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오지 않은 새벽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이와 같은 짤막한 서문이 수록된 시집 <노동의 새벽>이 1980년대 중반 무렵 발간되면서, 박노해라는 이름은 당대의 문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에 비로소 '노동자에 의한 노동 현실을 노래한 시'가 등장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고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민중들의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의 형상'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노동자였던 박노해는 작품에서 몸소 체험했던 노동의 현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인간은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노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전태일이 살던 시절의 노동은 비인간적 삶 그 자체였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 박노해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중략)

  

늘어 처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이 시가 발표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 시인이 노래한 노동현실 역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가 절규하던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밤 깊은 어둠은 여전하다.

 

객관적 지표만이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박노해 시를 하나 더 인용하면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중략)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 나는 ET가 되어 /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 연장노동 도장을 찍”(‘손무덤’)어야 하는 게 바로 노동자의 삶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경제적 생활 조건은 그 기본 중 기본이며,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기본이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수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 여전히 어둡기만한 노동의 미래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지난 현재 노동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만큼 노동 문제에도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실업 문제는 그 중핵을 이룬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비정규직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대체로 30%인데 반해 우리나라처럼 50%를 넘어서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임에도 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과연 전태일 시대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발전해 온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선진화의 현주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점증하는 세계화 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미래는 우울하기 이를 데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적 이슈라는 점에서 노사관계를 넘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그 어떤 주체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불가피한 결과로만 인식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청년실업은 노동이 처한 또 하나의 우울한 미래다. 그동안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썩 신통치 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생각한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늘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임시직 고용으로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5210원

 

중소기업 근로자, 아르바이트생 시급(時給)의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이 내년 시간당 5210원으로 결정됐다. 1988년 최저임금이 처음 도입되고 27년 만에 처음으로 5000원을 넘어섰다. 올해보다 350원, 비율로 따지면 7.2% 인상됐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주 40시간, 월 209시간 기준 108만8890원이다. 올해 101만5740원보다 7만3150원 올랐다. 혜택은 주로 저임금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을 심의ㆍ의결한 최저임금위원회는 전체 근로자 1773만4000명 중 14.5%에 달하는 256만5000명이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저임금이 결정되기까지 노사 간 협상은 쉽지 않았다. 당초 재계는 동결을 요구한 반면 노동계는 이보다 훨씬 높은 5910원을 주장했다. 노사는 각각 50원을 올리고, 120원을 낮춘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법정 논의 시한인 지난달 27일까지도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결국 공익위원의 중재안 표결로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5년째 반복되는 모습이다.

어렵게 인상됐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저임금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야기한다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영세 사업자의 부담을 늘려 아르바이트 자리가 줄고 결국 일자리 총량이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임금 근로자의 생활 개선을 위해 인상된 최저임금이 되려 이들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최저임금 인상 결정이 어려운 경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만큼 최저임금 문제는 노사 양쪽에 미치는 영향을 주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임금의 최저 수준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소득의 양극화를 줄인다는 취지에서 결정한 것이다. 최저임금은 저임금근로자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3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중국도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40%로 높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3.3%로 1년 새 4.3% 포인트가 떨어졌다. 지난 대선에서도 최저임금은 화두였다. 국민 대부분이 2017~2018년 기준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50% 수준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정계, 기업 그리고 국민들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일 때다.
 

‘노동의 새벽’을 지나 ‘인간의 새벽’이 오는 그 날은 언제 찾아올까? 희망 없는 노동자들의 불안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처럼 ‘새벽’이 절실한 적은 없었다. 힘들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새벽’ 같은 희망이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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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0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참 웃긴 것 같아요.
1년에 한번씩 경영자와 노동자 대표가 만나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 말이예요.
늘 칼자루는 경영자에게 쥐어져 있고,
언제나 현실은 돈과 힘을 가진 자의 뜻대로 굴러가게 마련이죠.

