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문예 세계 시 선집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1년 4월 10일 시인이자 화가인 칼릴 지브란이 뉴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48세였다. 사인은 간경화와 결핵 초기 증세, 독신으로 살았던 그가 술로 외로움과 육체의 고통을 달래려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레바논 태생이다. 『예언자』에는 그 영향이 짙다. 12살 때 가족과 미국 보스턴으로 이민 갔던 지브란은 이후 귀국과 미국행을 반복하며 아랍과 서구, 이슬람과 기독교, 조국의 고대 예언자의 세계와 현대 물질문명의 이질성을 넘나드는 체험을 한다. 25살 때는 파리로 가 2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하며 로댕을 만났다. 그의 유해가 레바논으로 돌아갔을 때, 베이루트 항에는 개항 이래 최대의 인파가 그들의 나라가 낳은 천재를 조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미묘한 갈등 속에서 공존하는 땅 레바논에서 자란 난 지브란은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로 불리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가 반세기를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독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니체를 투사하는 분신은 차라투스트라이고, 알무스타파는 지브란의 분신이다. 파리의 그림 유학생 지브란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니체에게 흠뻑 빠져 들었다. 그의 열정에 넘친 해박한 논리는 니체를 정신적 스승으로 만들었다.

 

『예언자』는 배가 출범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배는 잔잔한 포구와 항을 거치면서 사랑, 결혼, 아이들과 같은 가족을 대명제로 삼으며 쓰린 가슴을 치유하며 바다로 항해한다. 알무스타파와 알미트라라는 두 명의 남녀 예언자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운데 사랑, 결혼, 슬픔, 기쁨 등 삶의 진리를 들려준다.

 

알무스타파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 올펄레즈를 떠나리라 결심한다. 마을사람들은 현자(賢者)를 잃지 않으려 막아서지만, 여자 예언가 알미트라의 생각은 다르다. ‘머무름은 굳어버려서 틀 속에 갇히는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에게 매달리는 대신, 알미트라는 가르침을 청한다. 알무스타파가 깨달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다음, 일상에서의 선행, 인간의 일차적 욕구, 소통과 단절, 책무에 대한 탐사를 계속한다. 희로애락과 거주 공간을 얘기하다 보면 소시민들의 생존철학이 등장하고 일탈로 인한 죄와 벌, 선과 악, 이성과 열정은 가치를 다루는 근간이 된다.

 

지브란이 고통을 수반한 법을 사유하다 보면 자유와 자각, 교육은 필수품이 되고, 어느 순간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대화의 중요성, 잊기 쉬운 우정의 소중함, 시간의 순간성과 영속성, 미추(美醜)의 이분법 등을 관념이 아닌 평상심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은 것에 일상의 소중함과 가까운 가족과 친지와 같은 인물에서부터 먼 곳의 친구까지의 속정 깊은 마음까지를 두루 관통한 지브란의 항해는 기도, 종교, 죽음이란 커다란 획을 그으면서 마무리된다.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받는 자’로 시작된 글은 ‘잠깐,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로 끝나지만 지브란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반동하는 인간이 아닌 따스한 정이 모래밭에 쌓이는 낭만적 판타지를 꿈꿔왔던 그는 물에 비친 바람의 섭리를 다 깨우친 것 같다. 영원의 전사 지브란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명왕성을 기호로 하여 말하는 악기 인간을 다루는 『예언자』는 예술품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이 책은 종교적 메시지와 예언자적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또 삶의 안내자와의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통찰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많은 종교들이 한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도교적으로, 때로는 불교적으로, 때로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만나게 된다. ‘베풂’에 대해 쓴 글에 이런 표현이 있다.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 뿐. (중략) 그런데 지금 그대들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가진 것이란 모두 언젠가는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것이 되게 하라.” (27~29쪽)

 

예언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고 먼 곳을 헤매고 다녔단다. 그렇게 일상에서 멀리, 높게 떨어져 있지 않으면 진리는 찾아내기 어렵다. 팍팍한 일상에 휘둘리다 보면 정말 무엇이 소중한지 알기 어렵다. 『예언자』는 우리를 생활에서 떼어내 멀리, 높게 떨어진 위치로 이끈다. 『예언자』는 100쪽을 조금 넘을 정도로 작은 분량이다. 그러나 산문시로 된 이 책은 급한 마음으로는 좀처럼 읽기 힘들다. 진리는 여유와 침착함을 갖춘 이에게만 다가간다. 『예언자』의 가치를 느끼고 싶다면 그런 담담함을 먼저 익혀야 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우리에게 조선이란 무엇인가?

