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대통령의 시녀 박근혜는 우주의 기운이 도와줄 때까지 청와대에 나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무속인이 남한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순실이 포함된 비밀모임 ‘팔선녀’가 막후에서 국정개입은 물론 재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언론 보도마저 나왔다. 무속신앙과 정치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우주의 기운이 오기는커녕 국가의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영생교를 둘러싼 최순실과 박근혜의 연결고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음모론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보면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와의 관계가 떠올린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노숙자 신세를 졌다. 에카르트는 헨리크 입센의 희극 《페르 귄트》를 독일어로 각색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과 알고 지낸 히틀러에게 《페르 귄트》를 헌정했다.
히틀러는 에카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위해 멋진 프렌치코트 한 벌 사줬고, 베를린 왕립 극장의 연극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는 남들보다 책을 많이 있었어도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썼던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이 돼 주기도 했다. 히틀러는 여러 차례 연설할 기회를 가졌고,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서재에 보관되었던 장서들을 조사하여 히틀러의 생애를 추적한 《히틀러의 비밀 서재》의 저자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가 에카르트의 각본에 따라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주임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히틀러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썼다. 히틀러는 자신의 추종자나 심복이 많음에도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운 폐쇄적인 성격이었다. 슈페어는 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1987)의 증언을 토대로 히틀러와 가깝게 지낸 에카르트를 주목했다.
헤스는 당시에 단 한 사람만이 히틀러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우정이라기보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는 반유대주의 계열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였다. 1923년 에카르트가 사망하자, 히틀러가 친한 친구끼리 사용하는 호칭 ‘Du’(2인칭의 친근한 표현, 너)로 부르는 사람은 네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헤르만 에서, 크리스티안 베버,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에른스트 룀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174쪽)
에른스트 룀(Ernst Röhm, 1887~1934)은 나치돌격대(SA) 참모장으로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룀은 히틀러의 2인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히틀러는 그런 ‘친근한’ 룀의 존재감을 부담스러웠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룀 세력과 나치돌격대 일원 모두 체포, 살해했다.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의 서재에 발견된 오컬티즘(Occultism) 관련 서적이 히틀러가 오컬트와 신비주의 등에 심취한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로 봤다. 히틀러 음모론 중 절대로 빠지지 않은 필수 요소가 바로 ‘히틀러와 오컬트의 연관성’이다. 박근혜가 ‘우주의 기운’을 믿었다면, 히틀러는 순수 혈통으로 이루어진 아리안(Aryan) 족의 우수성을 믿었다. 두 사람이 간절히 믿었던 대상은 실제로 성립 불가능한 것들이다.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 혈통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유대인을 ‘세상의 질병’으로 매도했다. 오컬트 마니아들은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에 가입하여 자신을 지배한 사탄을 위해 세계를 파괴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 비슷하게 분위기를 띤 단체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점은 사실이다.
1918년 뮌헨에 창설된 툴레 협회(Thule-Gesellschaft)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지만, 정식 명칭이 ‘고대 게르만족에 관한 연구 모임’이다. 툴레 협회 일원들이 공통으로 연구하는 것은 신비주의인데, 이들은 영적인 힘을 빌려 ‘아리안의 부활’을 기도했다.
툴레(Thule)는 원래 고대 문헌 및 지도에 언급된 극북(Far North) 지역의 섬을 의미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툴레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했다. 툴레 협회 일원들은 현실에 없는 섬에 관한 고대 전설에 매료되어 그곳이야말로 아리안 민족의 요람지로 믿었다. 히틀러가 툴레 협회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지 불명확하지만, 히틀러와 툴레 협회의 관심사는 똑같다. 반유대주의자이자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 에카르트는 물론,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29~1945),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등이 툴레 협회 회원이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즘 옹호 이론가로 활동하여 《20세기의 신화》라는 책을 발간하여 독일 나치스(Nazis)의 중요 인사로 승승장구했다. 이 책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다음으로 독일 제3제국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앞에 서술했듯이 《20세기의 신화》 역시 잘못된 편견과 망상이 만들어 낸 ‘불쏘시개’에 가깝다. 《20세기의 신화》는 나치스의 이념인 국가 사회주의의 기초를 정립한 문헌이다. 그래서 에카르트와 로젠베르크 등이 활동한 툴레 협회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나치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하겐크로이츠가 툴레 협회의 공식 엠블럼과 유사하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존경을 담아 《20세기의 신화》를 헌정했는데, 정작 히틀러는 이 책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책에 나온 내용은 수십 년간 독서를 통해 히틀러가 이미 정립했던 것들이다. 아니면 누구보다 열등감이 강했던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필력에 질투했을 수 있다. 《나의 투쟁》 초판은 겨우 팔릴 정도였다. 실패작에 가까운 책은 권력에 힘입어 히틀러 시대의 필독서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자신 스스로 《나의 투쟁》을 형편없는 책으로 평가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히틀러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주석으로 ‘결핍’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 히틀러는 중급 공무원에 불과한 친아버지보다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에카르트에 더욱 기대어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준비한 각본을 믿고 따르며 정치가로 변신한 히틀러는 ‘실패한 화가’라는 굴욕적인 인생의 명함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평생 괴롭히는 상처가 될 ‘결핍’을 채워준 중요한 존재이다. 그렇듯이 최순실은 박근혜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그녀를 도와주었고, 박근혜는 평생 꼬리표로 달라붙은 ‘박정희의 딸’, ‘만년 2인자’를 18대 대선에 승리하여 떼어냈다. 그렇게 의기양양한 최순실은 박근혜를 위해 옷 입은 것부터 시작해서 연설문 작성 등 모든 일에 관여했다. 다만, 최순실이 박근혜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은 작문 방식이다.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독일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만약 에카르트가 건강해서 히틀러의 곁을 지켰다면, 괴벨스(Goebbels, 1897~1945)는 선전장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는 ‘나치 운동의 북극성’이라고 치켜세웠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라는 북극성의 기운을 받아 독일을 장악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말을 빌리자면 “좋든 싫든 독일 제3제국은 히틀러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더 크게 보면, 에카르트의 작품이었다. 독일 제3제국은 극작가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원하던 세상의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 선 주인공은 히틀러였다. 지금까지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연극했던 4년의 시간은 좋든 싫든 최순실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