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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1001-86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가 없는 그린란드의 겨울은 시원한 얼음 한 조각 없는 속 빈 냉장고와 같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처럼 녹색의 땅일뿐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장편추리극은, 단지 소설의 형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 또는 왜 죽느냐를 궁금해 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스밀라는 ‘문명비판’이든 ‘인간의 존엄’이든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가? 세부적인 것은 그렇지만, 큰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거짓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세계는 진실도 담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157쪽)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랑보다 눈과 얼음을 더 높게 친다. 그녀의 말에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듯이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가운 주인공에게도 사랑의 본능이 느껴진다.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의 가죽을 가져도 돼?” (70쪽)
이누이트들은 고래를 잡으면 가죽과 살을 발라낸 뒤, 먼 바다로 고래의 턱뼈를 돌려보내 영혼을 풀어준다고 한다. 고래는 죽지 않고 이듬해 살을 붙여 다시 돌아온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는 이런 조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물개와 들소가 사람에 의해 죽어 욕보이듯 전시된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착취 없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소년의 원시적인 사랑의 물음. 문명세계 야만의 징표가 사랑의 징표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