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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캐롤린 라마자노글루 지음 / 문예출판사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무슬림 여성들은 다양한 종류의 ‘스카프’를 착용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스카프는 국가와 민족에 따라 그 명칭과 모양이 다소 다르다. 크게 히잡(hijab), 질밥(jilbab), 니캅(niqab) 등이 있다. 이 세 가지 스카프는 머리와 얼굴을 가린다. 머리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것은 부르카(burka)다. 이란에서는 차도르(chador)라고 부른다. 무슬림 여성들의 관점에서 그녀들이 히잡을 착용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히잡은 식민지 세력에 반대하는 저항의 상징이다. 특히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많은 여성이 히잡 착용을 선호했고, 무슬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전통적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무슬림 여성은 성적인 유혹을 피하고, 정숙하게 보이도록 얼굴을 가리기 위해 히잡을 착용한다. 이 점에서 히잡 착용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이슬람문화에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방어수단이다.
오늘날 이슬람권에서도 여성들의 인권 보호나 사회참여 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히잡을 비롯한 전통의상이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이라 하여 착용하지 않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슬람권에서는 아직도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들이 노출방지를 위해 히잡을 착용하도록 하고 있다. 히잡이 여성 억압의 상징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의 견해와 문화적 전통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하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무슬림 여성이다. 여성의 계층은 히잡의 종류 또는 옷차림 등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려는 상류층 무슬림 여성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기 어렵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는 아직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주민들이 가져온 이슬람 문화 중 우리 사회의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다문화사회의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구 중심의 페미니즘만을 지향해선 안 된다. 인종 및 문화적 순혈주의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협력적 규범, 열린 마음, 인간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엄성에 대한 인정 등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좀 더 급진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한다. 백인 중산층 여성이 주도한 급진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을 주도한 바버라 스미스(Barbara Smith)는 모든 여성을 포용하지 못한 급진적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급진적이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의미한다.
“내가 정말로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인종, 성, 계급, 성적 정체성 모두를 단 한 번에 다루려는 적이 더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전에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216~217쪽)
급진적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바버라 스마스의 입장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내부 모순을 확인한 벨 훅스(Bell Hooks)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벨 훅스는 아프리카의 할례 의식을 아프리카 여성을 억압하는 미개문화로 규정하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식민지주의의 그늘에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여성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에 대해 공통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방식이 달랐다.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의 저자 캐롤린 라마자노글루(Caroline Ramazanoglu)는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division)’을 해소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분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보이지 않는 ‘분리’를 해소하지 못하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조차 페미니즘을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면 ‘내부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특권층 여성은 남성 중심의 기득권사회에 안주한다. 그녀들은 페미니즘 운동에 소극적이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는 강하다(Sisterhood is Powerful)”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나 기득권층의 권력에 익숙해진 일부 여성들은 이 구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가 남성 권력을 가능하게 해주며 여성을 억압하는 ‘보편적 문제’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는 약점이 있다. 가부장제는 남성 권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부장제에 여성 권력도 포함된다.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이 계급 · 인종 · 문화 등을 기준을 내세워 또 다른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1] 그러므로 가부장제를 비판하려면 좀 더 다각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캐롤린 라마자노글루는 가부장제를 단순하게 바라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해석이 급진적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약화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남’은 여성을 혐오하고, 페미니스트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남성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적합하지 않다. 여성 혐오 남성이 한국에만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성 혐오 남성들이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다. 여성 혐오는 한국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어딘가에서 지금도 각종 혐오 범죄가 발생한다. 미국은 심각하다. 매년 유색 인종 여성과 소녀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유색 인종 여성이 백인 여성보다 더 많이 경찰 공권력에 희생당한다.[2] 현재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급을 떠나서 모든 여성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한 여성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7) 서평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남성과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여성 혐오와 여성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모든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르면서 등 돌릴 수 없다. “오빠들이 허락한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라고 주장하는 메갈리아들이 있다.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메갈리아를 ‘가짜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메갈리아들이 남성의 연대를 환영하는 페미니즘을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여 비난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여성의 입장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페미니즘 지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페미니즘을 ‘가짜 페미니즘’으로 오해하거나 비난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페미니스트가 또 다른 페미니스트를 의심하고, 서로 싸우는 일이 지속한다면 모든 여성이 인정하는 페미니즘으로 발전할 수가 없다.
[1] 부르주아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간의 계급 차이가 극심했던 19세기 영국 사회에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 영국 사회를 고찰한 필자의 졸문 [“왓슨, 하녀를 해고하지 말게.”]을 참고하면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2] [“여성 행진”의 선언 원칙] (ㅍㅍㅅㅅ, 2017년 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