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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 Le Peau de Chagrin (1831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수록)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이 유령처럼 떠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존재다. 욕망은 삶의 기본 조건이지만, 때때로 존재론적 절제를 거치지 않을 때 자신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괴물이 된다. 우리는 늘 절제와 자기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대개 승자는 후자다. 많은 사람이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압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욕망이 사라질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으로 추방당할 뿐이다. 무의식 속으로 숨은 욕망은 의식으로 떠오르는 길을 차단당한 채 점차 정신적 상처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심리적 콤플렉스는 신경증이나 정신분열과 같은 증세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욕망의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행동하기 때문에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제거하라고 강조하는 꼰대 느낌의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에 나오는 주인공 라파엘은 열정적인 삶을 꿈꾸었으나 겨결국에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그에게 인생이란 한 판의 도박이다. 라파엘은 도박에 빠져 마지막 한 푼까지 다 날려 쪽박을 차게 된다. 회한 끝에 삶을 마감하기로 작정하고, 센 강에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강변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나귀 가죽을 얻게 된다. 이 가죽은 마법의 부적이다.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 그야말로 우연히 도깨비 방망이를 얻게 된 형국이다. 그 대신 소원 하나 이루어질 때마다 가죽의 크기뿐만 아니라 라파엘의 목숨도 줄어든다. 빈털터리가 된 라파엘은 가죽의 영적인 힘을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다. 가죽 덕분에 라파엘은 단숨에 부자가 되고, ‘라파엘 드 발랑탱’이라는 귀족 이름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라파엘은 더 많이 욕망했다. 가죽과의 거래가 계속될수록 그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몸의 이상 신호를 느끼게 되자, 불안한 라파엘은 가죽을 늘이는 방법을 찾아보지만 허사였다. 라파엘이 삶을 욕망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나귀 가죽의 역설은 파우스트가 그 자신의 영혼을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거래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욕망을 좇는 사람들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행복한 삶의 잣대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오로지 물질적인 부만을 욕망하면서 삶 전체를 그 욕망 충족에 맡긴다. 라파엘은 물질적인 부를 얻기 위한 야망이 과도하게 넘친다. 가죽을 얻게 된 그 날 저녁에 라파엘은 친구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얘기한다.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대목이 장황해서 지루하긴 하지만, 그가 욕망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눈총과 학대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 공부를 하기를 원했고, 아들의 일상을 사사건건 개입했다.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에 부담을 느낀 라파엘은 3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돈과 명성을 안겨다 주는 소설을 쓸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류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던 중 라스티냐크(<인간 희극>의 특징인 ‘인물의 재등장 수법’이 적용되어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나귀 가죽》에서도 등장한다)의 도움으로 페도라 백작 부인과 허망한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의 상심 끝에 도박에 빠져든다. 라파엘의 고백이 지루하게 느껴져도, 작가의 암울한 과거를 생각한다면 주마간산 격으로 읽을 수 없다. 가죽을 얻기 전, 라파엘의 삶은 발자크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소설을 쓰기를 원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머니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발자크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썼다. 자신도 라파엘처럼 훌륭한 걸작을 남겨서 어머니 앞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발자크는 문학적 성공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명예의 맛을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그 맛에 중독되고 말았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발자크는 돈과 여자들을 향해 열심히 쫓아 따라갔다. 발자크에게도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수명을 단축하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발자크는 정열적인 글쓰기를 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욕망이 컸다. 어쩌면 그는 명예의 보상이 따라오는 문학에 대한 욕망이 남다른 문학적 열정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가죽을 늘리고 싶었던 것처럼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들을 <인간 희극>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전집으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다행히 발자크의 나귀 가죽은 줄어들지 않았다. 세계문학사에 ‘발자크’라는 이름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인간이 가진 물욕은 끝이 없는 것인가. 그 욕망의 한계는 어디인가. 쾌락, 소유의 욕망이 정상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떨쳐낼 수 없는 숙명의 늪이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인간다운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삶의 토대마저 잃어버리고 내면의 황폐함만 남게 된다. ‘인간의 내면’까지 해부하여 관찰하고 싶었던 발자크는 그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욕망이 한 사람을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잡히지 않는 욕망을 바라보는 라파엘은 마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굶주림의 천형을 받은 탄탈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탄탈로스의 죄명은 욕심이다. 신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 역시 상류층 사람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끝없는 욕망의 끝은 허무의 끈이다. 그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인간은 늘 좌절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