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시계를 보며 말하는 토끼를 쫓아가다가 땅굴로 떨어진 후 겪게 되는 모험은 다양한 환상들을 창조해 내는 상상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 마틴 가드너 《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거울 나라의 앨리스》 (북폴리오, 2005)
* 루이스 캐럴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월의봄, 2015)
* 스테파니 로벳 스토펠 《루이스 캐럴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나다》 (시공사, 2001)
* 미셸 투르니에 《미셸 투르니에의 푸른 독서노트》 (현대문학, 2008)
* 다니엘 지라르댕, 크리스티앙 피르케르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미메시스, 2011)
하지만 캐럴이 유난히 여자아이들에 집착했던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캐럴은 어린 소녀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 그가 가장 좋아했던 소녀가 앨리스 리들(Alice Liddell)이었다. 이 소녀는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대학 학장의 둘째 딸이었다. 캐럴은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의 수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학장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장의 세 딸과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이때 당시 캐럴의 나이는 30세, 앨리스 리들은 10세였다. 캐럴은 학장의 세 딸과 보트를 탈 때마다 자신이 지어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앨리스 리델이 그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한 계기로 위대한 작품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는지 여부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캐럴은 소녀들의 부모에게 동의를 받고, 소녀들의 누드 사진을 찍었다. 이를 놓고 어린 소녀에 대한 캐럴의 관음증을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캐럴이 ‘계집아이들에 대한 이상한 열정’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미셸 투르니에 : 61쪽) 투르니에의 해석에 따르면 캐럴은 리들이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는 과정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소녀와의 순수한 우정(캐럴이 소아성애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소녀와의 우정을 ‘비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이 변하기 때문이다. 투르니에의 해석은 틀린 말이 아니다. 캐럴은 아이들을 신이 빚어낸 순결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캐럴의 ‘이상한 열정’은 단순히 작가 개인의 성적 취향으로 보기 어렵다. 아이를 순수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통념이었다. 캐럴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작가들도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고, 어린이 누드 사진이 있는 연하장이 나오기도 했다. (스테파니 로벳 스토펠 : 40, 41, 46쪽)
* 피치 핏 《로젠 메이든 신장판》 (학산문화사, 2013)
캐럴은 분명 ‘이상한 나라(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수학자’다. 그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앨리스와의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고, 앨리스를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의 2인조 만화가 그룹 피치 핏(PEACH-PIT)의 《로젠 메이든》은 캐럴과 앨리스와의 기묘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만화이다. 사실 이 만화를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설정을 확인할 수 있다.
로젠은 신비한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로젠 메이든’이라고 알려진 인형들을 만든다. 그가 만든 인형이 스이긴토(제1인형), 카나리아(제2인형), 스이세이세키(제3인형), 소우세이세키(제4인형), 신쿠(제5인형), 히나이치고(제6인형), 키라키쇼(제7인형)다. 로젠 메이든은 특별하다. 등에 태엽을 감아주면 인간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로젠 메이든이 눈을 떠서 살아 움직이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잔인한 게임’에 돌입한다. 그 게임이 바로 ‘앨리스 게임’이다. 슬프게도 로젠 메이든은 서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엘리스 게임’에 승리해서 살아남은 인형은 ‘앨리스’가 된다.
‘앨리스’는 로젠이 만들어낸 ‘완벽한 소녀’를 상징하는 이상형이다. 그래서 인형들은 자신을 만들어 준 로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만나기 위해 ‘앨리스’가 되려고 한다. 앨리스 게임에 집착하는 인형은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인형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로젠의 ‘이상한 열정’이 인형 자매들을 고생하게 만든 셈. 아무리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고 해도 로젠의 기이한 욕망이 만들어낸 앨리스 게임을 생각하면 자매 같은 인형끼리 싸우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 만화의 남자 주인공 사쿠라다 준도 앨리스 게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제5인형, 그러니까 로젠이 다섯 번째로 제작한 로젠 메이든 신쿠는 로젠이 가장 아끼는 인형이다. 그래서 제1인형 스이긴토는 자신에게는 한참 아래인 동생이나 다름없는 신쿠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것을 싫어해서 신쿠를 질투한다. 신쿠와 스이긴토는 잘못된 악연으로 인해 앙숙 관계가 된다. 묘하게도 캐럴은 학장의 세 딸 중 유독 둘째 딸 앨리스를 편애했다. 캐럴의 소설에 나오는 앨리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실제로 세 자매는 두 마리의 얼룩 고양이를 키웠다. (마틴 가드너 : 74쪽) 그런데 앨리스가 될 가능성이 높은 신쿠는 고양이를 엄청 싫어한다.
루이스 캐럴과 로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몰랐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란 없다는 점. 완벽함에 대한 추구가 지나칠수록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 수 있다. 캐럴과 앨리스 리들의 관계가 어떠한 이유로 깨졌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완벽한 소녀’를 꿈꾼 캐럴의 ‘이상한 열정’이 소중한 우정을 한순간에 깨뜨린 원인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로젠은 ‘자신만의 앨리스’를 만나기 위해 로젠 메이든을 제작했다. 그렇지만 로젠이 원하는 ‘앨리스’는 없다. 로젠의 사랑을 얻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서 자매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규칙의 앨리스 게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제로섬 게임(zero sum)이다. 현실에 동떨어진 사랑은 반드시 집착을 동반한다. 그리고 왜곡된 사랑의 최후에는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