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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평점 :
“안젤리나 졸리의 외모에 박남준의 요리 솜씨를 가진 여자라면
내 당장 결혼하겠소.”
(《시인의 밥상》 20쪽)
요리 솜씨가 뛰어난 매력적인 남자 시인이기에 그의 팬을 자처한 남성도 있다고 하더라. ‘버들치 시인’ 박남준이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가난하지만 여유롭게 사는 모습 덕분이다. 그는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서 혼자 밥해 먹고, 혼자 꽃도 보고, 글을 쓰면서 지낸다. 사람들은 그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내놓은 마음 씀씀이에 행복해한다. 그는 나눔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하기 살기 위해서 요란하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면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사소하고 단순하다. 가끔 사사로운 시간 없이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이 인생 종반기에 이르러서야 크게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놓쳐버린 일상의 행복,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흘려보낸 뼈저린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한 밥상에 둘러앉아서/사는 게 별거야’(『한 밥상에』)라고 노래했나 보다. 지인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소박한 행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작은 평화와 행복은 위대하기조차 해서 숙연해진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면 사람에게는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욕심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걸 알고 아무리 누르려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제각각 소중함을 지닌 우리지만 늘 상대와 견주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물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것이 버들치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새끼 낳은 고양이를 위해 자신이 평소에 먹지 않은 소고기 반 근을 사오면서 밥을 챙겨주고, 식사하기 전에 죄인처럼 기도하면서 늘 미안해하던 사람. 그게 버들치 시인의 삶이다. 그 여리고 맑은 시인의 심성이 공지영의 문장에 투명하게 비친다. 험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민망한 마음이 들다가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고된 일을 참아내는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공지영의 말대로 버들치 시인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이것은 시인의 타고난 털털함과 겸손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이 사물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내면을 꿰뚫어 볼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산다는 것을 무엇일까. 얼마나 더 많이 가지면서 누려야 사는 걸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빵만으론 살 수 없음을, 빵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다. 《시인의 밥상》은 특별한 음식에 대한 정보를 가르쳐주는 데에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사는가?’가 아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동안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물질만을 추구하며 바삐 걸어가는 많은 독자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이제 《시인의 밥상》을 읽은 독자가 대답할 차례이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이 물음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이 무한하다는 생각으로 오만하지 않고, 타인에게 베푸는 마음이 넘쳐나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다. 행복도 햇살처럼 문을 닫으면 들어올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는 있으면서 어디에도 들어 올 수 없게 마음의 문을 걸어두고 행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전박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행복은 소질이 필요하다. 부족과 불만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자세야말로 행복의 소질을 키우는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