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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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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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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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인류 최초의 범죄

 

 

 

 

 

렘브란트 반 레인 「아담과 하와」 1638년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을 세웠다. 그곳에 두 나무를 심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의 나무였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그중에서 선악의 나무에 열린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뱀이 등장하고 사람을 유혹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하와가 먼저 선악의 나무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인류 최초의 부부는 이렇게 해서 힘든 노동과 고통, 죽음을 맛보게 된다.

 

아담을 미혹해 뱀의 말을 듣게 한 하와는 왜 금지된 선악의 열매를 먹었을까? 그것은 “죽지 않고 하나님같이 된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도 하느님처럼 되고 싶었다. 선악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뱀의 유혹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원불멸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인류 최초가 저지르는 범죄(?)의 한 순간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입에 대려는 하와를 제지하려고 한다. 아담은 손가락 하나를 하늘로 올리며 하느님의 명령을 하와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거짓말에 속아 하느님의 지시를 어겼을 뿐 아니라 아담도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다.

 

렘브란트는 최초의 범죄가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다. 뱀이 유혹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탐스러운 열매 앞에서 망설였으며 ‘정말 먹어도 될까’라며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순간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지시하신 말씀을 거역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Scene #2  우리 뇌에 살고 있는 나기만씨

 

인간의 감각기관은 현실을 왜곡 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들은 정보를 뇌가 ‘인식’하는 과정에선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을 행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는 “기만과 간파의 반복교차가 진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기만과 간파가 이루어지는 관계의 행위는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낙원에서 펼쳐진 ‘기만하려는 자’(뱀)과 ‘간파하려는 자’(아담)의 대결은 결국 ‘기만하려는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 대립의 판도를 바꾸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자기기만하는 자’(하와)였다.

 

기만과 자기기만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특히 남녀 간에도(!) 자주 발생한다. 조직 차원에서의 자기기만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다. 인간 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갈등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우리 뇌 안에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이성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나(자기)기만’씨가 있다.

 

우리 의식이 뇌에 전달된 정보를 왜곡하고 거짓 기억을 만들면서 부도덕한 행위조차 합리화하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뇌는 좋은 의식은 살리고 나쁜 생각은 지움으로써 더 행복해지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기만의 사고 회로는 무조건 상대방을 속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분을 좋게 하려는 방어적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공격적 본능의 방편으로도 사용된다. 지나친 자신감의 표현이나 과시적인 행동, 과잉통제 등이 그렇다. 단순히 거짓말하는 차원을 넘어 왜곡된 상황을 사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게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다. 기만이 발각되더라도 ‘나도 몰랐다’는 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Scene #3  자기기만의 위험성

 

하지만 기만의 유혹에 빠져버린 하와가 타락한 것처럼 자기기만이 주는 혜택은 일시적이지만 대가는 너무나 클 수 있다. 사실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얻는 혜택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자기기만을 한다거나 기만술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전략이 위험하다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상대방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막연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직언을 계속 무시하면 부정적인 것은 걸러지고 긍정적 내용만 경영층에게 전달되는 조직의 침묵만 아니었다면 1986년 챌린저호는 공중에서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6년 1월 28일 승무원 7명을 태운 미국의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폭발 확률에 대한 내부 견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낙관적 태도로 일관하던 중간 관리자들이 실무 연구원의 의견을 상부로 전달하지 않은 자기기만의 침묵으로 인해 참사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단 내의 자기기만을 그대로 방치하면 똑똑한 다수가 모였다고 해도 멍청하고 어리석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대통령이 특정 사안에 대한 무슨 말을 하면 참석한 각료는 물론 전문가들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 말에 토를 달기 어렵다. 회의에 앞서 많은 준비했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대통령 결정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아무리 말해 봤자 대통령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어쭙잖게 토를 달았다가 ‘뼈도 못 추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참석자 입을 얼어붙게 만든다. 문제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고 만다. 이러다 보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토론은 사라지고 일방적 훈시와 설교만 이어진다.

 

생존을 위한 공격적 기능의 자기기만 또한 문제가 있다. 동물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자신을 과대포장하다 보면 엉뚱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자신의 배를 부풀리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다른 개구리보다 몸집을 크게 만들기 위해 배를 크게 하다가 끝내 터져서 죽고 만다.