 

조선이란 시대는 때로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기념되지만, 때로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의 과거에서 추방당하곤 한다. 조선은 우리의 과거를 밝혀주는 위대한 유산이자, 동시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때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머나먼 과거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 기묘한 양면적 얼굴에 드리운 찬란함과 일그러짐, 그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도 흔들리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조선이란 무엇인가.

 

조선 500년 왕조를 이끈 역동성은 그것대로 온전히 인정해주고, 편견과 억측으로 인해 왜곡된 조선에 관한 오해들은 그것대로 제자리를 잡아주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머릿속 조선의 표상도 정말로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사극에서 보았던 조선의 궁궐 모습부터 일본 게임기에 대해 열광하며 동시에 느끼는 묘한 열등감까지 오늘날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표상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가장 작은 나라로, 현재의 우리나라 모습과 가장 가깝지만 그마저 조금 더 약하고 간섭 받았고 경직되어 있는 사회라는 인상이다.

 

 

 

 Scene #2  조선을 움직인 역동성 

 

우리들은 500년 왕조를 이끈 조선의 저력을 무시한 채,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고 평가하며 조선시대에 ‘봉건’ 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있다. 물론 여기서 봉건이란 신분적 억압, 부자유, 당쟁으로 대표되는 악(惡)의 이미지로, 근대가 기술의 발달, 사회적 인권신장,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선(善)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이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상해를 입는다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실패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일을 예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연 ‘근대’라는 미래를 예견하고 기대를 했을까?

 

우리가 조선을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근대주의는 일제 식민사관의 토양이라는 것이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근대주의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무력적 통치보다는 언제나 문화적 다스림을 중시하고, 역사적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실록을 기록했다. 또한 국가의 법과 개인의 도덕률을 조화시키려고 했고, 백성들에게 가정 절박한 민생문제를 제도적으로 풀기 위해 시스템을 혁신하려고 했다.

 

우선, 대동법을 들여다보자. 대동법은 오늘날의 세금문제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세금 부과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대동법은 폐단을 극복하면서 제도를 투명하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시 대동법 추진 과정을 통해 국정 시스템의 개혁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대동법 추진 주체에 대한 기존의 오해를 바로잡고, 위정자들이 세우는 ‘국가정책’이란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런 조선의 저력을 이제 다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근대는 모두 잘못된 과거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과거를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단지 옛날이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이 폄하해서도 안 된다. 동시에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조선에 관해 왜곡된 역사적 해석과 평가도 반드시 경계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조선의 역동성을 읽는 일도, 조선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Scene #3  부끄러운 과거의 초상은 없다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 문명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것에는 몇 가지 중심축이 있다. 조선이 지닌 역동성을 발견하는 일은 조선이라는 두터운 지층을 탐사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과거가 쌓아온 역사적 사실들을 복기하는 일이자, 동시에 오늘의 우리를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닌 문화적 유산의 힘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결코 제 얼굴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무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다음 고민은 그렇다면 왜 그 동안 조선 문명의 역동성을 잘 모르고 자랑스러워하지 못했는지의 문제이다.

 

역사의식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살지 못했던 시대, 살 수 없는 시대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형성된다는 저자의 말에서 보듯,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를 위해 조선을 끌어들이지 않았나 싶다.

 

마치 전설처럼 남아있는 고구려의 기개를 이어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당파싸움과 사대주의로 물든 조선은 우리의 현실과 시간적으로 가까운 업보이기에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자기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줄은 알아도 역사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리는 제대로 된 성찰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국가 단위에서 논하기 전에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알 수 있는데, 잘못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될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즉, 훗날 전혀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실록이 왕의 승하 후 편찬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알았을 때에는 나 역시 실록에 대해서 ‘그럼 그렇지, 왜곡도 되고 그랬겠지’ 라며 체념하는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다. 하지만 실록의 복잡한 편찬 과정을 알게 되니, 장소 문제와 관직 체계부터 시작한 여러 상황을 통해 조선의 실록편찬 과정이 깊이를 지닌 최선의 선택이었고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뿐 아니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는 점을 알면서 무릎을 치게 되었다.

 

역사적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대충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가능한 자세하게 그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것은 현재와 현재의 소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한 저자의 견해가 신선하고 많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른 이유를 뒤집어 씌워 정적을 제거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에서 빈번했는데도 불구하고, 윤휴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리학의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예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해 성찰하는 힘과 시각을 얻은 것 같아서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sp 2015-10-15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고 싶어 리뷰를 살펴보는 책들은 모두 cyrus 님의 식견있는 리뷰가 달려있군요! 대단하십니다

cyrus 2015-10-15 21:24   좋아요 0 | URL
식견을 넓히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 중인데, 여전히 배움의 길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제 글에도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
 
작은 학교의 힘 - 아이의 학력, 인성, 재능을 키워주는
박찬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Scene #1 우리의 ‘학교’는 정말 희망이 없는가? 