그래도 5,000원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만족해야 할까요?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비정규직도 문제이고, 최저 임금도 문제이인데,
그 틀에만 묶여 있는 것도 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과 적은 임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그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대안도 필요하고,
아예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과 실천도 필요하죠.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의 저항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3-07-09 16:18   좋아요 0 | URL
은빛님 댓글을 읽으면서 제가 노동 문제와 현실에 대해서 많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매년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소식이 나오면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빛님 말씀처럼 진부한 관점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 때문에 여전히 만족할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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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연구와 사회적 활동을 같이해 나갈 수는 없을까? 그것은 과학자에게 독일까, 보약일까? 과학자에게 사회활동은 터부시된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도 인권·평화 운동에 뛰어든 순간, ‘순수한 과학자’라는 정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좁고 깊은’ 전문가의 길을 걷는 과학자에게 사회란 불순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과학자 닐 투록은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반대한다. 아니, 분노할 것이다. 투록은 자신의 위대한 ‘물리학’ 영웅 리처드 파인만마저도 책임 회피에 직면한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존 폰 노이만(헝가리계 미국인 수학자)이 나에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주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폰 노이만의 충고를 따라 강력한 사회적 무책임의 감각을 발달시켰다. 그러자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적극적인’ 무책임이 자라나도록 씨앗을 뿌린 사람은 폰 노이만이었다!"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에서 재인용, 22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투록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이를 통해, 예비 물리학자로서 부모님으로부터 얻은 한 가지 생각, 즉 ‘훌륭한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는 현재 페리미터 이론물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며, 프린스턴대학 물리학 교수와 케임브리지대학 수리물리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우주론의 기본적인 이론들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관측을 통해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티븐 호킹과 함께 인플레이션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호킹-투록 인스탠탄 솔루션’을 개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상상해온 우주, 상상조차 못했던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뉴턴, 패러데이, 플랑크, 디랙, 아인슈타인, 파인만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물리학부터 현대물리학까지 물리학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바라보고, 물리학의 발전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저자 자신의 물리학 연구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우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예술, 문학, 영화 등 인간 문화 전반과 연관 지어 설명을 함으로써 이 책을 단순히 과학 서적이 아닌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이 포함된 종합 교양서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 사회는 과학적 성과를 사용하는 데에 만족해왔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연구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연구 결과만 내는 것에 행복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자들은 성과에 대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실험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파인만도 참여했던 맨하탄 프로젝트의 산물인 원자폭탄이 대표적인 사례다. 핵물리학의 성과가 살상무기로 개발되어 무수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투록의 작업처럼 우리의 과학과 인간성을 서로 연결할 때가 왔다. 결국 과학도 사람이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정부의 주요 정책에도 과학이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다. 기후변화,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 국민은 과학에 대해 과거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나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만큼 과학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사회의 방향을 잡아주는 일이 절실하다.

 

저자는 물리학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과학에서 큰 발전이 있을 때마다 사회에도 크나큰 변혁이 있었다. 그 변혁의 중심엔 당연히 사회 곳곳에 서있는 과학자들이 있다. 보다 더 대중에게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과학자들과 그 들의 연구를 이해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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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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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음의 벽을 ‘섬’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사람들 저마다가 가진 '취향'이 그 섬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얼마나 자주 '내 취향'이라는 말을 내뱉는가. 내 타입, 내 스타일로도 말해지는 이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공해 진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것 저 것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훈일 뿐 자신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나이쯤이면 나와 공감대를 지닌 묶음에 들어가는 게 속 편해진다. 이제 그 밖의 세상은 굳이 어울릴 필요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여집합이 되고 만다. 꽤 여러 곳에 걸쳐져 있던 공통집합은 갈수록 줄어들어 어느새 작은 섬이 되고 만다.