 

자신의 현재를 과시하기 위해서 과거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게 된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북한의 김씨 일가 우상화와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모습에서 집단적 기만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둘 다 공통적으로 자화자찬과 자기정당화를 위한 거짓 역사 서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거짓 역사 서사는 집단의 통일성을 이룩하는 데 쓸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북한 우상화 작업은 북한 내부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데 있으며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은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일본인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다. 자기 조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Scene #4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라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강조한다. 자기기만의 늪에 쉽게 빠질 수도 있지만 조그만 더 꼼꼼하게 자신의 편향을 알아차린다면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기기만 편향도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집단적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의 만남을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최악의 사고(思考)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 집단 내부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탁월한 결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집단적 자기기만 사고를 막으려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던 자유롭게 말하며 난상토론을 벌이는 브레인스토밍에서도 이런 역할이 중요하다. 바로 ‘데블스 에드버킷(Devil's advocate)’이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어야 한다. 우리 뇌 속에 숨어 살고 있는 ‘하이드’(Hide) 나기만 씨와 싸울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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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나랑 비슷한데...’

 

 

 

 

 

 

 

 

 

 

 

 

 

 

 

 

 

다음의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적용해보자.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위의 글이 자신의 성격과 어느정도 부합될까. 심리학자인 B.R. 포러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평가서가 자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점수를 매기라고 주문했다. 결과는 5점 만점에 4.26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답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평가서는 신문의 점성술 내용을 대강 짜맞춘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격특성을 자기만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경향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에서 유래했다. 혹은 성격 진단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포러의 이름을 따서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바넘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커스단을 이끌었던 유명한 곡예사다. 그는 서커스 도중에 관객을 아무나 불러내어 직업이나 성격 등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신통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이를테면 "당신은 활발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성적인 면도 가졌군요"라고 말해도 관객은 저절로 "어쩌면 그렇게 잘 맞힐까?"라고 감탄하기 마련이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 사주는 사주일 뿐

 

어제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 ‘사주점에 빠진 친구’가 등장했다. 점에 빠진 친구는 손금, 관상, 사주를 보느라 용돈을 다 썼고,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본 후 그곳에 적힌 내용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오늘의 운세에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할 것’이라고 나오면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늘은 차조심 할 것’ 이라는 운세를 보면 그날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유명한 점집의 복채를 준비하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운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방송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주변 사람 입장에서는 운세와 점을 그대로 믿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 심적으로 피곤하거나 친밀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사주 결과 때문에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파혼 소식을 전해왔다. 이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주를 봤는데, 서로 궁합이 안 맞더란다. 주변에도 사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일부는 아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 방송에 나온 ‘점에 빠진 친구’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도 흔히 정초에 본 사주에서 올해 운이 안 좋다며 크게 낙담하거나 자신감마저 잃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년월일시만 가지고 성격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나 소상하게 말할 수 있다니 신기하고 재밌긴 해도, 과연 어디까지 믿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혈액형별 성격도 보면 그럴 법한 성격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A형은 다정다감하고, B형은 바람둥이이라는 둥, O형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AB형은 사이코다? 필자는 B형이지만 지금까지 바람을 핀 적이 없었고, 독창적이지만 제멋대로라며 AB형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 지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혈액형별 성격이나 심리테스트, 오늘의 운세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격을 모호하게 풀어 놓는다. 그런 두루뭉술한 묘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혈액형 성격론은 이미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론으로 판명난지 오래다.

 

사람은 대개 부정적인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대체적으로 혈액형 성격론에서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는 부분은 부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요인에 더 신경을 쓰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은 혈액형 성격학에서 말하는 성격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람은 때론 소심하고 때론 활달하다.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다가도 쉽게 싫증을 내는 게 사람이다. 일관성이 있다가도 때론 제멋대로 이거나 변덕스럽다.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창조적이었다가 너무 개성이 넘쳐나기도 한다. 때론 얌전하다가도 광기를 갖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혈액형 성격론은 그 태생부터가 의심스럽다. 혈액형 성격론은 1880년대 독일에서는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발생 했다. 칼 란트슈타이너가 1901년 ABO식 혈액형을 만들었고 그 이후 연구한 결과 1910년대 아시아 인종은 B형이 많고, 유럽은 A형이나 O형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을 낮추고 백인을 높이기 위해 B형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유럽인과 같이 A평과 O형을 강조하면서 혈액형 성격론이 굳어진다. 그래서 B형 성격론은 적은 혈액형이므로 매우 편파적인 측면이 많다.

