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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사전
빈 성과학연구소 / 강천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성(性, sex)에 대한 화두는 언제나 뜨겁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흔히 성을 쑥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한자의 성(性, 성 성)은 마음(心, 마음 심)과 몸(生, 날 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성을 뜻하는 한자는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의미한다. 성이란 단순한 성행동이나 육체적인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정신과 함께 결합하여야 하는 생명 그 자체다. 왜곡된 성 의식을 조장하는 음란물의 영향 때문에 성은 ‘외설’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되었다.
빈 성과학 연구소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4년간 편찬한 《성학 사전》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문명과 함께해 온 성의 모습을 담아낸 이색적인 출판물이다. 《성학 사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문화사」 편을 시작으로 일 년마다 후속편이 나왔다. 2부 「문학 · 미술」 편, 3부 「성 과학」 편, 4부 「보충」 편 순으로 완성되었다. 《성학 사전》 집필진 중에 유명한 사람이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다. 라이히는 처음으로 오르가슴(orgasm) 개념을 제시한 정신분석학자다. 1부를 구성하는 항목 수는 총 943개. 국내 번역본은 1부를 번역한 것이다. 번역본은 236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자가 무작위로 선정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서 수위 높은 내용의 항목과 도판 일부가 제외되었다. 항목 배열은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다.
화보와 도판은 각국의 성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 사진, 조각품 등으로 꾸며졌다. 90년대식 책이 늘 그래왔듯이 《성학 사전》도 처음에 천연색 화보로 시작해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제일 중요한 본문부터는 흑백 화보가 나온다. 표현 수위 때문인지 사진 속에 있는 남근을 블러(blur) 형태로 처리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만든 걸작 『다비드』의 남근도 블러 처리를 피하지 못했다. 블러 처리의 기준이 모호하다. 도판 중에는 남근 모양으로 된 부적이 있는데, 그것은 블러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보와 도판이 다소 낯 뜨겁게 보일 수도 있지만, 외설적인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성이 인류의 생활에 직결된 자연스러운 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들이다. 이를 꼭꼭 숨기고 금기로 여기다 보니 외설스럽게 여겨질 뿐이다.
하나의 문명, 문화로서 성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성학 사전》 편찬은 위대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20세기 초 유럽인들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있으며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도 있다.
교황 요한 23세의 비서가 스위스 온천장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편지에 재미있는 것이 씌어져 있다. 그중에 온천장에서 여행을 좋아하는 방탕아를 그린 문구가 실려 있다.
"석녀에게는 온천이 제일 좋아요. 온천만으로는 안 돼도 낯선 손님이 아이를 생기게 해주니까요."
이 글은 상당히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임여성은 온천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목욕> 항목, 108쪽)
‘목욕’ 항목을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항목 작성자는 성적 유머를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문신> 항목에서는 바디페인팅을 ‘어리석은 유행’이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어떤 항목에는 작성자의 주관적인 생각 및 판단이 개입된 내용이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민족의 성 풍속 및 문화를 조악하고 낙후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또, 그들을 가리킬 때 ‘미개 민족’이란 단어를 자주 썼다.
둔부 입맞춤은 많은 아시아 종족 사이에서는 복종의 표시로 행해진다.
(<둔부 입맞춤> 항목, 75쪽)
‘둔부 입맞춤을 하는 아시아 종족’이 누구일까. 이 문장에 문제가 있다. ‘많은 아시아 종족’이라는 표현이 눈에 걸린다. 이 표현 때문에 둔부 입맞춤이 아시아 전체에 통용되는 풍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학 사전》은 서구 제국주의 시선으로 비서구인들의 성을 ‘미개한 수준’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 백과사전에 ‘호텐토트(Hottentot)족’으로 알려진 코이(Khoi) 족 관련 내용도 있다. 사전에 따르면 호텐토트족 여성의 거대한 엉덩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호텐토트족 여성들이 엉덩이에 유아를 태운 채 가사 일을 보느라 엉덩이가 압박과 자극을 받아 점점 커지게 됐다고 한다. 신빙성이 부족한 설명이다. 유럽인들은 호텐토트족을 ‘인간’이 아닌 ‘하등동물’로 취급했고, 그들을 사로잡아 동물처럼 구경하고 성적으로 착취했다. 성 백과사전 집필진들은 호텐토트족 여성을 ‘관찰’하는 대로 묘사했다.
과연 《성학 사전》을 뛰어넘는 성 백과사전이 나올 수 있을까. 종이로 인쇄된 ‘브리태니커(Britannica)’를 볼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제 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위키피디아(Wikipedia)로 향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자유롭게 ‘항목 작성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출처가 불명확하고 미심쩍은 성 관련 정보가 얼마든지 공개될 수 있고, 검색에 익숙한 아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성 백과사전을 만들려고 해도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집필 활동 착수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