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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The Tombstone)
레이 브래드버리 作
번역: 정태원
출전 : 《공포특급 5 : 세계 편》 (한뜻, 1996) [1]
긴 여행과 작은 콧구멍을 간질이는 먼지와 T자형 포드 속에서 뼈가 드러난 몸을 흔들거리고 있는 오클라호마 출신의 그녀의 남편, 월터(Walter)가 처음에는 역겨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벽돌을 쌓아 만든 이색적인 마을로 들어가 숙소를 찾았다. 숙소의 주인은 두 사람을 작은 방으로 안내하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휑뎅그렁한 그 방 가운데 비석이 서 있는 것이다.
레오터(Leota)는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을 보이다가 곧 놀라 숨을 멈추는 모습이었다. 생각이 악마적인 속도로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레오터는 월터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미신에 푹 빠져 있다. 그녀는 숨을 죽이며 뒷걸음쳤고, 월터는 무거운 눈꺼풀이 덮인 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싫어, 싫어요.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방을 쓰는 건 딱 질색이에요.”
레오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레오터!”
월터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주인이 물었다. “부인, 설마 그런…‥.”
레오터는 속으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물론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오클라호마 사내인 남편에 대한 레오터의 유일한 무기다.
“죽은 사람과 함께 함께 자기 싫어요. 이 방에서 비석을 들어내요!”
월터는 푹신한 침대를 피곤한 듯이 쳐다보았다. 레오터는 남편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신이 났다. 확실히 미신이란 편한 것이다.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석은 회색 대리석으로는 최고급품입니다. 휘트모어 씨(Mr. Whetmore)의 소유물입니다.”
“돌에 새겨진 이름은 하이트(Hite)인데요.”
레오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 사람을 위해 조각한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은 죽었습니까?”
레오터가 묻자 주인을 고개를 끄덕였다.
“자, 보세요!”
레오터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방을 찾아 헤매 다닐 기운은 없다는 듯이 월터는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묘지와 같은 분위기야.”
레오터는 그렇게 말하고 월터의 눈에는 단호한 빛을 보았다. 주인이 설명했다.
“앞서 묵은 휘트모어 씨는 견습석공이었어요. 처음 맡은 일이 이 비석이었는데 매일 밤 7시부터 10시까지 끌을 휘둘렀죠.”
“그래서요?” 레오터가 흘끗 방을 둘러보고 휘트모어의 자취를 찾더니 계속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죠? 죽어버렸나요?”
그녀는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아니오. 의욕이 없어져 봉투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버렸습니다.”
“왜요?”
“해고되었거든요.”
주인은 대리석에 조각된 문자에 손을 갔다 댔다.
“이 이름은 하이트죠. 철자가 틀렸어요. 화이트(White)로 해야 할 것을 말이에요. 가엾은 사람이에요, 휘트모어 씨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해고당하고 말았어요.”
“나는 어쨌든 좋소.”
월터는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가 레오터에게 등을 돌리고 빛이 바랜 갈색 여행 가방을 열기 시작했다. 주인은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휘트모어 씨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어요. 매일 아침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끓이는데 커피를 한 스푼이라도 흘리는 것도 휘트모어 씨에게는 굉장한 일입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전부 던져버리고 며칠씩이나 커피를 안 마시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뭔가 실수했을 때 그 낙담하는 모습은 정말 딱하답니다. 항상 오른발부터 신던 신발을 왼발부터 먼저 신어버리면 다시는 신발을 신지 않을 것처럼 10시간이건 12시간이건 맨발로 있습니다. 아무리 추운 아침에도 말이죠. 그래서 이름의 철자가 틀린 편지라도 오면 ‘수취인 불명’이라고 봉투에 써서 다시 우체통에 넣어버려요. 휘트모어 씨는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핑계로 제 기분이 달라질 것 같아요?”
레오터는 차갑게 말했다.
“월터, 당신 뭐 해요?”
“옷장에 당신의 실크 드레스를 걸고 있어. 빨간 드레스 말이야.”
