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Goya)는 궁정화가라는 정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혹자는 권력에 빌붙어 그림을 그리는 고야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사실 고야는 다소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생계를 위해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귀족들과 어울리면서 사냥을 즐겼다. 그렇지만 고야는 스페인에 유입된 계몽주의에 경도된 ‘일루스트라도(Ilustrado, 스페인어로 ‘학식 있는’, ‘계몽주의’를 뜻한다)’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고야의 이중성을 나쁘게 볼 필요가 없다. 고야가 활동했던 스페인의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왕족들은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서로를 견제했으며 민중을 짓누르는 종교의 힘은 막강했다. 불안정한 상황을 틈타 프랑스군은 스페인 국경을 무단 침범했다. 일루스트라도는 처음에 프랑스군의 스페인 입성을 환영했으나 스페인 민중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프랑스군의 호전적 행보에 실망했다. 나폴레옹(Napoleon)은 자신의 친형을 스페인 왕으로 즉위시켰다. 스페인 사람으로서 자존심에 상처 입은 일루스트라도는 프랑스 지지를 철회했지만, 고야는 스페인 왕관을 쓴 프랑스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 츠베탕 토도로프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아모르문디, 2017)
* 함순용 《상처 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 (함박누리, 2017)
* 웬디 버드, 새라 메이콕 그림 《디스 이즈 고야》 (어젠다, 2016)
* 로제 마리, 라이너 하겐 《고야》 (마로니에북스, 2010)
* 줄리아노 세라피니 《고야 : 혼란의 역사를 기록하다》 (마로니에북스, 2009)
* 파올라 라펠리 《고야 : 검은 관능의 시선》 (마로니에북스, 2009)
* 엘케 폰 라치프스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새러 시먼스 《고야》 (한길아트, 2001)
*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 (시공사, 1997)
고야의 성격을 분석한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의 견해는 고야의 이중성을 위한 변명이 된다. 토도로프는 고야를 공적 예술과 사적 예술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 성공한 화가로 평가했다.
고야의 변화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자신의 창작 행위를 둘로 나누고 공적인 예술과 사적인 예술 사이의 분리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고야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양분(兩分)의 세계였다. 그는 한쪽 삶에서는 계속해서 사회에서 용인되는 규범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작품으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삶에서는 대중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탐색을 이어 갔다. [1]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고야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피상적 세계(스페인 궁정, 귀족들의 모임, 민중의 축제)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어둡고 모순된 본능(판화집 『변덕들(Los Caprichos)』, 『전쟁의 참화들』, ‘검은 그림’)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화가가 ‘공적 예술과 사적 예술 사이의 분리’를 시도하는 일이 고야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분의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는 고야 말고도 또 있다.
* 프란체스카 데볼리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르네상스의 천재》 (마로니에북스, 2008)
* 루차 아퀴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경, 2008)
* 엔리카 크리스피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신화가 된 르네상스 맨》 (마로니에북스, 2007)
* 프랑크 죌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로니에북스, 2006)
* 토마스 다비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영혼의 표정을 그린 화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알레산드로 베초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공사, 1999)
* 박경성 엮음 《레오나르도》 (서문당, 1992)
* 찰스 니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평전》 (고즈윈, 2007)
* 마틴 켐프 《레오나르도》 (을유문화사, 2006)
* 마이클 화이트 《최초의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이언스북스, 2003)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밀라노의 왕족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공작의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로 활동했다. 공작의 후원에 힘입은 레오나르도는 뛰어난 걸작을 남겼고,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뛰어난 재능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레오나르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인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탐구 작업을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가 쓴 일명 ‘거울 문자’는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쓰인 뒤집힌 문자다. 이 문자를 제대로 보려면 거울이 있어야 한다.
* 장 폴 리히터 엮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노트북》 (루비박스, 2014)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로 알려진 공책, 그리고 습작 용도로 사용된 스케치북은 레오나르도가 꽁꽁 숨겨두었던 사적 예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자료이다. 『모나리자』가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공적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면 공책과 스케치북은 레오나르도 개인의 지적 탐구심이 허용된 사적 예술의 결과물이다.
*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2011)
레오나르도는 인간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법칙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체 구조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획일적인 법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알려진 그림들이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형태를 일부러 왜곡시켜 우스꽝스러운 그로테스크를 표현했다.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특징으로 주걱턱, 매부리코, 축 늘어진 피부 등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이 습작을 바탕으로 인간의 추함을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지만, 『성 히에로니무스』는 해부학적 특성이 잘 반영된 걸작이다. 이 작품이 2012년에 국내에 전시된 적이 있었는데, 직접 눈앞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늙은 성인의 표정은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그림 속 성자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채 고행의 길에 오른 성자들의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마치 그들이 편하게 살아가는 현실 도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묘사한 성자는 지쳐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성자의 얼굴에 생긴 주름은 외롭고도 처절한 고행이 지속한 세월의 흔적이다. 우리는 이 성자의 표정에서 익숙하고 편안하지 않은 고행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느낄 수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에 구현된 레오나르도식 그로테스크는 관람객이 체험하고 느낄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을 구체화’[2]시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고야. 확실히 그들은 자유자재로 ‘양분의 세계’를 드나들면서 독창적인 예술을 선보였다. 그리고 각자 자신만의 그로테스크를 연출하여 희극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이 혼합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그림에는 희극과 비극으로 명확히 나누어져 있거나 때론 공존하고 있다. 서로 대립적 위치에 있는 이중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니 종종 성격과 신념이 배치되는 행동을 했고, 사적 세계를 철저히 숨기려는 모습을 보였다. 고야는 귀족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면서도 민중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했다. 말년에 궁정화가 일을 그만두고 ‘귀머거리의 집’에 은거했다. 레오나르도는 새장에 갇힌 새를 풀어줄 정도로 동물이 느끼는 고통을 이해했으면서도 전쟁에 활용될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구상했다. 우리는 이들의 이중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들과 다른 길을 혼자 외롭게 걸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까, 아니면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에 손가락질해야 할까. 두 거장에 대한 평가는 그들의 삶과 예술을 충분히 이해한 독자들의 몫이다.
[1] 츠베탕 토도로프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290쪽
[2]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