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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류재화 옮김 / 아모르문디 / 2017년 8월
평점 :
말과 글, 그림과 사진 중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은 단연 그림과 사진이다. 고야(Goya)의 판화 작품 『전쟁의 참화들』이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하게 전쟁의 참혹상을 보여주는 까닭이기도 하다. 참상의 한복판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대하여 우리의 뇌는 분노로 대응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신경을 자극할 때 우리는 관음증적인 쾌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남의 고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틀림없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자극적인 이미지로 변환되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시대를 경고했다. 그녀의 경고는 현실로 굳어졌다.
폭력과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전쟁의 참화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전쟁의 참화들』은 절대로 편하게 볼 수 없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폭력과 광기가 어둠의 무게로 덧칠해져 있는 절망적인 보고서이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는 고야를 ‘괴물’이라고 평가했다. 가세트의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고야가 잔혹한 도상을 그리는 일을 즐기는 악취미를 가졌다고 오해할 수 있다. 고야는 괴물이 아니다. 고야의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야말로 괴물이다. 판화 속 인물들은 이성이 벗겨진 상태다. 전쟁의 만행과 학살은 이성 뒤에 가려진 인간의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고야는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을 괴물로 보고 이를 화폭에 생생하게 담아낸 최초의 화가였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는 고야의 그림 속에서 ‘사상’을 추출한다. 그림에서 사람과 사물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고, 빛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를 비추며, 인물의 표정이나 팔다리 그리고 몸의 자세는 어떤가에 사실 많은 것이 들어있다. 거기에는 화가의 기술적 숙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관심이나 성격 그리고 문제의식까지 배어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림 속에 배어 있는 화가의 흔적, 즉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게 고야의 그림에서 보아야 할 고야의 ‘사상’이다. 토도로프는 고야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사상’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고야, 계몽주의 그늘에서》(아모르문디, 2017)는 계몽주의 시대를 진실 된 눈으로 바라보고 그린 사상가로서의 고야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책이다. 따라서 고야를 '붓을 쥔 사상가'라 할 수 있겠다.
고야는 일찍 실력을 인정받아 꽤 젊은 나이에 왕가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전속 궁정화가가 됐다. 고야가 궁정화가로 활동하는 동안 유럽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순탄한 삶을 살았지만,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혁명의 이상에 끌려 있던 고야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원인 모를 병으로 청력을 잃어 귀머거리가 됐다. 깊은 상실감에 빠진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으로 알려진 저택에서 어두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귀머거리가 된 이후로 고야가 광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그를 ‘미치광이’로 규정할 수 없다. 또 검은색이 지배한 고야의 그림이 단지 ‘불편함’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예술혼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고야의 귀가 닫히는 순간, 그의 눈과 정신은 더 총명해졌다. 그렇게 고야는 다시 태어났다. 그는 혁명의 열기와 전쟁의 포화가 휘몰아치던 격변의 스페인 사회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냈다. 고야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민중을 유린하는 상황과 그에 맞서 대항하는 민중의 처절한 저항 의지를 『전쟁의 참화들』에 담아냈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그는 인간의 정신 속에 숨어있는 광기를 목격했다. ‘전쟁의 희생자’는 당연히 스페인 민중이다. 하지만 『전쟁의 참화들』은 전쟁의 희생자에 처한 고통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켜 적군의 추악한 행동을 고발하는 작품이 아니다. 고야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전쟁의 진실을 묘사했다. 고야가 목격한 전쟁의 진실은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말과 부합된다.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우리는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다.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이고 한 배를 탄 선원이다. 새로운 통합을 이루기 위해 문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문명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1]
고야는 건강하고도 합리적 이성을 예찬하는 계몽주의에 열광했다. 고야와 자유주의자들은 부패한 권력과 무지몽매한 종교를 반대했으며 계몽주의 사상의 진원지인 프랑스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헛된 희망이었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략은 건강한 이성을 믿었던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이 좌절할만한 희대의 사건이었다. 고야는 스페인 전역에 드리운 계몽주의의 그늘을 확인했다. 계몽주의의 그늘 속에 스페인과 프랑스, 두 문명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그늘이기도 하고, 고야가 그리고자 했던 ‘전쟁의 진실’이었다.
보기 불편하더라도 『전쟁의 참화들』은 인간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고야는 자신이 목격한 진실이 여전히 세상 곳곳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그리고 관람자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진다. 폭력을 부추기는 광기에 조종당한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뼛속 깊이 증오할 수 있는가?.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도 그 이미지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뇌리에 남아 다시금 느끼게 하고 또 돌아보게 한다. 도대체 이것이 인간인가?
[1]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06~207쪽
※ Trivia
미술관은 모든 사물을 벽의 쇠시리에 걸어 변형시킴으로써 미적인 관조의 대상으로 삼는데, 하물며 뒤샹의 <소변기>까지 그렇게 했다. (140쪽)
→ 저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번역가의 실수인가? 현대미술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소변기’로 보다니 유감스럽다. 이 작품에도 이름이 있다. 이 ‘소변기’의 이름은 『샘』(Fontai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