 

 

 

 

 ♣ 진짜 ‘나’를 알려는 자세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기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심리적 에너지 낭비를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점은 강점으로 키우려하는 반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평가 절하하는 부분은 약점으로 숨기려고 한다. 자기 스스로 속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을 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긍정적인 것만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전문적인 성격분석 서비스나, 인터넷에 나도는 여러 가지 성격 검사도 있지만, 주변 사람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서, 직장인은 동료를 통해서, 또한 친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성격을 아는 데 가장 큰 팁이 된다. 주변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자신을 아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자신을, 사람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사람들은 일이 잘되고 상황이 좋을 때보다는 힘들거나 난관에 부딪쳤을 때 원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좋고, 어려움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적절한 사회기술로 상황에 대처하지만 위기상황일 때는 기술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내비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퇴화한다. 또 자신을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눈과 귀를 닫고 자기가 아는 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 철학자는 오늘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다. 이에 심리학자 융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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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이 글을 읽으니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고, 평생을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몽테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가 말했던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싶더군요.

* * *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몽테뉴)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cyrus 2013-09-25 21:37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명언이 제 글과 잘 어울리면서 좋아요. 오렌님 덕분에 몽테뉴와 세네카의 좋은 명언 알아갑니다. ^^

김성환 2014-11-1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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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월한 서양 vs 열등한 동양

 

꽃과 여자의 옷에서 봄이 피어난다고 한다. 요즘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오가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있다. 짧은 치마에 살결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들이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여성의 미니스커트는 짧아지고, 립스틱 색깔은 짙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기가 어려우면 아무래도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액세서리를 구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요구가 증대한다고 한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는 우리의 사유나 관념이 자의적이고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관념체계의 깊은 틀은 근대화의 급속한 발전과 자본주의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물들어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했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슬로건 앞에 점점 동양 문화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점점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히게 됐다. 즉 ‘우월한 서양’ 대 ‘열등한 동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 관념체계 안에 당연한 지식으로 자리 잡은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사회구조적 재생산 과정을 단순히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기존의 왜곡되고 종속적인 문화 상황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만 치중했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는 뒷전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서양 중심 사고가 중심 담론이 됐다.

 

 

 

 ♣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이분법적 사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란 긍정적 이미지와 물질적, 제국주의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반면에 ‘동양적’인 것에 대해 이와 반대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나마 ‘명상적, 신비적’인 단어가 긍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의 편견과 왜곡된 동양 이미지가 바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너무나 오랫동안 종속된 결과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알지 못하는 타 문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문화적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서구의 동양 지배 프로젝트와 맞물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표상체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체계적인 ‘동양의 동양화’ 과정에 의해 동양의 이미지는 왜곡돼 왔기 때문에 사이드는 이제까지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동양, 형용사가 붙지 않은 동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각종 주의와 주장으로 포장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대신 동양을 말해왔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동양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들 스스로가 동양과 대치되는 위치에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기 때문이며, 실제 생활과 정신생활 양면에서 사실상 동양 밖에 있는 ‘그들의 외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는 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의식하고, 동양 문화를 비하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의 필요성보다는 욕구를 자극해 많이 판매함으로써 최대 수익을 얻음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부단히 창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동원되는 수단이 광고이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날마다 받아들이는 메시지의 한 형태다. 소비자가 받아들인 총 메시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의견, 호감, 불쾌감 등을 형성한다. 이런 상황을 기업들은 전통적인 콘셉트를 가지고 소비자들의 욕구를 발생시키기보다는 서양적인 무엇인가에 마케팅 전략을 찾고 있다.