 

우리나라 ‘학교’의 현 주소는 무엇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의 학교는 붕괴되었고, 희망은 없는 것일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기업의 변화가 시속 100마일이라면, 현재의 학교체제는 10마일에 불과할 만큼 가장 변화에 둔감한 조직이라고 했다. OECD에서는 미래에 ‘학교’라는 제도는 붕괴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학교’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무능한 조직이며, 척결의 대상인가?

 

한국의 교육을 벤치마킹하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교육 사랑’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입시과열을 보고, 오히려 ‘한국교육을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돌아간 스웨덴 정치가가 있다. 15번의 대학입시 개혁으로 세계적으로 유래를 보기 힘든 ‘입시 강국’, 전 국민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우리나라. OECD에서 주관하는 PISA 시험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는 대한민국! 이러한 명예로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교단 붕괴, 공교육 정상화라는 말로, 현재의 학교는 정상 가동이 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기관으로 우리사회에서 암암리에 치부되고 있다.

 

다양한 정서와 특성을 지닌 청소년기 학생들. 나만의 장점과 어려움을 동시에 갖춘 아이들이 갖는 학교 선택권은 얼마나 될까. 여기에 관계 회복과 더 세심한 케어가 필요한 경우는 기존 학교 환경에서 공부하기에는 그 한계 또한 뒤따른다.우리의 ‘학교’는 정말 희망이 없는가?

 

 

 

 Scene #2  폐교 위기 직전의 산골학교의 변신

 

억압적인 입시교육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이고 다양한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대안학교가 주목받고 있다. 부모들은 대안학교에서 교육의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대안학교를 꿈꾸고 찾아다닐까.

 

대안학교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은 제각기 지만, 모두 아이들을 공교육에 맡기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학교들이다. 배움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학교가 경쟁과 재 없는 시험 준비로 매몰되어 버린 현 상황에서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준비하도록 새로운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교육은 국가가 모든 국민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교육내용을 차별 없이 균형 있게 제공하기 위해 만든 대중교육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공교육이 사회적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좋은 학교 출신들이 좋은 직장을 가게 되고 그러면서 학교간 서열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선발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운영되는 학교는 아이들의 다양한 능력을 균형감 있게 다뤄주기보다는 획일적인 지식을 기준으로 서열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나 교사들 모두가 학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들어와 더욱 심화되었고 자연스럽게 공교육이 아닌 대안을 스스로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작은 학교의 미래』를 쓴 저자 박찬영 선생님도 15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는데 처음 교직 생활을 한 곳이 충남 논산에 위치한 도산초등학교였다. 저자가 처음으로 부임했을 당시 도산초는 전형적인 농산촌형 벽지학교로 인근에 학교 외에 교육관련 시설이 전혀 없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환경은 학생 수 감소로 이어져 2009년에는 폐교 위기에까지 몰렸었다.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선택한 자구책은 방과 후 활동 특성화였다. 학교는 자체 예산으로 방과 후 교육 활동 인프라를 구축하고, 우수한 강사 유치를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도산초는 도시에서도 배우기 힘든 골프와 승마 강좌를 비롯해 발레, 축구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과목별 캠프, 수월성과 창의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참여율을 높였다. 도산초는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가 협력해 농촌형 방과 후 학교 모델을 성공시킴으로써 2009년 전교생 37명에서 2012년 107명으로 학생 수가 증가하는 등 3년 전 폐교 위기의 산골학교에서 명품학교로 변신했다.

 

도산초는 기존의 학교 교육 방식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교사는 적은 수의 전교생 한 명 한 명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서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도와준다. 즉, 모든 학생들 다 방과 후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활동 프로그램에 배제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에 학생들은 자존감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동기 부여도 높여준다. 이러한 환경 속에 공부는 성적을 얻기 위한 지긋지긋한 시간이 아니라 좋아서 하게 되는 즐거운 시간이다.

 

도산초와 오늘날의 교육현장을 비교하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공교육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의적인 아이들이 눈총을 받고, 교사의 권력이 휘둘러지는 교실, 경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 친구를 밟고 올라가라고 속삭이는 학교, 학습능력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 다양성을 꺾어버리는 학교, 지식과 정보 전달에 주력하는 모범 정답을 가지고 “너는 뭘 몰라, 틀렸어.”라고 말하는 교실에서 아이들의 사고는 닫히고, 창의성과 자발성과 자존감은 죽어간다.

