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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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3] 테레즈 라캥

 

 

 

 

 

 

 Scene #1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이 부른 파멸

 

불륜과 살인.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 중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게 있을까.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휩싸인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 한마디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본성 깊은 곳에는 도덕과 양심 대신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만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참혹할 만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르짖던 19세기 후반에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작가 혼자서 감내하기엔 쉽지 않았을 터.

 

오늘날이야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언론과 평단은 “에밀 졸라는 마치 포르노그라피를 펼쳐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며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거셌는지 저자 스스로 2판 서문에 열한 페이지에 걸쳐 자신을 옹호하는 반박문을 실었을 정도.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해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고 맞섰다.

 

평단의 비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대목에선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줄거리와 상황 묘사가 파격적이다.

 

주인공은 의욕 없이 살아가던 여인 테레즈와 마초 느낌의 우락부락한 사내 로랑이다. 테레즈는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결혼하고 파리 뒷골목 잡화점 어둠 속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마주하고 속에 숨겨져 있던 욕망이 터져나온다. 욕망에 몸을 불태우던 테레즈와 로랑은 결국 카미유 살인을 공모하고 완전 범죄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결혼. 이젠 행복만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첫날 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카미유의 혼이 자리 잡는다. 기대했던 행복은 오간 데 없이 이제 그들 사이엔 공포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영혼을 보듬어줘야 할 결혼은 오히려 매일같이 영혼을 파괴하며 이어진다.

 

몸짓으로 절규하는 라캥 부인은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로랑의 존재로 대신 메운다. 로랑과 테레즈는 까미유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존재에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정욕은 연이어지는 암전 속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끝내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낸다.

 

 

 Scene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욕망의 에로티시즘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테레즈와 로랑의 불륜에서 느껴지는 욕망의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테레즈와 로랑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 고모에게 맡겨져 병약한 카미유와 함께 자란 탓에 원래 지니고 있던 야성적 기질을 억누른 채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러자 로랑을 만난 순간부터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억눌려진 야성적 욕망이 용솟음치게 된다. 때마침 로랑도 채울수록 허전한 자신의 쾌락의 부재를 해소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랑, 성욕, 쾌락과 고통, 살해욕, 죽음. 이 지극히 상반된 두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금기를 어긴 그들의 위험한 사랑은 결국 카미유를 살해하려는 무시무시한 감정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상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망을 순식간에 식게 만드는 공포의 감정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건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 공포심은 이미 세상에 존재치 않는 영혼을 그들 사이에 불러들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해간다. 육체적 폭력이 오히려 위안이 될 정도의 극한 괴로움. 그걸 끝내는 건 결국 죽음뿐이다. 에로티시즘이 불러들이는 죽음이다.

 

 

 

 Scene #3 공포와 절망의 삶, 잠시라도 잊게 해다오

 

중독성 있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탈출에서 시작해서 감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테레즈와 로랑의 만남도 그렇다. 서로 욕망에 중독되어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망자 카미유가 만든 공포와 절망의 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5~1876년

 

한 달 동안은 테레즈도 로랑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카페 속에서 살았다. (중략) 그녀의 신경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방탕, 육체적 쾌락은 이미 망각을 가져다주는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입천장이 타버려 아무리 강한 술에도 무감각한 술주정꾼이 되었다. 음탕한 쾌락에도 무감각해져, 정부들에게서는 오직 권태와 피로를 얻을 뿐이었다. (337쪽)

 

위험한 사랑에 탐닉하게 만든 그들에게는 서로 ‘압생트’ 같은 존재이다. 압생트는 도취약물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악마의 술’이라 부른다. 값은 싸지만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했다. 드가의 그림에서처럼 남녀 노동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과 마음을 쉬는 시간이 곧 압생트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기 음용하면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와 근육마비 증상이 생기며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로랑은 쾌락을 간절히 요구하는 테레즈의 메마른 입술에, 테레즈는 로랑의 크고 건장한 체구에 뿜어져 나오는 짐승같은 욕정에 중독되었다.

 

살인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사람은 육체적 쾌락에 집착했다. 상대만 달랐을 뿐이지 테레즈와 로랑은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무언가 잊고 싶어서 압생트를 마시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마저도 자신들에게 죄어오는 공포에 벗어날 수 없었다. 테레즈와 로랑은 악몽일 거라고 믿어보지만 가위에 눌린 듯 깨어지지 않는다. 쾌락의 중독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현실을 망각할 수 있어 좋았던 한나절의 욕망은 점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잊고 싶은 건 현실이었는데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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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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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불행해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는 버려진 것 같은 자신의 삶을 예수와 비교한다. 시골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예수를 생각한다. 따뜻한 곳에 살았으며 십자가에 일찍 못 박힐 수 있었던 예수를 부러워한다. 살아갈 이유와 버틸 힘이 없음에도 목을 맬 노끈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인생길에서 그가 하는 일은 한가지다. 바로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그는 고도를 기다린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서사는 오직 ‘기다림’뿐이다.