 

 

 

 

 

<타인의 취향>에 떠 있는 섬들을 살펴보자. 성공한 사업가 카스텔로는 적당한 성공에 안주한 채 늘 먹을 것만 찾는 속물스런 구세대 남성의 전형이다. 이에 반해 그의 아내 앙젤리크는 전문가적인 취향과 품위를 지닌 중년여성임을 자부한다. 불균형, 그러나 뜻밖에도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저속한 취향은 고사하고 아예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일체의 취향조차도 가지지 못한 카스텔라가 그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맞춰주었으며, 아내 역시 오직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가정의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기괴해 보이는 부부의 평온은 카스텔라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취향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카스텔라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실제로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영화나 연극, 시, 음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나 이별, 심지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TV 드라마에서 스치듯 들리는 한 마디 대사로도 영혼을 뒤흔드는 경천지동의 균열은 시작될 수 있다. 조카가 등장하는 연극작품이 상연되는 극장에 가자는 아내의 청이 귀찮다. "지루한 연극을 왜본담". 그의 아내는 올케의 새집 단장을 도와주며 예쁜 인테리어를 싫어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쩜 저런 스타일을 고르지?" 연극배우 클라라는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로 만나게 된 카스텔로가 그냥 싫다. "대머리에 콧수염.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전혀 없고..." 카스텔로의 운전기사도 그의 보디가드도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거지?"하면서.

 

 

 

 

초반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적인 관계 이외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 사이에 사연이 생겨나는 건 카스텔로와 클라라가 만나면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 관객도 깜빡 속을 만큼 무의미하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영어회화 선생으로 면접을 받으러 온 클라라에게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카스텔로는 형식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두 사람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간 카스텔로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클라라를 보게 된다.

 

이제 카스텔로에게 그녀는 그냥 클라라가 아니라 특별한 클라라가 된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것이 된다는 의미다. 문화적인 것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카스텔로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연극을 보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쏟는 그의 정성은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단 한가지이유로 무참히 거부당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그를 밀어낸다.

 

비로 클라라에게 어설픈 영시로 사랑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가슴 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기도 하짐나, 그러는 가운데 차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새삼스레 느끼기 시작한다. 아직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그림을 구입하고, 내친 김에 공장에는 거대한 벽화를 주문한다. 유능한 부하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던 그가 직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고민하며, 벽화를 주문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텔라는 '변화'해간다.

 

 

 

 

하지만 앙젤리크는 남편의 이런 변화를 전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편은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저 자신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분명해서 타인의 입장이나 취향을 배려할 수 잇는 여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이들보다 우월함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취향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급한 것들이고, 이에 따라 세상은 자신의 일방적인 돌봄만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앙젤리크에게 남편은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한 마리 강아치처럼 대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소통의 오만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자초한다.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아내의 무감각함은 역설적으로 카스텔로를 '각성'하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수단'이나 '배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카스텔로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인형'으로 취급받는 삶을 살았던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단 한 점의 그림이 무참히 떼어진 후 결국 카스텔로가 아내를 떠나는 설정은 연극 <인형의 집>의 현대적인 범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처럼 싫던 그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객석을 쳐다보는 클라라. 놓쳐 버린 사랑으로 슬픔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커튼콜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영화 내내 냉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무대 맨 앞에서 카스텔로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취향만큼 견고하게 개인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어디 있을까. 소통의 원천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자기방어, 단지 그것이 취향인데 말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한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간 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 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이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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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8-01 01:00   좋아요 0 | URL
아! 이 멋진 글을 제가 왜 못보고 지나쳤을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취향은 서로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비롯하여 결혼 후 제가 좋아하게 된 영화들은 대부분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절대 닮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지요.
저는 여전히 액션과 공포물도 좋아하지만,
아내는 절대 때려부수는 영화나 피를 튀기는 영화를 보지 않거든요.