“그만둬요. 이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여자란 왜 이리도 멍청할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인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휘트모어 씨는 여기서 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식료품 가게에서 칠면조를 사오는 동안에 그 사람은 트럭을 빌려 비석을 이 방으로 가져왔어요. 내가 돌아왔을 때는 아래층에서 이미 대리석을 조각하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너무나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나도 불평 한마디 못했습니다. 너무 신이 나서 일하다가 철자를 틀려버리고는 그대로 한마디도 없이 방에서 뛰쳐나가버린 거죠. 방세는 화요일까지 지불되었지만 다시는 이 방에는 들어오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내일 아침 우선 트럭으로 운반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에요. 그러니 하루쯤 옆에 두어도 괜찮겠죠?”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레오터? 이불 안에까지 죽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니야.”
말투가 너무나도 강압적이라 레오터는 월터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 레오터는 남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표정이 더욱 굳어져버렸다. 그리고 주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불평했다.
“당신은 돈을 벌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월터, 당신은 자고 싶은 거죠? 두 사람 모두 ‘나가자’는 말을 못하도록 말이에요!”
월터는 질린 얼굴로 주인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 동안에도 레오터는 계속 떠들어댔다. 주인도 마치 그녀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 무시하고 편히 쉬라고 했다.
“거짓말쟁이!”
레오터는 문을 닫고 나가는 주인을 향해 소리쳤다. 월터는 옷을 벗자마자 침대로 들어갔다.
“서서 비석만 보고 있지 말고 불이나 꺼. 나흘간의 여행으로 너무 지쳤어.”
야무지게 팔짱을 긴 레오터의 팔이 평평한 가슴 위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함께 자는 건가.”
그녀는 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20분 후, 여러 가지 소리와 움직임에 견딜 수 없어 월터는 이불 아래서 독수리 같은 얼굴을 내밀고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끔벅거렸다.
“레오터, 아직 안 잤어? 아까부터 불 끄고 자라고 했잖아.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레오터는 무릎을 꿇고 붉은색, 하얀색, 분홍색의 윤이 나고 싱싱한 제라늄을 꽂은 화병을 돌 옆에, 그리고 또 막 꺾은 장미를 꽂은 깡통을 환상의 묘 앞에 놓고 있었다.[2] 마룻바닥에 있는 큰 가위는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그녀는 알록달록한 리놀륨 장판과 닳아서 귀퉁이가 다 떨어진 방석을 기분 좋게 쓸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곧 등을 펴고 죽은 사람을 모독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넘고 그곳을 멀리 돌아 방구석까지 갔다.
“이제 끝났다.”
레오터는 불을 끄고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러자마자 침대가 삐걱거리는 것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남편이 소리쳤다.
“도대체 어쩔 셈이야!”
남편의 목소리가 날아들자 주위의 암흑을 응시한 채 여자는 말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위에서 자고 있으면 누구든 편하게 잘 수 없어요. 그래서 주문을 걸어 꽃을 바치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 밤늦게 일어나 덜거덕거리며 돌아다니지 않도록 말예요.”
월터는 레오터가 응시하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았지만 적당한 대답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월터는 그저 혀를 차고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레오터는 월터의 팔꿈치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며 그의 귀에다 대고 겁먹은 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월터! 일어나요. 일어나.”
만약 필요하다면 한밤중 내내 남편의 기분 좋은 단잠을 방해할 셈이었다.
“왜 그래?”
“화이트 씨예요! 화이트 씨의 유령이 이 방에 나타났어요!”
“무슨 소리야. 잠이나 자!”
“거짓말이 아니에요. 들어보세요.”
월터는 귀를 기울였다. 리놀륨에서 아래로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분명치 않은 사내의 목소리가 슬프게 울렸다.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슬픈 목소리였다. 월터는 일어났다. 남편의 움직임을 알고 레오터는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들었죠, 들었죠?”
월터는 차디찬 리놀륨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아래층의 소리는 가성으로 변했다. 레오터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안 들리잖아.”
화난 듯이 월터가 말했다. 그리고 심장 고동이 들릴 정도의 고요 속에서 귀를 바닥에 붙였다.
“꽃을 쓰러뜨리면 안 돼요!”
레오터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
월터도 다시 긴장한 듯 듣고 있다가 욕을 퍼부으며 침대에 들어왔다.
“아래층에 누가 있어서 그래.”
월터가 투덜거렸다.
“그래요. 그게 화이트 씨라니까요.”
“아니야. 화이트 씨가 아니야. 우리들은 이 집 2층에 있잖아. 아래층에 누가 묵고 있어. 들어봐.”
아래층에서는 다시 가성이 들렸다.