 

작은 학교는 현재의 아이들 그러니까 행복한 세계를 만들어갈 미래의 어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화해조정을 받지 못한 학교의 기억이 순간순간 아픔으로 떠올라 우리 안에 울고 있는 아이들, 과거의 아이들을 위로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존재들과 관계를 맺을 줄 알고, 자기분야에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줄 알고, 무엇보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다른 존재의 말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가치나 환경을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자기 세계를 창조해갈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Scene #3  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교육의 학교로 발전해야 할 때 

 

아이를 일반학교에 보냈다가 여러 가지 부적응을 보여서 다시 대안학교 문을 두드린 부모들은 대안학교에 대한 기대가 더 클 수 있다. 특히 학습보다도 친구나 교사와의 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아이라면 대안학교에 가면 그런 상처들을 안 받으리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교사들, 무엇보다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제일 강조하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라면 아이 상처도 치유되고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일반학교에서 대안학교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겪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한다. 학습 스트레스에서 풀려나서 교사와 친구들과 더 깊은 소통을 나누며 충분히 놀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이에게 치유가 된다. 그러나 대안학교에 보냈다고 모든 아이가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오히려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대안학교가 일반학교보다 더 나은 점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문제가 부각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안학교마다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인격수양을 강조하는 학교도 있고, 자유학교를 지향하는 곳도 있고,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하고, 경건한 신앙을 강조하기도 하고, 지역과 함께 하는 시민정신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회적 비판정신을 강조하기도 하고, 심지어 대학진학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그러니 자녀들의 특성에 맞춰 아이들이 희망하는 학교를 함께 찾아보고 상담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학교 아이들과도 수시로 만나면서 내 아이의 특성 및 상처받기 쉬운 면들을 이야기해 주면서 더 잘 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다 보면 서서히 내 아이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번에 될 리는 없다. 대안학교는 아이의 성장과 특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부모 교육 및 모임을 계속 열면서 공동체를 통해 지속적인 도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수적인 만큼 특히 부모들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학생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사와 학부모가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맡기는 교육에서 참여하는 교육으로 학부모의 인식이 전환되어야 하며, 학구제의 제한을 풀어야 하는 행정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이제는 공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학교로 발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역량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열정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파 하는 간절함이 교사들에게 있고, 교사의 관심과 칭찬을 먹고 사는 맑은 눈망울의 학생들이 여전히 우리 학교에는 많다. 이제는 학교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큰 희망의 불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작은 열정과 감사의 불꽃들을 찾고 살려야 할 때이다. 숨 막힌 공교육이 아닌 정작 공교육에 숨 막힌 학생들 숨통을 틜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작은 학교, 즉 좋은 학교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결조건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

 

 


사람의 마음을 짜릿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주던 꽃들도 질 때가 되면 더없이 흉한 몰골이 된다. 꽃망울이 터진 지가 언제인데 꽃들은 벌써 옷매무새를 여미고 있다. 누가 불러 저토록 빨리 지려 하는가. 몇날 며칠 그늘을 깔아 주던 땅 위에 마음껏 꽃잎들을 부려 놓고선 나무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꽃망울이 늦게 핀다고 비닐봉지로 벚나무를 씌우던 광경은 아릿한 추억처럼 선명하게 눈에 밟혀 온다. 이제 가진 것 없이 말쑥하게 꽃잎을 떨어낸 벚나무. 그나마 푸릇푸릇 잎이 올라와 허전함을 달래 주지만 바람 불 때마다 날리는 꽃잎들은 여전히 지난날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겨울 끝자락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 모가지 뎅강 꺾어 바닥으로 떨어진 채 슬픈 연가를 부르며 누워 있는 꽃들이 수북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자며 여심처럼 봄날을 만끽하던 벚꽃은 이제 그 때의 추억을 가슴에 묻은 채 아득한 영면에 들어 있다.

