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라도 ‘성공’이라는 단어는 좋아하지만 ‘실패’라는 단어는 의식적으로 싫어한다. 실패를 숨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이다. 실수, 실패를 어떻게 해서든 덮어버리기에 바빴다. 실패란 목표나 목적 달성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결과 지향적인 말이지만, 실수는 다분히 과정 지향적인 말로, 부주의에서 발생한 것으로 실패를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패를 은폐하면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거나 더 큰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실패는 확대 재생산된다. 실패의 요인과 장치를 명확히 밝혀 요인과 장치를 바꾸는 등의 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같은 요인이 같은 장치를 통해 실패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같은 ‘실패의 맥락’에서 실패가 반복되면 나선형으로 악순환을 일으켜 그 타격은 더욱 심각해진다.

 

사고는 늘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돌발적으로 발생한다. 《누운 배》는 진수식을 마친 배가 쓰러지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커다란 재앙은 회사 내부의 안정적인 분위기마저 순식간에 집어 삼켜버린다.

 

 

그날 2002호가 이렇게 누울 거라고 상상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고 상상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1년 넘게 걸려 지어온 쌍둥이 배 두 척의 처지가 백지장처럼 찢어져 엇갈리는 데 하룻밤의 반절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안정과 평화란 이처럼 나약했다. (19쪽)

 

 

이 소설에서 배가 쓰러진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회사는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사고 수습에 부랴부랴 매달린다. 회사가 평소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이 더욱 복잡하게 꼬인다. 조선회사 회장은 배를 고쳐서 세우자고 결정한다. 배를 재건조해서 팔아넘기면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회장은 ‘기업의 목적은 오직 기업의 이익’이라는 신조를 먼저 내세운다. 회사 임원들은 기업의 이익에 휘둘리고 순응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종 조직은 인간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다. 기업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조직들은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작업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고 거기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적자원을 충당함으로써 장기적 생존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경영자나 구성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조직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인 생각이 몰락하는 조직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누운 배》의 회사는 기업 논리와 결탁한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다. 이것은 하나의 ‘기업 관료제(corpocracy)’다. 주인공은 회장의 입김이 들어간 조직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 기업 관료제는 내부 단점을 재빨리 인정하고 보완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기업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막스 베버가 말하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쾌락주의자’로서 현대의 관료는 기업 임원일 수도 있다. 베버가 그려내는 현대 관료제는 영혼이 없는 기계다. 영혼도 가슴도 없는 터라 일단 스위치가 켜지면 무한 작동한다. 선악도 미추도 다 소용없다. 누가 스위치를 내릴 때까지 그냥 그렇게 움직인다.

 

 

회장은 경영계획 회의보다 배를 일으키자고 사람을 선동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관리 체계를 세우는 것보다 당장 돈이 굴러들어올 거리에 마음이 가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임원들의 횡설수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상관없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회장의 힘이고 지위고 회장을 둘러싼 찬란한 광배였다. 회장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했다. (84쪽)

 

 

이 시점에서 임원들은 고민에 빠진다.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이루어진 조직 내에서 임원들이 기업의 ‘진짜’ 문제점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똑똑한 임원이라도, 그렇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임원들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시스템에 대항하는 힘이 없다. 관료제는 신분이 높은 사람도 천한 사람도 모두 똑같이 문서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속성을 지닌다. 문서에 의존하는 조직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99쪽)

 

 

문서 작업은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문서로 일을 처리하는 관료제에서는 누구나 움직임이 굼뜨다. 조직사회는 끈끈한데, 그 끈끈함이 거기 속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전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래되고 불만족스러운 기업 내부 문제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패가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비난과 책임추궁을 피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기본을 무시하고 규칙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풍조에 물들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된 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실패 불감증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 조직에 만연된 책임 전가와 상호 불신,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 및 권위주의와 타율, 무소신과 무책임 등이 온갖 불감증을 두둔하기 때문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벤치마킹이니, 성공사례 발표니 떠들썩하게 축하를 해준다. 우리는 실패 불감증을 떨쳐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성공에 눈이 멀어진다. 《누운 배》는 ‘눈먼 힘’에 의해 무기력하게 작동되는 조직의 민낯을 보여준다. 권력 통제와 능률에 따라 움직이는 회사는 관료제의 성이다. 그 회사에 영혼이 없다. 영혼 없는 임원들이 모인 회사가 만든 배가 침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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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9-0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제목을 보고, 처음에 세월호를 떠올랐어요..
의식 깊은 곳에 세월호가 많이 있나봐요..

cyrus 2016-09-04 18:24   좋아요 0 | URL
세월호 사고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상처 같은 기억입니다.

yureka01 2016-09-0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대우조선이 딱 떠 오릅니다.ㄷㄷㄷㄷ

cyrus 2016-09-05 13:3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