 

한 그루의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와 블라디미르는 낡은 옷과 해진 중절모 외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닳아가는 신발은 작아 불편하다. 낡은 넥타이는 생에 대한 마지막 격식과 예의인 듯 끝까지 풀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이들은 세상 위에 내던져진 인간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이들의 말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목적이나 대상이 없기에 이들의 말은 하나의 축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사방에 흩어진다. 고독한 인간의 말은 맺히는 곳 없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이들의 대화는 질문과 답의 구조를 취하나 시종일관 소통이 불가능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그럼에도 엉뚱한 대답만을 이어간다. 소통의 부재는 이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극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포조와 럭키 역시 자신의 말만을 뱉어내기에 바쁘다. 말을 하지 않던 럭키는 어느 순간 입을 연다. 그의 말은 해괴한 극의 상황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힘으로 말리기 전까지 쏟아져 나온다. 결국 이들에게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며 더불어 자신과의 소통도 이루지 못한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고 꿈과 현실을 혼동한다.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인간이 세상과의 부조화 속에서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뱉어낸다. 그 말은 무의미하고 그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이뤄나간다. 무의미와 의미는 끝까지 충돌한다.

 

이들이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기다리는 고도란 과연 무엇일까? 고도가 누구인지, 오기는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한 가닥의 실마리가 있으나 그것 또한 확실치 않다. 독자(혹은 연극을 보는 관객)은 그들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도 고도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 이를테면 고도 같은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이들의 기다림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가 확실한지조차 알 수 없다.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반복하는 '말놀이'는 고도가 실제로 온다면 끝날 터이다.

 

그러나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전갈을 알리는 소년만이 등장한다. 소년의 등장으로 1막이 끝나면 새로운 기다림이 시작되고, 2막의 마지막 역시 유예되는 기다림을 알리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년 또한 현실의 인물인지 환상속의 기대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소년은 기다림의 절망 속에서 고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찾기 위한 블라미디르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림 자체가 아니라 기다리는 태도인 것이다. 이들은 어제를 잊고 꿈을 잊고 현실을 잊으면서도 자신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놓치지 않는다. 목을 매고 싶을 지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고도를 기다리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대변한다.

 

어긋나는 이들의 대화와 망각은 관객들을 허무하게 만들면서도 웃음을 이끌어낸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허소(虛笑). 그 웃음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든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결국 우리의 문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절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서 고도를 기다리는 독자나 관객들에게 그 기다림이 계속될 것이라는 무서운 메시지를 남긴다. 독자는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책을 붙들고 기다린다.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고서도 고도를 기다린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것을 모른다. 알고 있었다면 작품 속에 써 넣었을 것이다.” 작품을 매년 한번씩 또 읽어도 나는 고도를 모른다. 고도는 과연 올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올 것인지. 때로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로 아름답다고 하기도 한다. 전망도 없고 기대도 없는 상황에서 기다림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기다리지 않으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오기를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게 만드는 작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무하다고 해서 삶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할수록 삶은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이 ‘말장난’이라는 유희를 발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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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4-05-0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7번째 단락에서 '디디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의 디디는 무엇을 말하는것인가요?!

cyrus 2014-05-05 09:31   좋아요 0 | URL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나라 연극 버전의 블라디미르의 이름입니다. 예전에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공연의 감상까지 곁들이다보니 이름을 잘못 썼군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안나푸르나 2014-11-2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한동안 고도를 그렸던 기억이 있네요
아니 고도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cyrus 2014-11-29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읽을 때마다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장소] 2015-01-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그 디디..!!
 
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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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굴복하여 할복을 결정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주인공 '나'는 성장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몇 가지 이미지를 접한다.

 

 

 

 

 

 

귀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616년  / 세바스티아누스로 분한 유키오  

 

 

히르슈펠트가 성도착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회화 및 조각 1위로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림’을 꼽은 것은 나의 경우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성도착자, 특히 선천적인 성도착자에게는 도착적 충동과 사디스틱한 충동이 구별하기 어렵게 착종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에 아주 적합한 예다. (49쪽)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레니의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티아누스는 주인공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이미지가 된다. 유키오에게 죽음이란 불완전한 삶의 보완양식으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자신이 뜻을 품고 있는 가치가 훼손되거나 그 길이 어긋나 버릴 것 같은 경우,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해 그 유한한 삶의 완전함을 이루고 또한 그것에 완벽한 방점을 찍으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의 은밀한 미학과 완벽한 죽음에의 동경을 꿈꾸어 왔던 그에게 죽음이란 바로 일생의 유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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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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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35]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Scene #1 초콜릿처럼 펄펄 끓는 이야기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었다. 거리의 제과점 앞에는 온갖 장식으로 포장된 초콜릿 선물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창 사랑의 꽃을 피우는 청춘 남녀들에겐 더없이 행복하고 달콤 쌉싸름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읽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초콜릿이 끊는 물’과 같은 감동을 전하는 책이다. 제목만으로는 뭔가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겠지만 초콜릿 맛처럼 오묘하게, 사랑, 음식, 페미니즘, 역사가 한 통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요리를 한다. 어설픈 칼질에 손을 벨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매운 양파의 향에 방울방울 눈물을 짓게 되더라도. 각기 다른 성향의 재료가 모여 조화로운 맛을 이룬다는 건, 마치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사랑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조리 과정 또한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맥을 가지므로 우리는 볶고, 끓이고, 은근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Scene #2 티타의 러브 레시피

