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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조직적으로 국민을 관리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10년 불황에 못 견딘 일본 사회도 천황제와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극우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이른바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일정 부분 전체주의로의 회귀심리다.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자유주의를 우리는 당연하고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개인의 자유가 거의 부각되지 않았던 부족공동체 시절부터 오랜 역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등장했고 최근에야 획득된 삶의 방식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판은 인류 정치사를 전제군주제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보는 전통적 기술방식 대신 전제군주제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플라톤(Plato)은 국가가 정의 · 선(善) · 덕(德)을 토대로 할 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도자는 방향을 제시하는 자가 되어야 하므로 국가 장래에 도움이 되는 ‘목적’, 즉 정의, 선,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는 위태롭다. 그렇지만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에는 정치공동체의 부활에 대한 깊은 소망이 담겨 있다. 플라톤의 목적주의 국가론은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적 독립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이다. 칼 포퍼(Karl Popper)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을 ‘유토피아적 공학(utopian engineering)’으로 이름 붙이면서 사실상 전체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유시민은 홉스(Hobbes)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통치술이 서로 잘 어울리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절대왕정의 역할에 힘을 실어 준 두 사람의 정치사상은 국가주의 국가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후, 군주들은 국가 존속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모든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국가주의 국가론은 목적주의 국가론에서 파생된 이론이다.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하여 국가가 모든 종류의 정의와 불의에 대한 해석을 독점해야 한다. 홉스가 생각하는 국가의 목적은 사회 내부의 무질서를 방지하고,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재 의의는 있을 수 없다. 자기 보전을 지향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에 동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와 홉스 등에 의해 강화된 지도자는 지상의 절대적 궁극목표로서 신(神)을 대체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존재 및 역할 자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 이론도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Marx)는 국가가 소멸하여 특권계층과 지배계층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의 연합체가 들어서는 것으로 예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반 개인주의적 입장을 보인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위계질서 회복이 아니라 개개인의 평등을 위해 공동체를 주장했지만, 나중에 소련 등 사회주의 전체국가들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다.
전체주의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안정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시켜 지도자의 무한 권력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개인의 자유 보장은 국가 중심의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국가가 국민의 신념을 ‘그르다’고 평가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옳은’ 이념을 주입하고자 하는 국가주의 국가론이야말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다. 2017년 3월 10일 우리나라는 헌정사상 유례없는 ‘대통령 파면’ 결정을 확인했다. 민중의 힘으로 권력을 오 · 남용한 지도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린 과정을 지켜본 저자는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혼란으로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를 추스를 수 있는 대안의 국가론으로 자유주의 국가론을 제시한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오래 살아남겠지만 사회적 · 기술적 분업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지고 정보통신기술과 지식혁명이 진전될수록 기반이 점차 약해질 것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이 위축되면서 생기는 담론시장의 공백을 채울 다른 유력한 국가론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담론은 자유주의 국가뿐이다. (79쪽)
역시 ‘프티부르주아 리버럴(petit bourgeoisie liberal, 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다운 저자의 생각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약해질 것으로 보는 저자의 전망에 동의할 수 없으나 그가 정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주의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날의 자유주의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용어로 자주 쓰인다. 특히 시장경제를 전파하는 친 기업단체 자유경제원이 거의 자유주의를 독점하다시피 전파하는 바람에 누군가가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하면 그쪽 단체와 연관된 이데올로그(Ideolog)로 오해한다. 자유주의는 국가에 소속되는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민중에 뿌린 사상이다. 오로지 재벌 중심의 자유 시장경제를 지키려는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빌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한다. 특정 권력에 기대면서 자신과 다른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억압하는 그들은 우파도 아니며 자유주의도 아니다.
유시민은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 및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진 민주주의도 언제든 중우정치와 조작된 여론에 함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급기야 대중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다른 쪽 극단인 전체주의를 향해 질주하기조차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동 정치가, 아첨하는 정치꾼,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인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 탓만 할 일은 아니다. 정치는 지식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폐해에 대한 일부 비판 때문에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에는 이를 방지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있다. 바로 표현의 자유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으뜸가는 원칙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 유권자들이 할 일이다. 우리는 전보다 더 강력해진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자유주의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숙고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냉소하는 낡은 힘을 물리칠 시기가 온 것 같다.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러보낸다면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약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