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도시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10
크리스틴 드 피장 지음, 최애리 옮김 / 아카넷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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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거나 이해되지 못해왔다. 과거 천 년 대부분 시간에서 남성들의 세계라는 점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가?”라는 문제는 유럽 중세시대 때부터 논쟁거리였다. 중세는 기독교와 떨어져 설명되기 어렵다. 중세의 역사는 곧 기독교와 사회, 즉 양자 관계설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의 신학자 중 일부는 여성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기사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젊은 남자다. 중세의 기사들은 명예롭지 못한 기습공격이나 약자나 패자에 대한 학대와 살해를 금했다. 기사도란 영웅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품성으로 성실, 명예, 예의, 약자 보호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이 기사도 정신에 의해 존중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철저하게 보호 대상에 머물렀을 뿐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중세 말 유럽의 여성들은 흑사병의 유행과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혁의 시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휩쓸려 많은 수가 화형과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가하는 중세의 이미지는 칙칙한 잿빛이다. 그러나 그 암울한 시대 속에 신념과 이상을 꿈꾸었던 여성이 있었다.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 이름이 생소한 인물이다. 그녀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로 치부해버리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글로써 생계를 꾸려간 최초의 전업 작가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성장기와 결혼생활, 문필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 자기 삶의 기록을 자세히 남겨 중세 말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를 맞서기 위해 여성들만의 이상향을 책 속에 그려냈다. 그 책이 바로 《여인들의 도시》이다.

 

크리스틴은 여성의 본성과 행실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문헌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의 각성을 돕기 위해 이성 부인, 공정 부인, 정의 부인이 등장하여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누릴 만한 존재임을 천명한다. 세 명의 신들은 성경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남성들에 의해 재생산되던 여성 비하 입장들을 반박한다. 신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크리스틴은 훌륭한 여성들만 모여 사는 요새 도시를 세운다.

 

《여인들의 도시》는 남성이 만들어 낸 중세의 권위에 도발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텍스트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남성 중심적 시각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인들의 도시》는 페미니즘 고전 도서 명단에 자주 거론되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여인들의 도시》를 만들면서, 찾고 싶었던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줬다. 그녀가 찾으려 했던 길은 남성중심시대의 문제의식을 인식하면서도 새로운 여권의 공간을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해체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형성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나로 형성된 사유의 집합체가 바로 《여인들의 도시》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남성들의 텍스트를 선별하여 반박하는 작업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시도이다.

 

“시기심에서 여성을 헐뜯는 자들은 졸렬한 남자들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지성과 훌륭한 품행을 갖춘 여성들을 만나보고 앙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란다. 그런 자들은 모든 여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자기보다 더 훌륭한 여성들의 명예와 평판마저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이성 부인의 말, 제1부 8장 48쪽)

 

크리스틴은 글쓰기가 본질적 인간본성에 대한 보편적 발언이라는 믿음을 스스로 깨뜨렸다. 오히려 남성들의 글쓰기는 여성 자유의 파괴자로,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여겨졌다. 그녀의 글쓰기는 기존의 낡은 남성의 권위를 지적하고, 성경과 신화 속에 은폐된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폭로했다. 그래도 크리스틴은 중세 남성들이 누려온 특권적 지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여성을 생각하는 남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다.

 

“모든 남자들이 위에서 말한 견해(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의 견해-리뷰 작성자 주)에 동조해 여자가 교육받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단다. 좀 더 현명한 남자들일수록 그러지 않아. 하지만 현명하지 못한 남자들은 여자들이 교육받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야.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것이 못마땅하니까.” (공정 부인의 말, 제2부 36장 278쪽)

 

크리스틴은 글을 쓰고, 사고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이상을 전파했다. 설사 그녀의 이상이 끝내 현실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해도 그 행위는 메아리가 되어 계속 울려 퍼졌다. 《여인들의 도시》야말로 지금의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만들게 해준 생명력 있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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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3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제 2의 중세 도래라고 볼 수도 있죠. 중세의 고딕 예술 풍조는 요즘 미니멀리즘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로 여성을 통제하려는 속셈은 동일. 중세에 마녀로 몰린 여성들이 돈있는 과부가 많아 교회에서 그걸 뺏으려 기획한 경우가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페미니즘 전투상황은 중세 마녀사냥과 비슷한 구석도 있죠. 당신이 마녀도, 페미나치도 아닌 걸 증명해 보아라! 같은...
남녀라는 이분법이 아닌 인간의 본성 측면에서 종합해보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yrus 2016-11-03 18:54   좋아요 0 | URL
크리스틴 드 피장이 살았던 시대에도 남녀 갈등이 첨예했고, 학자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피장이 지적했던 것들이 지금의 여혐 입장의 논리와 닮았습니다.

yureka01 2016-11-0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야말로 여성의 선구자였군요....^^.. 여성문제나 남성문제는 인간성, 즉 휴머니즘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성별의 대결로는 해결안되는데 말이죠..

cyrus 2016-11-03 18:56   좋아요 0 | URL
네.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 피장의 책도 같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과 신화가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1-0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합니다. 그나마 존중하는 척이라도 하는 사회가 나은건지 아니면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는 사회가 더 나은건지.. 전투력향상을 위해서라도요~~
여자로 사는것이 좀 많이 고단한 사회입니다.. 그냥 인간이면 족 하지 않을까요? 남자나 여자나 돈과 권력앞엔 약자일수 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cyrus 2016-11-03 18:59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내세워서 여자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남자들이 있어요. 이건 페미니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고, 페미니즘을 악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들에게 잘해준다고 착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