 

서구 우월주의에 입각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서양의 차별적 이분법을 광고 속에서 찾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과 강화는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광고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광고 속에 불려 들어가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흐르는 회로’, 그러나 실제로는 광고에 의해서 ‘주의 깊게 준비된 회로(오리엔탈리즘)’를 통해 부재된 시의를 스스로가 채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광고에 의미를 부여하고 광고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 내 안에 서양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동양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거나 혹은 서구 문화에 영향을 지나치게 크게 받은 나머지, 오리엔탈리즘을 자기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언어, 행동, 사고방식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자신이 사고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가 더욱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정신의 왜곡을 가져오게 되며,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까지 초래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은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매년 유행하는 미니스커트가 거부감보다는 친근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은 아닐까. 한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기는 어렵다. 결혼식이나 환갑 같은 행사장에서나 잠시 보는 것이 우리 전통의상의 현실인 것이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당함을 표현한다’, ‘날씬한 다리로 칭찬받고 싶어서다’,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다’ 등은 여자들 의견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서구지향적인 의식이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의식 속에 열등한 동양과 우월한 서양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서양’, ‘열등한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서구인 시각으로 우리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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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힘 -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레이먼드 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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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은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

 

우리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연(緣)을 맺게 되고, 그 연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최소한 자신을 낳은 부모와 가족의 연은 존재한다.

 

혹여 이런저런 연이 다 끊겨 도무지 연을 찾을 수 없기라도 하면, 김춘수 시인이 ‘꽃’이란 시에서 열망했듯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나도 그의 이름을 불러줘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가 되기를 열망한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한 줄 시구 속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세상에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매우 외롭다고 한다. 관계가 없으면 이 세상 수십억 인구는 그저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다. 관계가 없으면 말 그대로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는 누구나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관계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이다.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의 80% 이상이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일 자체로 받는 스트레스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훨씬 높다는 말이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에 보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사람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는 것이야말로 죄악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배려와 진심, 그리고 신뢰를 위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레이먼드 조가 쓴 <관계의 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하면서도 쉽게 잊고 마는 인간관계 맺는 방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 쓴 자기계발서다. 가상의 글로벌 완구업체 원더랜드의 기획2팀장 신우현은 어린 시절 친척들에게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인물이다. 신은 자신의 속마음을 상대방에게 편안하게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 같은 부서에 일하는 직원을 친한 동료라기보다는 일을 위한 파트너 정도로만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조금만 다르다거나 일을 미숙하게 처리하면 차갑게 쏘아 붙인다.

 

신은 원더랜드의 공동창업주 조 이사라는 인물에게 위임장을 받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조 이사는 괴짜다. 위임장을 주는 조건으로 신에게 “1주일에 한 명씩, 한 달에 네 명의 친구를 만들라”는 미션을 제시한다.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신은 그동안 잊고 있던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먼저 다가가고, 먼저 공감하고, 먼저 칭찬하고, 먼저 웃으면 상대방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감정을 형성할 수 있다. 다섯 가지 교훈을 통해 조 이사의 미션을 실행한 신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 행복의 원천은 ‘사람’

 

과거보다 냉혹한 생존 게임에 내몰린 지금 세대는 좀 더 따뜻하고 희망적인 인간관계를 원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행복의 원천은 ‘사람’, 즉 ‘타인과의 관계’이다. 두 사람 간 상호작용의 산물인 관계는 사람들을 성장시켜 가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그 자체가 성장할 수 있는 변화에 영향을 준다. 즉, 상대방을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려고 애쓰는 노력 그 자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자아 존중감을 높여 주게 된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로의 시작을 초래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공감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세심하게 생각하는 진실성이 필요하다. 관심은 좋아한다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하지만 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좋고 싫고의 개념이 아니라 조건 없이 긍정적인 인정을 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인정받는다는 느낌은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삶의 에너지원이 된다. 본인을 향한 칭찬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이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길 바라게 된다. 칭찬, 인정,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 형성이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도 많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이자 처세의 기본인 것이다. 인간관계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투자를 하지 않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관계의 힘> 속에 주인공 신이 살고 있는 공간은 가상이지만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한 권의 책으로 축소한 것 뿐이다. 우리 곁에 조 이사 같은 인생 멘토가 곁에 없다면 책 중간에 중요한 포스트잇처럼 등장하는 관계에 관한 조언과 명언을 그냥 가볍게 넘겨봐서는 안 된다. 당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유용한 삶의 교훈이다.

 

책의 마지막 종이 한 장 다 넘겼다면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부터라도 남에게 항상 무언가 바라는 사람보다, 내가 먼저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진심으로 맺은 인간관계는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훗날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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