“저건 부인 목소리야. 남편에게 다른 사람의 부인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잖아. 두 사람 모두 취해 있어.”
“거짓말 말아요!”
레오터는 억지 부리며 말했다.
“침대가 무너질 정도로 떨고 있으면서 허세 부리지 말아요. 유령이에요. 분명해요. 여러 가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요. 예전에 한론 할머니가 예배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검둥이하고 아일랜드 사람과 여자 두 명의 목소리와 청개구리 소리를 합친 목소리로 잘난 듯이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예요.[3] 죽은 화이트 씨가 오늘밤 여기에 온 우리들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들어보세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래층의 소리는 커졌다. 월터는 팔꿈치를 짚고 엎드려 포기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웃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웃을 기력조차 없었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 속에서 일어났어요!”
레오터가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일어났어요! 월터, 지금 여기를 나가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싸늘하게 식어 있을 거예요!”
다시 물건이 떨어지고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레오터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덤에서 나왔어요. 자유롭게 우리들 머리 위를 지나다니며 발을 쿵쿵 구르고 있어요.”
그때 남편은 옷을 다 입고 침대 옆에서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 건물은 3층까지 있어.” 셔츠 옷자락을 바지 속에 넣으며 월터가 말했다. “위층 사람들이 막 들어온 거야.” 그러나 울고 있는 레오터에게는 다시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리와, 올라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보자. 그러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서 취한 그 부인을 만나자구. 일어나, 레오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레오터가 비명을 지르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또 관 속으로 들어왔어요!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어요.”
월터는 불을 켜고 빗장을 끌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꽤 기분이 좋은지 춤을 추든 방으로 들어왔다. 사내는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와 주름살, 그리고 백발이 섞인 머리에 두툼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거 정말 실례합니다.”
작은 사내가 말했다.
“저는 휘트모어라고 합니다. 나갔다가 지금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놀랄 만한 행운을 만났답니다. 내 비석은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흘끗 돌에 눈을 돌렸다.
“아! 있다, 있어! 좋아. 이걸…‥.”
그리고 몹시 구겨진 모포 아래에서 엿보고 있던 레오터를 눈치 챘다.
“인부들이 손수레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곧 여기서 비석을 운반하고 싶습니다. 1분도 안 걸릴 겁니다.”
월터는 아주 반기듯 웃었다.
“저 물건이 나간다니 잘됐군요. 자, 어서.”
휘트모어 씨는 체격 좋은 우람한 두 명의 남자를 방으로 들였다. 그는 기대에 부풀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너무 놀랐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나는 자포자기한 패배자였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석이 작은 손수레에 실렸다.
“바로 1시간 전 우연히 하이트라는 사람이 폐렴으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이트 씨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화이트가 아니라 하이트란 말입니다. 그 사람의 부인을 방문하고 오는 참입니다. 부인도 이미 비석 준비가 되었다니까 기뻐하더군요. 어쨌든 하이트 씨가 죽은 지 1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휘트모어 씨와 월터가 웃으며 악수를 하는 동안 비석은 손수레에 실려 방에서 나갔다. 놀라운 일이 차츰 정리되는 것을 레오터는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모두 끝났어.”
휘트모어 씨의 모습 뒤로 문을 닫고 월터는 빙긋 웃으며 꽃은 세면대로 깡통은 휴지통에 버렸다. 암흑 속에서 월터는 레오터의 긴장된 침묵을 눈치 채지 못한 듯이 침대에 기어올랐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마디도 안하고 고독을 음미하면서 누워 있었다. 월터가 한숨을 쉬고 모포를 고쳐 덮어주는 게 느껴졌다.
“자자, 그 변변치 않은 것을 치워버렸어. 아직 10시 반이야. 잠잘 시간은 충분히 있어.”
월터는 희희낙락하며 레오터의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레오터가 입을 열었을 때 침대 밑에서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월터를 붙들고 의기양양하게 레오터는 외쳤다.
“어머, 또 그 소리. 우리 주위예요. 잘 들어보세요!”
월터는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더 설명해야 알아듣겠어? 당신, 머리라도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잘 들어봐요.”
레오터는 속삭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노크 소리는 아래층에서 들렸다. 문이 열렸다.
“아, 당신이군요. 휘트모어 씨.”
