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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ㅣ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인간은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 문인수의 『중력』은 우리 삶의 안정감을 유지해주는 특별한 중력이다. 그 힘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세월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월은 살아있는 존재 위에 올라타게 되는데, 삶을 내리누를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기 귀찮아지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만성적인 게으름은 몸과 생각을 점점 처지게 한다.
내리누르는 힘은 바쁘다. 내리누르는 힘, 식성은 연속,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든 이름 위에 있다. 말 탄 세월은 그러나, 그러니까 사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저 모든 이름을 내리누르는 중이다. 중력, 그것은 그 무엇보다 무거워 무게가 없는 것. 그래, 당신의 눈시울이며 볼이며 목덜미며 뱃가죽이, 말투며 기억력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더 처지는 것이다. 지금은 비애가, 그 쭈글쭈글한 성욕이 너풀거린 활엽의 황홀을 뒤덮고 있다. 먹어라, 저 세월. 어떤 나무를 시퍼렇게 뒤덮은 칡넝쿨 속으로, 그걸 또 붉게 뒤덮는 저녁노을 속으로 누가 또 한바탕 새떼를 쏟아붓는다. 그럴 때, 제때 어둠이 오고, 그 어둠 위에 별들의 뾰족뾰족한 부리가 또 총총총총 올라타는 것이다. 오, 여명이 녹여 먹는, 여위는 별들…‥
(『중력』 중에서, 18~19쪽)
삶의 중력을 거스르는 유일한 사람이 나그네이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여행자이다. 그들이 집을 떠나 맞닥뜨리는 놀라운 세계에 매혹되곤 하지만, 그들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까 봐 내심 두려워한다. 낯선 곳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나’를 대면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데 대해 근원적 공포를 느낀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가끔은 한 사람의 나그네처럼, 그런 외로운 여행을 즐겨도 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불안해 보이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는 일상에 탈출하는 존재의 여정을 노래한 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도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72~73쪽)
시인은 홀로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처음 떠나는 곳은 언제나 낯선 곳이고, 여행은 늘 혼자이며 고독한 것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기꺼이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여행이다. 시인은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더 외롭고 낯선 곳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아무 데나 가본 행선지가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해도 나와 무관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시인의 인생과 여행, 그리고 시는 뒤엉킨 한 몸이고 한 뿌리다. 시인의 여행이란 그저 길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과 구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숲에서, 바다에서,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은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있다. 굳이 수첩에 적지 않아도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 적는다. 마음이 받아 적은 것들은 언젠가 시가 되고, 행복한 기억이 된다. 설령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만으로 충분하다. 오랜 옛날부터 김삿갓 같은 시인들이 방랑에 탐닉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숨겨진 모험심과 새롭게 은유하고 싶은 감정을 자극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여행’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식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일상’이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