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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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극작가와 소설가를 겸했지만, 소설 《돈키호테》의 비중이 커서 극작가로서의 세르반테스는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극작가로서의 세르반테스는 고전주의의 대가들에게 영감을 얻기는 했으나, 제 작품의 속살을 스페인의 문학 전통이 스며든 강렬한 생명력으로 채웠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집필하기 전에 이미 여러 편의 희곡을 썼다. 그러나 생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희곡 작품의 수도 많지 않다.

 

와인 좀 아는 사람이라면 스페인에서 제조된 와인 ‘베가 데 토로 누만시아(Vega de Toro Numanthia)’를 알 것이다. 이 와인 명의 유래가 세르반테스의 희곡 《누만시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누만시아는 고대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강렬하게 저항했던 스페인 내 지역명이다. 스페인은 카르타고를 이끈 한니발(Hannibal)의 본거지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는 스페인을 기습 점령하여 카르타고군을 차례로 괴멸시켰다.

 

《누만시아》는 누만시아를 호시탐탐 노리는 스키피오와 그들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는 누만시아 사람들의 갈등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역사는 간혹 뛰어난 적수를 상대한 덕분에 승리가 한층 돋보인 영웅의 예를 보여준다. 승자 스키피오는 영원히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 정복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반면에 승자의 역사 서술은 모든 과거를 기록하지는 않는다. 승자의 잔인한 폭력의 역사, 타락 행위의 역사, 가혹한 지배의 역사와 무엇보다 패자의 저항 의지가 돋보인 역사가 묻힌다. 승패의 명암은 그렇게 뚜렷하지만,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비극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 세르반테스는 승자의 과거가 아닌, 패자의 과거, 즉 피억압 민중의 과거가 역사의 동력으로 이해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역사를 굴러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민중을 상징하는 누만시아 사람들은 제국이 휘두르는 엄청난 억압과 파괴의 역능에 저항한다. 비록 강압적인 군사력 앞에서 저항하다 끝내 패배하지만, 이들의 투쟁은 스페인의 부활을 향한 기폭제가 된다. 실제로 《누만시아》는 한동안 잊히다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침략 이후로 재조명되었다. 《누만시아》가 일반 민중의 삶의 숨결을, 그 생생한 삶의 육성을 되살려낸 작품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것은 숱한 혼돈 속에 살아가던 스페인 민중을 위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혀줬다.

 

《사기꾼 페드로》는 ‘페드로 데 우르데말리스’라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사기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영웅들의 위대한 활약상을 그리지 않는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16세기 스페인의 실상을 그리기 위해 당시 스페인에 유행했던 소설 양식인 피카레스크 기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피카레스크 기법은 보잘것없는 주인공을 내세우며 진술이나 기록 형식을 빌려 사회를 풍자한다. 페드로는 미천한 신분이다. 그렇지만 신분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말과 행동은 현실의 한계를 헤쳐 나가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기도 한다. 《사기꾼 페드로》의 매력은 나쁜 주인공을 대놓고 처벌하는 데에 있지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위선자, 천박한 인간성을 가진 자들의 마음은 사기꾼의 속내보다 쉽게 읽힌다. 사기꾼은 마음에 돋아난 인간의 뾰족한 촉수를 알아본다.

 

사기꾼 페드로는 역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적, 희망적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은 그저 훨훨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자존심을 가지고 높은 이상을 설계하면서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거,
나는 좋다고 생각해.
나 역시, 머리는 둔하지만,
왕자나 교황, 황제나
군주가 되기를 꿈꾸지.
환상에서는 나도
이 세상의 주인이란 말이야.

 

(《사기꾼 페드로》 2막 207쪽, 페드로의 대사)

 

 

이 대사는 페드로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마치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돈키호테의 열정과 닮았다. 페드로는 꿈과 이상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고, 연속되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희망과 꿈을 꾸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가 조롱하는 세상은 민중을 괴롭히는 불의의 괴물을 상징한다. 《사기꾼 페드로》가 정확히 언제 써졌는지 연도가 불분명하다. 만약 이 작품이 《돈키호테》가 나오기 전에 집필되었다면, 세르반테스는 페드로를 통해 돈키호테의 근대적 모험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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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1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 없지만 누만시아 와인한잔 땡기는 밤이네요..ㄷㄷㄷㄷ

cyrus 2016-11-16 19:47   좋아요 1 | URL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생각하면 술이 당긴 신체 반응은 당연한 겁니다.. ㅠㅠ

동성로 시내에 집회 있던 날에 오랜만에 소주, 맥주를 마셨어요. 역시 힘들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끝내주더군요. ^^;;

표맥(漂麥) 2016-11-1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여왕님은 돈키호테... 글읽기 싫어지는 세상을 만든 분이시라서... 쩝...

cyrus 2016-11-17 08:25   좋아요 0 | URL
여왕님도, 돈키호테도 아닌, 그냥 나라 망치려고 작정한 사기꾼입니다. 오늘 아침에 불쾌한 뉴스를 봤어요. 한일군사협정 추진을 박씨가 지시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