 

질 때는 속절없이 져도 그 추억은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나뭇가지에 붙어 한 계절 능히 붉은 열정으로 불태우던 꽃들이기에 그 추억의 향기도 오래 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잔잔한 꽃 물살을 일으킨다. 사람은 한번 가면 오지 않아도 꽃들은 내년 봄이면 다시 핀다. 소리 없이 꽃잎 다 떨군 나무에 슬퍼하지 말고 푸르름 짙은 잎새가 희망처럼 허공을 쑥쑥 밀고 올라오길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니홀 - 할인행사
우디 알렌 감독, 다이안 키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많은 사람들에게 ‘로맨틱 코미디’는 ‘진부함’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은 맺어진다’라는 장르의 틀에다가 우연찮은 둘 사이의 첫 만남 같은 장치들이 반복되면서 그런 인식들이 굳어져 왔다. 90년대 이후 비교적 싼 제작비로 로맨틱 코미디들이 마구 양산되면서 이런 장르의 기본 룰들이 얕은 깊이로 공식처럼 재활용되면서 그런 선입견 역시 확대됐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는 장르의 틀과 언어들을 변주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진실한 사랑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과정에 유머가 동반된 코믹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사랑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이 장르의 법칙들을 진부함의 덫에서 건져내는 신선한 로맨틱 코미디 명품들은 이 장르에 대해 여전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

 

우디 앨런의 ‘애니 홀’은 내러티브적인 파격과 독특한 정서로 코미디의 역사를 새롭게 쓴 명작으로 꼽힌다.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에서 보더라도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장르에 대한 자기 반영적인 시각과 함께 이 장르의 관습들에 대한 과감한 파격을 이룬 혁신적인 로맨틱 코미디이다.

 

지식인의 사랑 놀음을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작가 겸 감독이 우디 앨런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을 그렇게 희화화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뛰어난 예술가다. 그가 남우주연상까지 탔더라면 아카데미 사상 세 번째의 ‘빅5’(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여우주연상)수상작으로 기록됐을 걸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앨비(우디 앨런)가 애니(다이앤 키튼)와의 만남과 사랑, 실연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 담뿍 담긴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보는 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우디 앨런의 분신처럼 보이는 앨비는 섬세하되 소심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과대망상에 시달리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생떼 쓰기로 사랑을 망친다. 이 영화는 개봉 직전까지 ‘안도헤니아(Andohenia)’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행복 불감증을 뜻하는 정신의학용어다. 자고로 자의식 과잉인 자가 행복을 맛보는 경우란 없다. 차라리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를 줄 아는 자가 사랑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애니가 앨비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바로 그 직후 앨비 최초의 희곡에 인용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연극의 내용이 현실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즉 현실에서 겪은 사랑의 좌절이 예술 속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변주된다.

 

예술은 거짓말이다? 예술가의 창작 의욕을 자극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술은 현실을 위무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매혹적인 텍스트다.

 

영화는 이런 열린 결말이라는 파격 외에도 이전의 로맨틱 코미디들이 강조하지 않았던 섹스에 대한 솔직한 태도와 구체적인 묘사, 관습적이지 않은 대사,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주인공들 못지않은 비중에 놓으면서 독창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탄생시켰다.

 

특히 신경증을 앓고 있는 남녀 주인공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을 통해 남녀의 관계와 로맨스에 대한 어려움을 상기시키고 이들이 결국은 맺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무한한 낙관과 그 결과로 결혼이라는 일부일처제의 제도로의 편입이라는 로맨틱 코미디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던졌다.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어려운 것임을 토로하는 주인공들이 맺어졌다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세련됨으로 ‘애니 홀’은 로맨틱 코미디의 레벨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해피엔딩의 반대말은 ‘비터스윗(bittersweet)’엔딩이다. 나는 ‘애니 홀’처럼 ‘쓰라리되 달콤하게’ 끝나는 사랑영화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 선생님. 저희 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형을 병원으로 데려오지 그래요?”라고 말하자 동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좋은데... 저는 계란이 필요하거든요” 우디 앨런은 ‘애니 홀’의 이 농담이야말로 연애의 속성을 관통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미련하게 반복하고 있는 연애라는 행위 역시 “불합리한, 광기의, 부조리한 일이지만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계란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는 어린 시절 우디 앨런의 비관적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린 시절 ‘인간은 모두 죽는다’ 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후 “심술궂은 아이로 살수 밖에 없었다”는 우디 앨런은 그 이후로도 삶의 완벽한 당위나 희망으로 가장한 낙관 따위를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인생은 그저 “맛이 최악인데 게다가 양까지 적은 휴양지 음식”같다고, “외로움,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나마도 너무 일찍 끝나버리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투덜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들은 우디 앨런 영화의 비관으로 인해 유쾌함을 얻어왔다. 이토록 불완전한 삶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작고 볼품없는 남자의 악전고투는 자조적 농담과 버무려지면서 대책 없는 위로의 말보다는 더 큰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 어차피 별 볼 일 없겠지만,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