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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평점 :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며, 급속한 산업화, 빈부 격차의 심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언급된 현상들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변화가 미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느냐이다.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이다. 버틀러는 1872년에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소설 《에레혼》(김영사, 2018)을 발표했다. 에레혼(Erehwon)은 ‘No Where’(이 세상에 없는)를 거꾸로 쓴 제목이기도 하지만, ‘Now Here’, 즉 ‘지금 여기’라는 뜻도 된다. 즉 이상세계는 없을 수도 있지만 바로 내가 있는 이곳이기도 하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국 식민지에 거주하는 양치기다. 그는 거대한 산맥 너머에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다. 양치기는 ‘초복(Chowbok)’이라는 별명을 가진 늙은 원주민에게 접근하여 산맥 너머에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한다. 양치기는 초복을 여행 동반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나 초복은 산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도망치고 만다. 혼자서 산맥을 넘은 양치기는 에레혼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에레혼은 모든 것이 영국과는 반대이다. 에레혼에서 질병은 죄악이다. 질병에 걸리면 구속되어 장기간 복역 생활을 해야 한다. 반면 강도, 사기 등을 저지르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병원에는 ‘교정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의사가 있는데, 교정관이 되려면 특정 기간에 온갖 나쁜 짓을 하면 된다. 에레혼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증상이 생기면 아픈 티를 내지 않게 철저히 숨긴다.
에레혼에서는 기계를 찾아볼 수 없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는 ‘오래된 기계’로 분류되어 박물관에 진열된다. 이곳에서 기계를 설치하거나 사용하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한다. 에레혼의 영주는 양치기가 가지고 있던 시계를 보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왜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하는 것일까? 《에레혼》의 23~25장인 ‘기계의 책’은 에레혼 사람들의 반 기계주의를 보여주는 글이다. <기계의 책>은 에레혼의 반기계파가 쓴 논문이다. 5백 년 전에 기계파와 반기계파 간의 내전이 일어났고 반기계파가 승리한다. 양치기는 <기계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그 내용이 《에레혼》의 23~25장이다. 사실 23~25장은 버틀러의 에세이 <기계 사이의 다윈>을 보완한 글이다. 버틀러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 큰 감명을 받아 ‘기계가 발전하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진화론을 대입했다. 그는 이 ‘기계의 책’이라는 글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기계와 인간은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기계의 완전한 멸절을 제안하지 못하지만,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은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57쪽)
지금 이 시간에 기계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내내 밤낮으로 기계만 돌보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계에 노예로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 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 (259쪽)
버틀러는 인간과 기계가 함께 진화하면서 발전하는 ‘공진화’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시대를 앞서간 예측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가 인간 진화의 경로를 바꿀 것이며 훗날 인간은 기계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한 빅토리아 시대 지식인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거로 기대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 문명의 발전이 곧 이상향을 실현할 것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디스토피아를 제시했다. 동시대 진화론자들은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했다고 비판했지만, 《에레혼》을 읽다 보면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몸이 수백만 년에 걸친 우연과 변화의 결과로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65쪽)
버틀러는 ‘진화=진보’라는 단순한 낙관론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낙관론에 반기를 들고 진화의 우연성을 주장한다. 버틀러가 생각하는 진화는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인 진보’와 거리가 멀다. 우연성은 진화의 주된 동력이며,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인간은 우연성이 빚은 부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버틀러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보다 백 년 앞서서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에레혼》의 해제는 과학 칼럼니스트 이인식이 썼다. 이인식은 《에레혼》이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측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에레혼》에서 드러난 버틀러의 ‘반기계주의’가 기계문명을 예측하는 미래학,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갈림길, 즉 기계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를 고민한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Now-Here(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에레혼》은 ‘시대를 앞서 간 미래소설’로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풍자소설로서의 문학적 가치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래서 이 책의 구성 방식이 아쉽다. 빅토리아 시대는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에레혼》을 읽으면 버틀러의 풍자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역자는 《에레혼》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버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