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는 분명 좋은 책이지만,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특히 내가 인용한 다음 문장에 역주가 없는 점이 불만족스럽다.

 

 

 페루, 리마의 플로라 트리스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 생겨난 페미니스트 단체들 중 하나이다. (53)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이 문장에 역주가 없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아니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에 내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번역을 맡았다면, ‘플로라 트리스탄이 누군지 설명하는 역주를 써넣을 것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사람 이름이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여성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이다.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 트리스탕으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그녀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보다 훨씬 더 앞서서 여성과 노동자 운동에 헌신했다. 체트킨과 룩셈부르크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면,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다. 트리스탄의 사회주의 운동, 체트킨과 룩셈부르크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여성해방운동의 목표는 비슷하다. 이 세 사람은 남성의 지배여성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봤다. 그런데 어째서 트리스탄은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가? 트리스탄의 업적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유럽을 수놓은 다양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두루 살펴봐야 한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열린책들, 2012)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

    

 

 

 

 

 

 

 

 

 

 

 

 

 

 

 

 

* 로버트 오언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천줄 읽기)(지만지, 2012)

* 샤를 푸리에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책세상, 2007)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제를 폐지하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모어를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조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생시몽(Saint Simon),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9세기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19세기는 유토피아 사상이 만발했다. 산업혁명으로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삶은 더욱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상적 노동이 가능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오언은 농업과 산업이 모두 발전하고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인디애나 주에 땅을 사들여 뉴 하모니라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다. 푸리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자급자족하는 팔랑스테르를 세웠다. 사회주의자들은 계몽과 설득을 통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콧방귀를 뀌었다.

 

 

 

 

 

 

 

 

 

 

 

 

 

 

 

 

 

 

 

 

 

 

 

 

 

 

 

 

 

 

 

 

* [품절]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상에서 과학으로(새날, 2006)

* 리오 휴버먼 리오 휴버먼의 자본론(어바웃어북, 2011)

* 한형식 맑스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10)

* [품절] 욜렌 딜라스-로세리외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

 

 

 

 

마르크스엥겔스는 오언, 푸리에 등의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분류하여 그들의 입장을 현실적 기반을 갖지 못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할 땐 가차 없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훼손되지 않고 굳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학적 공산주의로 분류했다. 트리스탄은 오언과 푸리에와 가까이 지냈다. 과학적 공산주의가 실패했더라도 트리스탄의 업적이 덜 알려지거나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트리스탄의 여성해방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리스탄은 스페인계 페루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공장 노동, 판화를 채색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했다. 트리스탄은 페루에 생활하면서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는 노예들의 열악한 처우를 목격했고, 이를 고발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는 푸리에의 사회주의 사상 속에 담긴 여권 옹호론에 주목했다. 푸리에는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이라는 글(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수록)에 여성의 경제적 자유와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부르주아 여성들까지도 비판했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과 주요 활동을 간략하게 언급한 책들

 

 

 

 

 

 

 

 

 

 

 

 

 

 

 

 

 

 

 

 

 

 

 

 

 

 

 

 

 

 

 

 

* 안체 슈룹, 파투 그림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숨쉬는책공장, 2016)

*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젠더와 사회(동녘, 2014)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슨 페미니즘(김영사, 2007)

* [품절]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창비, 1989)

 

 

 

 

푸리에가 지적한 대로 19세기 유럽 남성들은 생각하는 여성에 반감을 드러냈다. 트리스탄의 남편도 그런 부류의 남성이었다. 트리스탄의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다. 그 시대에 여성은 이혼할 권리가 없었다. 트리스탄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딸의 후견 문제로 남편과의 법적 싸움이 이어졌고, 남편은 트리스탄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사생아’, ‘혼혈아’,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내라는 삼중 굴레 속에서도 트리스탄은 영국,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

 

 

 

영국에 체류한 그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트리스탄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1843년에 <노동자 연합>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트리스탄은 노동자 중심의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기금으로 병원, 학교 등을 설립한다면 여성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연합>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라티오, 2014)보다 먼저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문헌이다. 트리스탄의 견해에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으나 남성 사회주의자와 일부 남성 노동자들은 여권을 주장하는 트리스탄의 견해에 반대했다. 또 남성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트리스탄의 노력을 무마하려고 했다. 트리스탄은 자신을 노동해방의 걸림돌’, ‘공장을 망치려는 여성으로 바라보는 남성 사회주의자와 남성 자본가들의 냉담한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

 

 

거의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합니다. 남자들은 내가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기업주들은 내가 임금노동자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37)

 

 

트리스탄은 자신의 의견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보로 여행을 하고, 자신이 쓴 책을 홍보했다. 강행군을 펼친 트리스탄은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트리스탄을 지지한 세탁부와 중산층 부부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할만한 돈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트리스탄의 기념비가 있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손수 기부금을 갹출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여전히 트리스탄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플로라 트리스탄은 무덤이 필요하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몇 년 동안 노동가들의 애송가로 알려졌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페루 리마에 그녀의 이름을 딴 페미니스트 단체가 세워졌다.

 

 

 

 

 

 

 

 

 

 

 

 

 

 

 

 

 

 

* [품절]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

* 프랑수아즈 카생 고갱 : 고귀한 야만인(시공사, 1996)

 

 

 

트리스탄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흐른 뒤에 그녀의 손자가 태어났다. 손자는 할머니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된다. 그 손자의 이름은 폴 고갱(Paul Gauguin)이다. 고갱은 회고록에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할머니에 대한 모습과 생전 활동을 언급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호인이며 묘한 여인이었다. 그분의 이름은 플로라 트리스탕이라고 하며,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재능 있는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실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프루동의 말만 믿을 뿐이다.

  그분은 수많은 사회주의적인 것을, 그중에서도 노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그분에게 감사하며 보르도의 묘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진실과 꾸민 이야기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듯해서 그저 있는 그대로만 얘기할 따름이다. 그분은 1844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는 많은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그래도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로라 트리스탕이 참으로 예쁘고 기품 있는 부인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또 그분이 늘 여행을 했고, 노동자의 송사에 전 재산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75~176)

 

 

플로라 트리스탄은 마르크스,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의 노동해방운동에 영향을 준 선구자다. 그런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다. 트리스탄의 업적을 생각하면 부당한 평가이다. 왜 아무도 트리스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을까? 트리스탄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라서? 아니면, '남성 지식인보다 뛰어난 여성'이라서? 어쩌면 지금도 세상은 그녀를 반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단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특히 마르크시즘보다 비교적 온전한 사회주의마저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트리스탄을 빨갱이로 취급할 게 뻔하다. 마르크스에 경도된 좌파들은 그녀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의 준말)’으로 취급할 것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부터 시작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만 집중 조명하는 우리나라의 풍토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저평가 받게 한 원인 중 하나이다. 근대적 페미니즘의 시작에 자유주의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개선해나간 사회주의자들도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은 기념비가 필요하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이 좌파라면 트리스탄을 모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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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가 아니라도 ‘트리스탄‘ 이라는 이름은 기억해야 겠네요! 훌륭한 삶을 사신분으로...

cyrus 2018-03-30 16:17   좋아요 0 | URL
짧으면서 굵게 사신 분이죠. 트리스탄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나 그녀가 쓴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요. 당분간은 이런 책들이 나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

2018-03-30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30 16:18   좋아요 0 | URL
‘고갱의 외할머니’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처럼요.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트리스탄’으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2019-05-02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2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5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