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가 끔찍이 싫어했을 것이다. 고리키는 필명이다. 원래 ‘고리키(Горький)’는 ‘불쌍한, 고통스러운’을 뜻하는 단어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재혼하면서 아들을 남겨둔 채 홀로 떠나고 말았다. 홀몸 신세가 된 고리키는 가난의 현실을 스스로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러시아 전역을 떠돌면서 접시닦이, 제빵사, 구두수선공, 심부름꾼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고리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그의 초기작들은 하층민이나 부랑자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고리키 초기 문학을 ‘부랑자 문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 『마카르 추드라』가 수록된 번역본
《소녀와 죽음》(소담출판사, 1996)
《고리끼, 그 영혼의 여행》 (거송미디어, 1999)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 (맑은소리, 2003)
《고리키 단편선》 (범우사, 2004)
《고리키 단편집》(지만지, 2012)
《어머니 / 밑바닥 / 첼카쉬》(동서문화사, 2014)
『마카르 추드라』는 ‘고리키’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게 한 처녀작이다. 마카르 추드라는 오랜 세월 동안 떠돌면서 많은 일을 해본 늙은 집시다. 비록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몸이 쇠약해진 노인이지만, 자유가 선물한 삶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추드라는 화자인 젊은이에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로이코 조바르의 삶을 들려준다. 조바르는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 살아온 젊은 집시였다. 모험심이 강했고,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집시 동료들 사이에서 조바르의 존재감은 더욱 빛이 발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면서 살아온 조바르는 도도한 집시 처녀 랏다를 만나 한 눈에 반한다. 랏다의 아름다운 미모는 혈기왕성한 집시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조바르의 뜨거운 심장도 그녀 앞에만 서면 주체하지 못했다. 조바르는 용기 있게 랏다에게 청혼해보지만 거절당한다. 랏다는 자신이 조바르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조바르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다. 조바르는 자신의 삶 절반이라 다름없는 자유를 포기하고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조바르는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비굴한 태도가 부끄러워 참지 못한다. 결국, 다음 날에 자신의 삶을 속박하려는 랏다를 죽인다.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랏다의 아버지는 단검으로 조바르의 심장을 찌른다. 자유와 사랑을 꿋꿋하게 지향하던 두 젊은 남녀는 같은 날에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 추드라는 자유과 사랑 사이의 갈등에 시달린 조바르의 사례를 들려주면서 사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젊은이에게 충고한다.
추드라는 텍스트 밖에 있는 독자들 앞에서도 힘껏 목소리에 힘을 실어 넣는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노예가 된다. 그러니까 이곳저곳 세상을 돌아다녀 보고, 실컷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라고 말한다. 추드라에게 조바르는 커다란 자유의 광맥 같은 존재다. 그러나 추드라는 자유와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조바르의 태도에 실망한다. 추드라처럼 온갖 풍상을 다 겪어 본 알렉시르 조르바라면 조바르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자유인들을 욕되게 하는 수치스러운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친 말을 툭툭 내뱉는 야생인답게 조바르를 무시하는 조르바의 모습이 상상된다. 아마도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젊은 사내 녀석이 여자 한 사람 때문에 빌빌거리다가 개죽음당하다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소. 두목. 적어도 나 같았으면 하룻밤 동안 그녀의 몸을 기쁘게 해주고 다음 날 아침에 당장 떠났을 것이오. 그 녀석은 자유가 뭔지 모르는 얼뜨기에 불과하오. 병신 같은 놈.”
자유를 염원하던 조바르는 자유를 누릴 자격을 쉽게 포기해버리고, 자신의 자유를 유보한다. 결국 조바르 또한 조르바와 동행하는 ‘두목’과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현실(랏다와의 사랑)에 갇혀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감히 떠나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랏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 자신이 세워놓은 자유로운 세계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카르 추드라』의 결말은 모호하다. 젊은 화자는 추드라의 충고를 긍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침묵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두목이나 늘 조르바를 열망하기만 하는 독자들의 착잡한 심정과 동등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현실과 자유 사이의 만날 수 없는 간극이 『마카르 추드라』의 밑바닥에 어떤 막연한 슬픔으로 풍경처럼 깔렸다.
삶의 목적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자에게 자유는 아직 바람의 대상일 뿐이다. 우린 문자로 세운 ‘자유로운 세계’가 허상인 것을 번번이 확인하면서도 그 세계의 높은 문턱을 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조르바를 찾는다. 손발에 묶인 현실의 사슬을 풀어달라고 조르바에게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조르바마저 현실의 노예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다. 로이코 조바르처럼 자유를 행하려는 의지를 뒤흔드는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자유는 여전히 먼 곳에 있고, 여전히 열망의 단어다.
* 덧붙이기
그리스를 대표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조르바라면, 그에 걸맞은 러시아의 자유로운 영혼으로는 첼카쉬가 있다. 첼카쉬는 고리키의 동명 단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첼카쉬는 떠돌이 도둑이지만, 거칠 것 없는 자유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카잔차키스와 고리키는 조르바와 첼카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도둑이나 부랑인 같은 비천한 사람들도 긍정적인 자유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고리키의 또 다른 단편소설 『이제르길 노파』는 『마카르 추드라』와 유사한 플롯을 보여준다. 화자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상의 성별이 다를 뿐, 이제르길 역시 추드라, 첼카시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이제르길 노파는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그 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녀의 모습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르탕스 부인과 닮았다. 오르탕스 부인은 늙은 창녀지만, 젊었을 때 남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