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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도둑의 최후는 교수형뿐이라네 - 애서가들의 장서표 이야기
쯔안 지음, 김영문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평점 :
장서표는 책의 속표지에 붙여 소유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시다. 책의 소유자를 알리는 장서표는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의 징표이기도 하다. 장서표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우표만 한 크기지만, 규모가 매우 다양하다. 장서표에는 ‘Ex Libris’라는 라틴어가 들어가는 게 불문율로 돼 있다. 영어권에서는 ‘Bookplate’라고도 쓴다. 또 장서가의 이름이나 연대를 쓰기도 하고 책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시, 격언들을 넣어 장서표의 무게를 더해주기도 한다. 문자와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장서표는 판화로 제작되는 게 보통이다. 판화로 만든 것이 예술작품으로 사랑을 받는 것은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책이 그리 귀하지 않은 지금 장서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됐다. 장서표 문화가 일찌감치 자리 잡아 수집 문화의 하나로 성장해온 유럽,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실정이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213/pimg_7365531661540893.png)
장서표를 소개한 책 제목이 살벌하다. 《책 도둑의 최후는 교수형뿐이라네》. 평생 책 읽기와 장서표 수집에 탐닉해온 한 중국 애서가의 반어적 욕망이다. 저자는 책에 대한 탐닉이 장서표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독서광의 공감을 사고 평균적 독자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새삼 강조한다. 저자의 장서표 사랑은 장서표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서표 안에 새겨진 상징을 해독한다. 장서표의 내용은 장서가의 직업, 취미, 세계관 등이 압축되어 있다. 장서표에 자주 등장하는 사물은 당연히 책이다. 현재는 발전된 제지술과 인쇄술 덕분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책이지만, 과거엔 특별한 사람이나 소장할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장서표에는 그 귀한 책에 소유와 애정의 표시를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새겨져 있다.
세상은 남자에 의해 움직이고, 그들은 여자의 보호자로서 소유권을 주장했다. 남성 애서가들은 책과 여자가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독과 결핍을 느끼는 남성 애서가들을 위해 벌거벗은 여성이 그려진 장서표가 제작되었다.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책을 읽었고, 자신만의 장서표를 이용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213/pimg_7365531661540895.png)
미국의 판화가 록웰 켄트는 부부애를 기념하기 위한 장서표를 제작했다. 장서표에는 켄트와 아내 샐리(Sally)가 맞잡은 손동작이 그려져 있고,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샐리가 독서를 좋아하는 여성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책과 거리가 먼 전통적 여성이었다면, 장서표에 이름이 새겨진 사실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서표를 찬찬히 살펴보면 샐리를 향한 켄트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장서표에 자신의 아내를 ‘록웰 켄트의 아내 샐리’가 아닌 ‘샐리 켄트’로,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 형태로 새겼다. 이 장서표에 책은 중요하지 않다. 장서표의 진정한 주인공은 샐리다.
장서표 수집가가 소개한 다양한 장서표를 보면 저마다 장서표 주인들의 삶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표는 단순히 문자와 그림이 조화를 이룬 예술 작품이 아니라 인류의 삶 전체를 문자와 그림으로 형상화한 기념비다. 책 속에 있는 작은 기념비. 자신의 물건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럽다. 장서표는 애서가를 위해, 책에 의해 존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