[룩엣미]도 보셨나요?
그 영화에 대한 평도 읽고 싶어지는데요.

cyrus 2013-08-02 00:08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저번 학기 때 현대미술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담당교수님이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강조하다는 취지에서 이 영화를 보여줬어요. 이 영화 말고도 미국 흑인 문제를 다룬 '타임 투 킬'도 보게 되었죠. '룩엣미'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시간 나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싶네요 ^^

감은빛 2013-08-06 02:08   좋아요 0 | URL
[룩엣미]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입니다.
[타인의 취향] 이후에 찍은 작품인데,
거의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강조한 시선과 관점에 대한 부분으로 보면
이 영화 역시 탁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취향]보다 [룩엣미]를 더 좋아합니다.
 
앙리 루소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34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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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피운 화가의 길

 

 

 

 

 

 

앙리 루소  『램프가 있는 자화상』 1900~1903년

 

 

 

보통 아마추어 화가라고 하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정 화가에게 사사를 받고 활동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서구의 경우 아마추어 출신 유명한 화가로는 반 고흐와 앙리 루소가 있다. 특히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피카소, 르동, 마티스 등 화가들과 전위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루소는 살아생전에 일반인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죽어서도 화가의 이름 루소보다는 성()이 같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을 그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과 혼동한다면 루소 입장에서는 통탄한 일이다.

 

 

 

 

 

 

앙리 루소  『세관』 1890년

 

 

루소는 꾸준한 준비로 전업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예술가다. 전직이 세관원이었다. 1871년부터 무려 22년 동안 파리 세관의 세금징수원으로 밥벌이를 했다. 24시간 근무한 후 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었다. 루소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1884년 마흔 살 때였다. 이때 루브르박물관에서 유명한 그림들을 베껴 그릴 수 있는 모사 허가증을 받는다. 그는 직장과 가정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그림을 그렸다. 가슴 한 켠에는 뛰어난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초보자 티를 겨우 벗을 무렵인 1885, 꿈에 그리던 살롱전에 난생 처음 출품한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헤밍웨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을 향해 한발 짝 한발 짝 다가가고 있다’(에디슨)는 말에 공감이라도 한 듯이 다시 캔버스와 씨름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살롱전의 고답적인 스타일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창설한 앙데팡당전은, 루소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 단골 무대였다. 7년 동안 출품한 작품이 20점이나 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루소의 그림을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사실 루소의 그림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을만큼 특이하다. 그 당시 많은 그림들이 유사한 스타일로 세련되게 그려졌던 것과 달리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단순화된 형태와 원근법을 무시한 기묘함, 이질적인 색상 대비 등이 관람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루소가 아니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 만큼 화가로서 자부심은 시들지 않았다.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그를 아마추어 화가, 우스꽝스러운 기인으로 여겼지만 루소 본인은 자신을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진지하게 믿었다. 1893, 루소는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관을 그만둔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듯이 과감하게 전업작가로 나선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열정은 뜨거웠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생활마저 궁핍했다. 그런데 고진감래였다. 1905,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든다. 예전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가을 살롱전에 작가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제도권 비평가들도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화상들도 원시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루소의 그림을 구입해갔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그리다

 

 

 

 

 

 

앙리 루소  『나, 초상-풍경』 1890년

 

 

 

루소는 파리 풍경을 그렸다. 파리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있고, 강변으로 낚싯줄을 드리우거나 산책을 하거나 느린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둔하고 우직하게 그렸다. 루소에게는 낮선 풍경을 제 눈으로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만국박람회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참가국 국민과 신상품이겠지만 박람회에서 제일 떠들썩한 화젯거리는 단연 에펠탑이었다. 센 강변에 우뚝 선 에펠탑은 박람회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그해 처음 전깃불 조명이 박람회에 사용돼 덕분에 늦게까지 입장이 허용되고 에펠탑 위로 설치한 큼직한 조명탑이 파리 시내를 비추는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번영을 누리고 있던 파리는 세상의 중심으로서 당당했다. 루소는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나, 초상-풍경>에서 루소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포기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자화상에 애국심에서 우러나는 프랑스의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두 가지 상징물인 에펠탑과 열기구를 그려 넣었다. 당시 화가들은 에펠탑이 흉물이라고 화면에 그려 넣기를 꺼려했지만 유일하게 쇠라만이 루소보다 1년 앞서 에펠탑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루소는 자신의 그림 속 곳곳에 만국기가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환희를 표현하는 등 신념에 찬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살롱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지식층의 전위미술과 경쟁했다. 이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정글의 세계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  1905년

