나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그러나 장롱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일자무식이었으니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역사화 같은 걸 그릴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출세한 것은 천운이었다. 1720년 성체축일 때 샤르댕이 퐁뇌프 근처의 거리에서 그림을 전시했는데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궁정 아카데미의 실력자 장 바티스트 방 루가 그의 그림의 진가를 발견한 것이다. 방 루는 그를 궁정에 소개, 출세의 뒷배가 돼줬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비눗방울」 1734년

 

 

방 루가 샤르댕의 그림에서 주목한 것은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감성의 힘이었다. 그의 또다른 그림 ‘비눗방울’을 보라. 소년은 자신의 놀이에 완전히 몰입돼 있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행위지만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다. 그 천진난만한 진지함은 뜻밖에도 감상자에게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감성의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감상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교감하고, 인습적인 것으로 부터 벗어나 확장된 상상력을 갖고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총체적 행위일 터이니 눈을 돌려 우리 곁에 무심히 놓인 흐트러진 식탁, 빛에 반짝이는 반쯤 비운 포도주잔, 비스듬히 놓인 쿠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벽처럼 늘 우리 주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진심으로 바라본다면. 하찮게 여긴 사물들이 조용한 명상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해방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니 그것이 사물에 대한 참된 인상이며 미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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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5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4-0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오리나 홍어의 얼굴은 사람과 똑같아서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샤르댕이 그린 가오리 그림은 정말 실감나죠.

cyrus 2014-04-06 22:44   좋아요 0 | URL
의외로 샤르댕의 가오리 그림이 미대생들이 모사할 때 즐겨 그리는 그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만큼 정물화의 모범인것이죠. 평범하고 투박해보이지만 그래도 샤르댕의 그림 무시 못합니다. 노자님 말씀대로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한 붓의 터치감은 훗날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거든요.
 
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말콤 글래드웰 지음, 선대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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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시합에서 왠지 계속 질 것 같아 보이는 인간 샌드백,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쳇바퀴 돌 듯 시장을 뺏기는 중소기업들, 공권력에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폭력조직, 미국과 붙어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발을 감행하는 중동 국가들.

 

이런 존재들을 통칭하는 단어가 바로 언더독(Underdog)이다. 투견대회에서 항상 패배하는 개들을 지칭했던 이 말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 없이 작아 보이는 존재들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과연 언더독들은 거대한 권력과 맞붙어 얼마의 비율로 승리를 거뒀을까? 말콤 글래드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10번 중 3~4번은 언더독들이 이기는 것으로 관찰됐다. 1등은 강자고 꼴찌는 약자다. 둘이 경쟁하면 1등이 이긴다. 그러나 세상엔 약자가 반드시 약자가 아니며 강자가 항상 강자가 아니다. 강자가 우리가 생각하듯이 항상 힘 센 자가 아니다. 강한 힘은 오히려 그 원천이 유약함일 수도 있다.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양치기 소년 다윗은 돌팔매질 하나로 블레셋의 210㎝ 거인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흔히 약자와 강자의 무모한 또는 의미 있는 싸움을 일컫는 대명사. 사실 약자와 강자가 붙을 땐 강자가 이기는 것이 공식이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허를 찌르는 약자의 전술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자가 비중을 둔 건 ‘강자의 한계’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골리앗의 육중한 몸을 감싼 45㎏짜리 갑옷이 걸리더라는 거다. 차라리 질곡이던 그 갑옷 탓에 다윗의 민첩성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논지다.

 

『다윗과 골리앗』은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되거나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모든 것을 갖춘 이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파고 든다. 또한 힘의 한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내전을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구교도를 무력으로 억압했다. 그들은 시민들을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통행을 금지했다. 잠옷 차림으로 산책하던 노인, 십대 청소년 가릴 것 없이 총으로 사살했다. 무력은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분노를 키웠다. 북아일랜드에 주둔한 총사령관 이언 프리랜드는 점점 더 강경하게 대처했다. 몇 달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은 30년 내전으로 번졌다.

 

저자는 힘과 성취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U자형 곡선(∩)으로 설명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힘과 성취가 정비례 관계를 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수가 적은 학급이 높은 학습효율을 보이는 것이 많지만 일정한 지점을 지나 학생 수가 너무 적어지면 학생들끼리 배울 것이 적어 오히려 학습효과가 떨어진다. 또 돈이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너무 돈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성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실제 돈 많은 부모들이 하는 걱정이다. 저자는 강경한 체벌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아준다는 통념에도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을 적용한다. 특정지점 이후엔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무력으로 인한 통치보다 약자들을 포용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다윗’을 굳이 약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부당한 대우, 열악한 조건, 강고한 편견 등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긍정성에 따르면 이는 ‘바람직한 역경’일 뿐이다. 세상이 발전하는 건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서지 잘난 골리앗 덕분이 결코 아니라고 했다. 지금 당신 눈앞에 포진한 강적들. 그들의 치명적 약점은 ‘강하다’일 수 있단 얘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시련과 역경이 꼭 우리를 성장시키기만 할까. 때로는 약화시키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것 아닐까.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주제와의 연관성이 흐려지면서 작가의 주장을 애써 강요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다. 키가 작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 앞서 사울 왕이 갑옷을 입혀줬을 때 다윗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며 벗어 던지고, 자신의 주특기인 돌팔매에 쓸 강가의 돌을 골라 들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다윗처럼 삶에서 약점을 강점화 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꿔놓은 사람들이 있다.

 

강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약자 다윗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커버할 나름대로의 비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승산이 없다. 강자 골리앗의 힘이 영원하지 않듯이 약자 다윗의 지혜도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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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길이 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여러 길들은 손을 내민 채 떠나고 만나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길은 시각의 감정을 먼저 열어준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순간 어떤 본능적인 갈망들이 교차하다가 이내 선택한 희망을 믿고, 따라나서게 하는 힘이 있는듯하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길의 풍경이 그러했다. 가난과 희망의 조화를 안은 채 연인과 함께 적막한 길을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게 남았다면... 펠리니의 영화 '길'에선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니가 고집스럽고 순수한 삶의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그들의 길을 짙은 향수로 전해주었다.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서 어색하지 않은 자기 의자에 앉은 것 같이 흔쾌히 길을 나서게 될까. 수없이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잊혔다가도 한 번씩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묻는 것 같다.

 

누구든지 각자의 길이 있다. 가보고 싶은, 가야만하는, 갈 수 없는 길까지...

 

망설이다가 각자의 주사위를 던지고 떠나지 않는가. 그러면 길은 거대한 수평선의 고요함이 되어 현대인의 고립된 방을 만들어 주다가도, 뒤흔드는 파도를 만들어 어디론가 다시 떠나가도록 돛단배 한 척을 내던져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길위에 서면 덩그러니 비어 있는 끝없이 먼 대지가 다가온다. 그것은 텅비어 있는 도로가에서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은 어떤 세계로 인도한다. 희망의 안단테가 들려오는 곳으로 말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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