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보통사람들이 동시대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특히 대중매체가 뿜어내는 강력한 영상에 나만의 빛깔로 대항하기란 역부족이다.
외모도 실력의 일부라고 받아들여지는 외모지상주의는 연령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우리의 생활과 소비행태에도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갈수록 외향적, 자기만족적으로 바뀌고 있다. 누구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외모를 통해 인정을 받고 자신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보석을 연마하듯 자신을 갈고닦는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시간 내에 목적을 이루려는 성급한 마음에 있다. 외모 지상주의와 상업주의에 의해 여성들에게 은연중에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큰 문제다. 외모지상주의를 자극하는 광고와 기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을 중심으로 성형외과 차원에서 “얼굴과 몸에 조금만 손질을 하면 당당하게 살 수 있다”라고 끊임없이 권유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이렇게 성형을 권하는 사회에서는 ‘외모가 사회적 능력이요, 곧 경쟁력이다’라는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팽배해져 있다.
매스컴에서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폐해를 끊임없이 보도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외모지상주의가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닌 심각한 정신과적 질환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페미니스트들은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 외모로만 평가하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외모에 대해 자신 있고 당당하게, 그리고 긍정적이고도 사랑으로 대하라. 그런데 내면적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외모집착풍토에 반하는 목소리들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이다. 벨 훅스는 마땅한 대안 없이 외모 차별,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는 이미지를 비판하기만 하는 담론을 비판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여러 종류의 친여성적 잡지들을 창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 모든 여성들에게 대안적 미의 비전을 제공하는 페미니스트 자본의 패션 잡지는 없었다. 대안을 제공하지 않고 성차별적 이미지들을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불완전한 개입이다. 비판이 그 자체로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미에 대한, 수많은 페미니즘적 비판은 건강한 선택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여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85쪽)
지금까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해온 내 입장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외모지상주의를 한없이 부풀리는 사회적인 분위기의 해결책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외모지상주의에 갇힌 사람들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사실 벨 훅스도 대안적인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 언급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매스컴에서도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폐해를 끊임없이 보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조건이나 자격보단 뛰어난 외모를 더 선호하고 우선시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와 반 외모지상주의가 충돌하는 지점에 끼여 버리면 제일 나은 선택을 고르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진 미의 기준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서 미를 바라보는 다양한 기준들과 이러한 기준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상위의 새로운 가치관의 확립이 정착되지 않는 한 외모지상주의는 영원한 난제로 우릴 괴롭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