 

 

 

루소는 태어나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파리 밖 지척에 있는 아프리카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파리 사람들에게 마치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곧 돌아와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과장하고 뻥 튀겼다. 사람들은 루소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열대의 정글 원시림에 다녀와서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루소의 타고난 ‘뻥쟁이’ 기질이 한몫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원정을 떠난 일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수도를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선제후 막시밀리안 백작을 멕시코 황제로 임명했다. 뒤이어 멕시코에서 봉기가 일어나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퇴각했다.

루소는 자기가 원정군에 참전해서 싸우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고 허풍을 쳤다. 하급 세관원으로, 아마추어 화가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에게 이렇게라도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어낸 말이었다. 정글 풍경도 루소가 제 입으로 다녀와서 보고 그린 풍경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사실 루소는 열대식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식물원에 가본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루소는 일종의 과대망상증이 있었다. 그 과대망상이 어쩌면 이리 멋진 정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그림의 전달력과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그는 정글의 화가로 굳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상상력이 주는 힘은 예술가로서의 루소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상상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가지고 살았던 화가

 

 

 

 

 

앙리 루소  『꿈』 1910년

 

 

 

루소는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현실과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무의미한 이색적인 세계였다. 대표작의 하나인 <꿈>에도 두 세계는 공존한다. 원시림 한가운데 뜬금없이 알몸의 여인 야드비가가 몸을 돌려 정글을 둘러보고 있다. 숲속에는 사자와 코끼리, 새들이 모두 주시하고, 평화롭게 잠든 야드비가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뱀을 벗처럼 부리는 사람이 부는 피리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빛이 꽃잎과 신록의 나무 위에서 빛날 때 황갈색 뱀이 피리가 내는 선율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루소의 꿈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가시 돋친 질문을 퍼부었다. 루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원시림 풍경에 무슨 붉은 소파냐고요? 야드비가는 소파에서 잠시 잠든 채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요술쟁이가 부는 피리소리를 듣습니다. 구성진 피리 선율이 잠든 숲을 깨웁니다. 야드비가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시림 한복판에다가 소파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의 방에서 본 빨간 의자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의자를 본 순간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폴란드 아가씨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다. 화면 가운데에 멕시코풍의 식물을 빼곡히 그려 넣고, 아름다운 새와 꽃, 과일도 배치했다. 또 수풀 사이에 사자와 코끼리도 더했다. 그런데 야드비가는 누구일까?

 

그림 속 여인의 실제 모델에 대해서 루소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루소가 젊어서 사랑했던 폴란드 여인일까. 루소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했던 시기인 1910년에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평생 마음에 담아뒀던 영원한 사랑 야드비가를 자신의 화폭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기로 마음 속으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진흙구덩이 속을 뒹굴고 산다. 그러나 우리들 중 몇몇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갖고 산다”라고 말했다. 화가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현실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헛된 환상에 살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열대우림 속의 은밀하게 속삭이는 마술과 같은 소박한 자연의 이야기를 앙리 루소는 각박한 현실에서 별을 그리듯이 자신의 세계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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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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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극적 아웃사이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동네 친구들 몇이서 공터에 비밀 본부를 만들곤 했다.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후 사람 인적 드문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 곳에서 모이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지 정한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 곳엔 부모님의 잔소리가 없다. 우리들만을 위한 세상이다. 거기에 앉으면 온갖 즐겁고 기발한 생각들만 떠올랐다. 그 곳은 일탈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과 아웃사이더의 관조적 여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아웃사이더는 내부자를 의미하는 인사이더와 구별되는 인간형으로, 국외자 또는 이단자를 뜻한다. 타의에 의해 어떤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배척되는 경우는 소극적, 수동적 아웃사이더이고, 소속 집단의 규칙이나 질서에서 스스로 벗어난 경우는 적극적, 능동적 아웃사이더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비밀 본부를 만든 것은 적극적 아웃사이더가 되기 위함이었다.