 

 

 

이 소설에서 초콜릿은 9월의 음식이다. 당시 초콜릿은 마시는 음료인데 물의 양과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콤하고 쌉싸름한 정도가 달라진다. 작가는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초콜릿을 타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서툴게 타면 최상급의 초콜릿도 맛없어질 수 있다. 덜 끓이거나 너무 오래 끓이면 걸쭉해지거나 탄 맛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4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요리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은유다. 이들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 맛과 닮았다. 티타에게는 요리를 하는 부엌이야말로 자신의 세계이고 미래다. 그녀가 마음을 담아 요리하는 마법 같은 음식은 때로는 눈물을 일으키고, 때로는 최음제가 되며, 때로는 향수와 추억의 매개가 된다.

 

티타는 막내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한다는 가문의 전통 아래 사랑을 잃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하기에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 불에 닿은 옥수수 반죽은 토르티야가 되고, 불에 닿은 쌀은 밥이 된다. 토르티야가 다시 반죽으로 돌아갈 수 없고, 밥이 도로 생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불에 닿은 티타의 가슴을 돌려놓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을 꼽자면 페드로가 선물한 장미를 가지고 티타가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바로 장미 꽃잎 소스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다.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욕망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사실 자체로 한 권의 요리책이다. 달마다 바뀌는 요리는 낯선 재료들의 향연, 시끌벅적한 남미의 파티 분위기를 양념으로 끼얹으며 읽는 이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첫 번째 요리는 ‘1월 크리스마스 파이’. 파이는 달콤하거나, 기껏 상상력을 펼쳐봐야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월 크리스마스 파이의 재료는 정어리 통조림, 초리소, 양파, 오레가노, 세라노 칠레고추 통조림, 페이스트리 반죽이 재료다. 어른어른 알 듯 말 듯한 맛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읽을 때마다 이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맛이 미뢰를 휘감는다.

 

 

 

 Scene #3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중략) 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124~125쪽)

 

 

우리 모두가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상상해보자. 그 성냥불은 혼자 지필 수 없으며 불을 댕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영혼의 양식인 불꽃이 사그라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뜨거워야 할 우리 마음속에 매캐한 연기만 올라온다면 우리는 사랑을 꿈꿀 수 없다. 뜨거운 사랑이 한순간이라도 식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성냥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성냥개비에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날은 많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특별하다. 카사노바가 최음제로 썼다는 초콜릿은 사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음식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지속하고 상대가 활기찬 성욕을 유지하도록 돕고 싶을 때 초콜릿을 선물하곤 한다.

 

사람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이라고 욕하면서도 때가 되면 초콜릿과 선물을 산다. 기업의 뻔한 상술이지만, 그 상술이 얼어붙은 지갑을 열게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따스하게 데운다면 굳이 욕할 일 만은 아니다. 하루쯤 낭만을 부려도 좋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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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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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6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가 없는 그린란드의 겨울은 시원한 얼음 한 조각 없는 속 빈 냉장고와 같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처럼 녹색의 땅일뿐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장편추리극은, 단지 소설의 형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 또는 왜 죽느냐를 궁금해 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스밀라는 ‘문명비판’이든 ‘인간의 존엄’이든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가? 세부적인 것은 그렇지만, 큰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거짓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세계는 진실도 담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157쪽)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랑보다 눈과 얼음을 더 높게 친다. 그녀의 말에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듯이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가운 주인공에게도 사랑의 본능이 느껴진다.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의 가죽을 가져도 돼?” (70쪽)

 

이누이트들은 고래를 잡으면 가죽과 살을 발라낸 뒤, 먼 바다로 고래의 턱뼈를 돌려보내 영혼을 풀어준다고 한다. 고래는 죽지 않고 이듬해 살을 붙여 다시 돌아온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는 이런 조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물개와 들소가 사람에 의해 죽어 욕보이듯 전시된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착취 없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소년의 원시적인 사랑의 물음. 문명세계 야만의 징표가 사랑의 징표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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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보기드문 완벽한 인간 스밀라.. 그때 물개가 다시 튀어올랐고, 어머니는 물개를 쏘았다....˝나는 남자만큼 강하지˝ 스밀라의 엄마도 멋지죠.

cyrus 2017-09-10 19:10   좋아요 0 | URL
네. 스밀라의 어머니가 사냥꾼이었죠. ^^

sprenown 2017-09-12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김연수작가의 스밀라에 대한 오글거리는 찬사가 없었다면 손대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고,지겨운 소설이더군요..문화차이뿐만 아니라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김연수작가가 옛기억을 살려 윤문이라도 할 것이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