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하는 영혼
호즈미준 지음, 함정연 옮김 / 현민시스템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전 세계가 ‘미투(#MeToo) 운동’으로 떠들썩하다. 그런데 일본은 미투 운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잠잠한 편이다. 프리랜서 기자 이토 시오리가 유명 방송 기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지만, 그녀의 고백은 미풍에 그쳤다. 다행히 이토를 중심으로 시민들, 지식인 등이 모여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위투재팬(#WeTooJapan)’이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위투재팬’의 영향력이 얼마나 오래 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사실 이토 시오리가 일본 미투 운동의 시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전에 일본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한 사례가 있었다. 1991년 11월 <침묵을 깨고-어린 시절에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증언>이라는 책을 통해 고백한 ‘익명의 성폭력 생존자들’이다. 어린 시절 친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호즈미 준이라는 여성은 ‘익명의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해 자신도 고통의 경험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호즈미 준이 쓴 《소생하는 영혼》은 1994년 일본에 출간되었고, 1996년에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호즈미 준은 끔찍한 날 이후로 절망적인 시련이 몸과 마음을 관통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본인 스스로 구멍 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친족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혀 어린 시절 불행한 기억의 그림자를 스스로 걷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도 가부장제 사회이고, 여성 차별 및 성폭력 문제에 침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90년대 일본에서는 ‘친족 성폭력’을 뜻하는 정식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살던 호즈미 준은 자신의 책에 ‘친족 성폭력’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용어를 찾지 못해 부득이하게 ‘근친 강간’을 뜻하는 영어 ‘Incest(인세스트)’를 썼다. 1994년에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도 성폭력이란 용어가 생경했던 시절이 있었다.

 

친족 성폭력 범죄는 매년 꾸준하게 증가세를 보인다. 아동 성폭력의 80% 이상이 ‘아는 사람’에 의해 이뤄졌고, 특히 이 가운데 가해자는 ‘친족’이다. 친족 성폭력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친족 성폭력이 일부 가정의 정신 병리적 문제가 낳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은 가해자가 친족이란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또 피해 아동은 친족인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학대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아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친족 성폭력은 쉽게 지울 수 없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20대나 30대가 되어서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적 혼란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호즈미 준은 두 번이나 이혼했고, 임신과 출산에 거부감을 느끼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렇듯 친족 성폭력은 다른 폭력에 비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긍정적인 성 정체성 형성, 성인이 되어 건강한 성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 등에 크나큰 손상을 입게 된다.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들 상당수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신고나 상담조차 꺼려한다. 성폭력 사건이 가족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는 편견 때문에 피해 아동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고, 상담조차도 받지 못한다. 호즈미 준의 어머니는 딸의 고통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들의 죄를 끝까지 방관했다. 어머니는 딸이 아닌 아들의 편에 섰다. 어머니가 딸에 2차 가해를 한 셈이다. 호즈미 준은 이 책에서 어머니에 향한 분노와 원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어머니가 미웠다.

  그토록 궁지에 몰아넣고서도 미안하다는 말도 고사하고, 오히려 소리를 지르며 야단친 여자. 어머니라는 것만으로 나를 누구보다도 상처 낸 사람.

  어머니,

  당신은 한 손에 사랑을 들고, 다른 손엔 예리한 칼을 쥐고 있다. 자식으로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만, 그러나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상처를 입는다. 내 어머니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를 주고서도 걸핏하면 부모라고 나를 위협하는 당신이 밉다. 그리곤 부모를 미워하는 스스로를 미워한다. 이 지경이 되도록, 그 자가 부모를 미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죄를 짓도록 만든 당신이 밉다.

  [중략] 어머니는 어째서 내 기대와 희망을 때려 부수는 것일까? (89쪽)

 

 

호즈미 준은 깊게 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국에서 출간된 <회복에의 용기>라는 책을 읽는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살면서 견뎌야 했던 고통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회복에의 용기>는 현재까지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받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특별한 용기》(동녘, 2012)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성폭력은 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의사에 반한 성적 언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라면 이런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폭력을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고, 가해자가 되레 억울하게 보이는 범죄’로 여긴다. 피해자가 말하면 말할수록 도리어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편견과 의혹의 시선이 증폭된다. 성폭력 경험을 말하고 크게 외치는 순간이 바로 회복의 시작이다. 성폭력 생존자들은 가해자와 그의 편에 서는 부당한 사회에 향해 욕도 하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를 수 있다.

 

 

  사람에게 ‘조언’은 필요 없다. 사람은 본래 자기 안에 회복에 필요한 모든 것, 답도, 힘도, 지니고 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울게 놔두었던 사람이 있었다. 설교, 조언, 위로, 일체 없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게 놔두었던,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준 사람이.

  사람에게 재출발할 용기를 주는 것은 이런 부드러움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부드러움이 생각날 때마다 용기와 격려를 다시 얻게 된다. (252쪽)

 

 

호즈미 준은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조언’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성폭력 생존자는 적극적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자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 성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묵혀왔던 고통스러운 말들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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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합니다 멋지네요!
서양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고통의 뿌리인거 같아요.
지금의 이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요.

cyrus 2018-03-26 11:39   좋아요 0 | URL
sprenown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요즘 제가 읽고 있는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추천합니다. ^^

sprenown 2018-03-26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잖아도 읽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