 

콜린 윌슨은 이 작품에서 하찮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에게서 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도 바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인사이더는 제도권 내 사람이고, 아웃사이더는 제도권 밖의 사람이다. 인사이더는 힘이 있고, 아웃사이더는 힘이 없다. 그래서 인사이더는 이끌고, 아웃사이더는 따른다. 이것이 보통 사회인데, 윌슨은 다른 시각에서 아웃사이더를 바라보았다.

 

 

 

 인사이더 같은 아웃사이더

 

그는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카뮈의 <이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과 니체, 반 고흐 같은 실제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아웃사이더들은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일상이 따분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고역이며 노예들에게나 알맞다고 느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이나 사상가들은 이 감정을 문학과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웃사이더들은 체제 안의 순응자인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능동적, 창조적 아웃사이더들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를 넓혔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향을 창조했다.

 

윌슨은 이 과정에서 문학, 철학, 역사, 신학을 아우르는 고전 작품 속에서 발굴해낸 주인공들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우한다. 상호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답을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대치되는 두 가지 질문들, 예컨대 ‘존재와 무’, ‘현실과 비현실’ 등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본질적으로 ‘실천의 문제’, ‘사고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보통의 소시민들과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되는데 아웃사이더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풀어보자면,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으면 ‘무임승차’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윌슨의 눈은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역할이 역전되는 위치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이더가 스스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아웃사이더가 나설 때 그렇다. 이 상황이 오면 아웃사이더가 사회를 이끌고 인사이더는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한다. 어느 순간 아웃사이더는 윌슨이 활동했던 영국의 문인클럽, ‘분노의 젊은 사람들’(Angry Young Men)처럼 세상을 향해 진실을 토해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그가 지칭하는 ‘아웃사이더’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치적 소외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아웃사이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약자, 소수자란 의미보다는 그 파장이 깊고 넓은 것이다. 글의 모두에 인용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할 정도다.

 

 

 

 아웃사이더가 이끄는 세상

 

공중파 방송의 저녁 아홉시 종합뉴스를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이의 보도 내용들은 부정적인 유형을 이루어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매일 매일의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유형화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향은 거의 무감하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물질과 결부된 것이어서 우리들의 삶에서 물질의 위의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 인사이더는 정치를 주름잡았고, 경제를 주물렀다. 엄청난 돈을 만지며 승자의 축배를 들었다. 정치적으로 인사이더는 리더였고, 아웃사이더는 추종자였다. 경제적으로 인사이더는 가진 자였고, 아웃사이더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사회적으로 인사이더는 갑(甲), 위너(winner)였고, 아웃사이더는 을(乙), 루저(loser)였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힘을 이기적으로 썼을 뿐 사회를 위해 활용하지 못했다. 돈으로 그들만의 아성을 쌓았을 뿐 나누기에 인색했다. 위너였음에도 루저를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문화의 현실적 풍토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과 의식이 그런 것에 침윤되어 허덕거리더라도 이를 당연시하고 거부하는 몸짓조차 짓지 않는 세태 속에서 아웃사이더들은 어쩜 일탈행위자들로만 여겨질 지 모른다. 이러한 모습을 24세 청년 윌슨이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말이다.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 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 (322쪽)

 

 

인구 통계적으로 소수라고 해서 사회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의 소리를 더불어 함께 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진짜 아웃사이더는 일반인도 이해하지 못한 부정의 환상을 볼 줄 알며 창조적이다. 갑의 횡포로 시끌벅적했던 2013년, 곤혹을 치른 갑의 인사이더도 환자임을 자각하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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