분명치 않은 희미한 여자 목소리가 멀리서 슬프게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침대 위에서 떨고 있는 레오터와 월터의 귀에 아래층 깊은 어둠 속에서 휘트모어 씨의 대답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하이트 부인. 비석을 가져왔습니다.”
[끝]
※ 안 봐도 되는 cyrus의 주석
[1] 도서 리뷰 (http://blog.aladin.co.kr/haesung/8452837)
[2] 제라늄과 ‘막 꺾은 장미’는 어디서 나온 걸까? 레오터가 꽃병에 담긴 꽃을 꺼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 꺾은 장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레오터는 장미꽃을 꺾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일까? 비석 때문에 벌벌 떨었던 레오터를 생각하면 밤중에 숙소 밖으로 혼자 나가 꽃을 구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3]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1940년대. ‘검둥이(Nigger)’를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절이다. 1840년대에 아일랜드인들은 대기근을 피해 바다를 건너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지에 이주했다. 이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핍박과 차별을 견뎌야 했다. 레오터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검둥이와 아일랜드인 사람의 목소리가 합친 것’이라고 포현함으로써 흑인과 아일랜드인에 대한 차별적인 감정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 《공포특급 5 : 세계 편》 (한뜻, 1996)
『비석(The Tombstone)』은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 1945년 5월호에 발표되었다. <위어드 테일즈>는 1923년에 창간된 미국의 펄프 잡지(pulp magazine)다. 이 잡지는 1954년 1월에 폐간되기까지 과학, 미스터리, 판타지, 공포 등 다양한 장르 소설들을 선보였다. 오늘날 SF, 판타지, 공포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잡지에 실렸다.
*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 2001)
* 《러브크래프트 전집 1~4》 (황금가지, 2009~2012)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2014)
*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황금가지, 2015)
<위어드 테일즈>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로버트 E. 하워드(Robert Ervin Howard),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등이 있다.
브래드버리는 1942년부터 <위어드 테일즈>에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위어드 테일즈>에 처음 실린 브래드버리의 작품은 『양초(The Candle)』다. 이 시기의 브래드버리는 공포소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어거스트 덜레스는 브래드버리에게 소설집을 발표해보라고 제안했는데, 덜레스는 잡지에 실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을 책으로 만드는 ‘아컴 하우스(Arkham House)’ 발행인이었다. 덜레스의 도움에 힘입어 나온 결과물이 <Dark Carnival>이다. 이 소설집은 브래드버리의 첫 번째 단편집이며 『비석』뿐만 아니라 다음에 소개할 『장의사(The Handler)』 등 <위어드 테일즈>에 실린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비석』은 거대한 비석이 놓인 방에 묵은 부부의 소동을 그린 이야기다. 부부는 방 아래층에 들리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흥분하고, 긴장한다. 월터의 아내 레오터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의 인물, ‘화이트’의 유령이 지나가는 소리라고 주장한다. 사실 아래층에 들린 소리는 자신이 제작한 비석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이동한 휘트모어 씨의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의 정체는 밤중에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 하이트 씨의 아내였다. 공교롭게도 ‘하이트’로 잘못 새겨진 비석의 주인은 부부 근처에 있었다. 하이트 씨 부부는 월터와 레오터 부부가 있는 방 아래층에 묵고 있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허무하다. 특히 원작을 TV 드라마로 각색한 <레이 브래드버리 극장(The Ray Bradbury Theater)> 6기 15화는 원작에서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원작과 드라마 판의 차이점은 드라마 판에 비석의 이름이 ‘화이트’라고 새겨진 것(남편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은 론 화이트), 백발의 휘트모어를 ‘머리가 벗겨진 인물’로 묘사한 점, 그리고 결말(원작과 '조금' 다르다. 유튜브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보시라)이다. <레이 브래드버리 극장>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총 6개의 시즌(season)으로 방영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즌 6 마지막 에피소드가 <비석> 편이다…‥.
레오터 역을 맡은 셜리 듀발(Shelley Duvall)은 스티븐 킹(Stephen King) 원작,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샤이닝(The Shining)>에서 광기 어린 소설가(잭 니컬슨 분)의 아내로 출연했다. 셜리 듀발은 스탠리 큐브릭 때문에 자신이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큐브릭은 영화 한 장면을 위해서 100번 넘게 촬영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의 최근 소식이 좀 안타깝다. 예전보다 TV나 영화 섭외가 줄어들었고, 정신병에 시달려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