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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나무의 추억 ㅣ 민음의 시 61
박진형 지음 / 민음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박진형 시인은 현재 대구시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도서출판 만인사 대표이기도 하다. 만인사는 유병찬님(a.k.a yureka01)의 《소리 없는 빛의 노래》를 펴낸 곳이다. 박진형 시인은 198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94년 첫 시집 《몸나무의 추억》을 발간했다. 시집을 펴낸 출판사는 민음사다. ‘몸나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집의 제목이 눈에 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봄나무’로 착각할 수 있다.
우리는 가지가 꺾였거나 말라 죽은 나무를 보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무생물’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나무의 생명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나무는 여전히 버섯이나 박테리아와 반응하면서 분해를 통해 흙으로 돌아가는 나름의 길을 계속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생태계 순환에 기여하는 나무의 모습은 생명의 힘을, 그 궁극의 힘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일, 절창 끝에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기억하는 일. 그런 작업이 시인의 몫이다.
나는 꽃 피는 몸나무이다
한 번도 꽃 피지 않은
몸나무의 추억이다
새로 어린 나무를 옮겨 심은 뒤
물을 뿌리며 나도 꽃 피던 몸나무인가
딱딱한 껍질을 초록 이빨로 깨물어
연한 기쁨의 상처를 만드는
나무는 즐거울거야. 내 몸도 덩달아
잎 밀어낼거야. 수돗물에서
외눈박이 도깨비들이 투당탕
튀어나온다, 없는 손마다 페놀방망이
수은방망이 납방망이 카드뮴방망이를 들고
닫힌 집들의 창자를 요란스레
두들기도 다니는
몸이 가렵다, 부스럼딱지가 숭숭 돋고
손톱이 할퀴고 간 꽃 진 자리마다
희디흰 거품 피가 묻어난다
마음의 문고리를 흔드는
한때 꽃 피던 몸나무의 시절은
육각수(六角水)의 집인가
무지막지한 시간에 시간(屍姦)당한
쿵쾅 도깨비가 뛰어다니는
봄에도…… 꽃 피지 않은…… 몸나무는
꿈꾸는 힘으로 버팅긴다
(『몸나무의 추억』 28~29쪽)
고통과 절망 뒤에는 회복력과 희망이 생기는 법.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의 손길보다 훨씬 빠르다. 몸나무의 껍질에 생긴 상처에는 희디흰 수액이 아닌 푸르른 생명력이 흘러나온다. 상처에 새살이 돋듯 ‘기쁨의 상처’는 싱그러운 꽃으로 덮인다. 푸릇푸릇한 잎새가 자라는 데 방해하는 페놀, 수은, 납 등은 나무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페놀 방망이’는 대구 · 경북 지역민들에게 물 오염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은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의미한다. 오염된 수돗물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물이다. 죽은 물을 흡수해 독소가 축적된 몸나무는 생명력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군중을 넘어 가장 바깥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자아, 즉 나무를 응시했던 시인은 절망을 느끼되 굴복하지 않는다. 몸나무는 꽃을 피웠던 추억을 되살려 생의 맥박이 끊어지지 않도록 버틴다. 고통의 시간이 오히려 강인한 생명력을 촉발한다.
시집의 추천사를 쓴 이하석 시인은 박진형 시인을 가리켜 ‘식물적 상상력의 시인’으로 소개했다. 박진형 시인의 식물적 상상력은 지나치게 관념적이지 않다. 식물적 상상력은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풍요롭게 하는 회복제이다. 시인은 상상력으로서의 생명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나무와 같은 친숙한 자연의 소재들을 선택했다. 『돌배나무는 불구가 아니다』에서 돌배나무를 친친 감싼 철사는 나무의 생명력을 서서히 파괴한다. 돌배나무를 기르는 김씨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숨쉬기 어려운 통증이 엄습한다. 김 씨가 체험하는 식물적 상상력은 파괴적인 충동이 아니다. 김 씨는 자연마저 파괴해버리는 폭력이 인간성마저 파괴하는 것들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가 기르는
돌배나무는 베란다에 혼자 나가
가을비에 흠씬 두들겨 맞았다
철사에 온몸에 감긴 채
잎과 꽃을 지우고
거짓말처럼 탐스런 돌배 두어 개
허공에 매달아 두었다
자라지 않는 몸을 하고
행상에서 돌아온 김씨는
날마다 우우 고함을 지른다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싶어싶어
목청껏 소리를 질러도
발음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때로 생각난 듯
철사에 친친 몸이 감긴
나무에게 희망의 소다수를 뿌리며
나는 불구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가난에 막무가내로 결박당한
돌배나무일 뿐이야, 하고
김씨는 중얼거린다
(『돌배나무는 불구가 아니다』 32~33쪽)
비록 입 안에서만 겉도는 혼잣말이 되었지만, 김 씨는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인간성이 결박당한 시대 속에서 희망을 외치려고 한다. 인간성 회복을 호소하는 김씨의 목소리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정신을 생각하겠다는 결연한 자세이다. [1]
무성한 잎새와 과실을 달고도 끄떡없었던 나무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 가을에 접어들면 허룩한 잎새는 무거운 듯 떨군다. 그렇지만 그 뻣뻣해진 나무속에 우리가 볼 수 없는, 초록의 추억만큼은 남아 있다. 그 초록의 추억은 분명하다. 그것은 생명력이다. 그리고 재생의 꿈을 간직한 희망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나무의 몸을 투시한 박진형 시인은 살아있는 존재가 느끼는 아름다움 슬픔까지 환히 들여다보는 명징한 시를 썼다. 섬뜩한 한강의 식물적 상상력과 차원이 다른 따뜻한 박진형의 식물적 상상력을 느껴보시라. 시선집으로 나온 《길은 헐렁한 자루 같다》(만인사, 2014년)에 《몸나무의 추억》에 모아놓은 시가 있다.
[1]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있는 구절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