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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토리 이야기
민병훈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3월
평점 :
[1001-2] 다케토리 이야기
(※ 피터 박스올의 책 국내 번역본에는 '타케토리 이야기'로 되어있음)
옛날 일본에 사누키노 미야쓰코(讃岐の造)라는 이름의 노인이 대나무 대롱 속에 있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이 여자아이의 키는 고작 세 치 정도에 불과했다. 노인은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길렀다. 대나무에서 자란 작은 아이의 이름은 ‘가구야 히메(かぐや姫)’다.
노인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히메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히메가 미인이라는 소문이 남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히메는 구애를 펼치는 남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섯 명의 귀공자는 히메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직접 히메의 집으로 찾아가 간청했다. 노인은 결혼하지 않으려는 딸이 걱정되었다. 히메는 아무리 미모가 훌륭하고, 재산이 많다고 해도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상대와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자신이 원하는 물건(혼수품)을 가져오면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약속했다.
다섯 명의 귀공자는 히메가 말한 대로 세상에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혼수품을 장만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히메가 원하는 다섯 개의 물건들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돌로 된 부처의 바리때, 전설의 산에 자라는 성스러운 백옥(白玉) 나무의 가지, 절대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전설의 동물 불쥐의 가죽옷, 용의 목에 있는 오색 구슬, 제비 둥지에 있는 환상의 조개다. 당연히 다섯 남자 모두 히메의 미션에 실패했다. 이제는 임금님(천황)까지 히메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임금님마저 히메에게 퇴짜 맞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히메가 사랑을 잘 모르는 차가운 마음의 여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히메가 남자들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히메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달나라 사람이었다. 천상에서 죄를 지은 바람에 잠시 인간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히메는 천상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노인에게 단 한 마디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세한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달나라로 올라갔다) 인간 세상을 떠나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히메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달이 뜬 밤이 되면 그녀는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음력 8월 15일에 보름달이 뜨면 히메는 달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보름달이 뜬 날에 임금님은 병사들을 동원해 히메의 승천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히메는 하늘로 돌아가기 직전에 임금님에게 애절한 내용의 와카(和歌, 일본의 전통 시)를 담은 편지와 불사약을 남겼다.
끝이라 하여 하늘의 날개옷을 입으려 하니
당신과의 추억이 무척 그립습니다.
今はとて 天の羽衣 きるをりぞ
君をあはれと 思ひいでける
다케토리란 일본어로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라는 뜻이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보다 앞서 나온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간략한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암울하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각자의 결말이 슬프다. 가구야 히메는 인간 세상에서 사랑 한 번 경험하지 못하고, 달나라로 돌아갔다. 하늘의 날개옷을 입으면 인간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히메의 승천은 ‘죽음’ 또는 ‘유한한 삶’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망령이 저승의 5개 강 중 하나인 ‘레테의 강’에 흐르는 물을 마시면 지상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다고 믿었다. 망각은 곧 죽음의 이미지다. 그녀를 애지중지 키운 노인은 히메가 없는 인생에 무상함을 느낀다. 그는 불사약을 거부하면서까지 병상에 누워 지냈다. 다섯 명의 귀공자, 임금은 히메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지 못한 실패한 남자들이다. 이 중에 가장 불쌍한 남자는 제비 둥지 속에 있는 환상의 조개를 찾으려고 했던 이소노가미노 마로타리(中納言石上のまろたり)다. 그는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바구니를 타고 제비 둥지 안을 살펴보다가 그만 부뚜막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소노가미는 조개를 구하지 못했고,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남자의 생명은 허리인데...) 자신이 평생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에 이소노가미는 부끄러워했다. 그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메는 그에게 위문의 편지를 보냈고, 이소노가미는 히메에게 보내는 답가를 쓰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임금도 히메의 부재에 상심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와카로 표현했는데, 그 속에 인생의 허무함이 짙게 배어있다. 이 문장이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날 수 없어 눈물로 지새우는 이내 처지에
불사약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逢ふことも なみだに浮かぶ 我が身には
死なぬ薬も 何かはせむ
다케토리 모노가타리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운명과 삶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한 편의 우화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슬픈 줄거리와 결말은 단지 삶의 허무함과 인간 생명의 제한성을 표현하기 보다는 삶의 본질과 사람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