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페미니즘 - 함께 공부하는 여성권 강의 사회운동 작은책 2
이유미 지음 / 사회운동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페미니즘은 억압과 불평등의 구조적 모순을 해체하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왜곡된 가치 질서를 붕괴시키고 평등한 세상으로 바꾸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TV나 영화 등 미디어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해 왔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묘사되는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못생기고, 과격하고, 남성을 혐오하는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팝 칼럼니스트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보다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칼럼을 기고하여 페미니즘을 ‘무뇌아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웠다. 그는 칼럼 논란 사건을 통해 스스로 페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비뚤어진 시각을 가졌는지를 보여줬다. 여권이 많이 신장한 요즘 남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깝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부 편향된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우월적 지위를 주거나 최소한 남성에게 상대적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와 동등한 단어로 오해받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법적으로 명문화된 공식문서들은 성별에 의한 차별 없이 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교육이 공식적, 명시적 차원에서 남녀에게 동일한 교육목적과 가치를 고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고착된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이라는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영역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이며, 소비의 주체이고, 가사노동 전담자라면, 남성은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는 공인으로서 다양한 경제활동영역에 참여하는 생산자로 등장한다.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여전히 사리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 페미니즘》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진 않다. 어디선가 한번 들었음 직한 그런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도 식상하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살면서 페미니즘의 렌즈로 남녀 문제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의 렌즈를 착용하는 것이 낯선 이유가 바로 단순히 ‘페미니즘의 과잉’ 탓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과소’가 원인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다고는 하나,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은 그동안 남성혐오의 그늘에 가려져 ‘여성의 시각’의 필요함을 역설하지 못했다. 왜 여성은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는지, 왜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취업, 승진 순위에서 늘 밀려나는지, 왜 여성은 강간을 당하고도 그 불합리함을 소리 내어 말 못하는지, 이런 문제 제기의 목소리를 잊혔다.

 

《지금 여기 페미니즘》을 읽는 동안 이론서 속의 여신이었던 페미니즘이 그 높은 데에서 걸어 들어와 내 머릿속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리는 페미니스트이되 생활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성차별주의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하여 이 책은 그렇게 다가왔다. 여성 노동운동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유미는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과 소원한 남녀 독자들에게 페미니즘의 핵심을 설명한다. 저자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여성권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한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인식의 틀을 갖고 살듯, 그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은 그려지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차이와 다양성은 곧 더욱 복잡한 사회 구조와 더 많은 분리를 낳게 된다. 결국, 우리가 차이를 차별로 귀결시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우리의 사고를 결정짓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권이 보장받기 위한 운동은 편한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머리 맞대고 의논하는 힘든 삶이다. 차별과 편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고민하는 삶이다. 새롭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아는 어려운 삶이다. 머릿속의 운동이 너무 편한 것만 쫓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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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9-05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책 읽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누구든 휴머니스트라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둘을 동의어로 이해합니다.

cyrus 2015-09-06 20:11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쓴 글을 단 한 줄로 정리하셨군요. 남성과 여성은 같은 인간이기에 절대로 한 쪽만 차별해서도, 혐오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단발머리 2015-09-07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의 렌즈를 착용하는 것이 낯선 이유가 바로 단순히 ‘페미니즘의 과잉’ 탓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과소’가 원인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남자들`을... 저는 기다립니다.
정희진씨 말처럼,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된다면 어느 여성이든 여성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입장이 다를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남성 혐오라고 이해하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으니까요.
항상 그렇지만,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9-08 18:0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페미니즘의 과소’을 심각하게 여기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