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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것의 생물학 -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기관으로 읽는 20억 년 생명 진화 이야기
김홍표 지음 / 궁리 / 2016년 12월
평점 :
대변은 소화되다가 남은 찌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대변의 절반은 세균 덩어리다. 또 대변의 구린내는 음식물이 썩어서 그럴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그 세균들이 뿜어내는 냄새다. 이 세상에 약 10만 가지가 넘는 세균이 있다. 이 중에서 약 수백 종류의 세균은 우리 몸속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세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아늑한 집이다. 소화관에 사는 장내 세균은 인체 내 세포의 개수보다도 많다. 이 세균은 수백만 년 동안 사람과 공생 관계를 이루며 진화해 마치 장기처럼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세균을 ‘공생 세균’이라 부른다.
몸에 이로운 세균들은 우리의 소화를 도와준다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라 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선 공생 세균이 없으면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가 먹는 음식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효소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다. 장내 세균이 음식 중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중 많은 부분을 분해한 다음에야 인체는 이들 영양소를 흡수할 수 있다. 또한, 세균은 비타민과 장 내 염증을 억제하는 화합물 등 인간이 생산하지 못하는 유익한 물질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미생물과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음식물을 잘 소화하게끔 20억 년 동안 진화해왔다. 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의 《먹고 사는 것의 생물학》은 우리 몸의 소화기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진화의 유산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생물학 전문 용어가 등장해 중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되새겨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책은 진화와 소화기관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생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우유를 마셔서 소화할 수 있는 이 사소한 생리현상도 진화의 결과이다. 인간은 젖당 분해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젖을 뗌과 동시에 유아기의 소화 시스템을 버리게 돼 있어서 성인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한다. 인간이 젖소에서 얻는 우유를 새로운 영양원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이제는 대부분 인구가 평생 젖당을 분해하는 효소를 가지게 된다.
입에서 나는 악취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원인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흔히 입 냄새라고 말하는 이 신체적 증상에도 병명이 있다. 생선 냄새 증후군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트리메틸아민(trimethylamine)이 몸속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생기는 병이다. 소화가 덜 된 트리메틸아민은 땀이나 침, 내쉬는 숨, 소변 등으로 배출된다. 트리메틸아민 자체가 생선 비린내를 풍기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몸 전체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 생선 냄새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는 FMO3라는 효소이다. 그런데 간세포에 문제가 생기면 FMO3 효소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음식에서 주로 발생하는 트리메틸아민이 제대로 소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돌연변이 효소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된다. 이들의 양을 줄이려면 장내에 메탄 생성균의 수를 늘려야 한다. 메탄 생성균은 트리메틸아민을 메탄으로 환원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저자는 소화기관을 필요한 미생물을 종속 영양 생명체라고 말한다. 하나의 개체단위로 스스로 생장 증식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우리가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미생물은 몸속 물질과 거처를 받는 대신 숙주를 먹이고 보호한다. 평소에는 내 삶의 반려자이자 협력자이다가 내가 약해지면 나를 공격하기도 하는 것이 내 몸의 미생물이다. 우리 몸과 미생물 간의 미묘한 견제와 균형이 깨지면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없게 되고, 악화하면 병이 나타난다. 한 명의 인간이 도저히 살아낼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살아오며 진화를 거듭해온 미생물은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종속 영양 생명체가 없었다면 지구상에는 진핵생물이 생겨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경쟁보다는 공생이 인류가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제일 나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