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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 법정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2월
평점 :
만약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악명을 떨친 살인범의 외형과 빼닮은 사실을 알았다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당신을 향해 활짝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섬뜩하다. 이런 상황은 영화에 나올 법한 일이라 평소에 만나는 지인이 신분을 교묘히 숨긴 진짜 범인이 아닌 이상, 범인의 몽타주와 거의 비슷하게 닮을 확률은 적다. 그래도 기묘한 상황을 겪는 당사자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범인과 닮은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다. 특히 친하게 지내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생활을 모른다면 당연히 그의 정체를 의심하게 된다.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 《화형법정》의 이야기는 앞에서 설명한 불길한 우연에서 시작한다. 출판사 편집자인 에드워드 스티븐스는 충격적이고 끔찍한 범죄사건을 소개하는 논픽션 작가 고던 크로스의 원고 자료를 확인하다가 그 속에 첨부된 의문의 사진을 발견한다. 카메라를 항해 똑바로 노려보는 금발의 여인. 그 여인은 1676년에 화형에 처한 여자 독살범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이었다. 신기하게도 독살범과 스티븐스의 아내는 쌍둥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닮았고, 이름마저도 똑같다.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이 결혼하면서 얻은 이름은 ‘마리 도브리’였고, 아내가 스티븐스와 결혼하기 전 이름 또한 ‘마리 도브리’였다. 스티븐스가 독살범과 아내의 관계에 궁금할수록 아내의 행적에 대한 의혹도 더욱 증폭된다.
스티븐스의 이웃인 마크 데스파드의 삼촌은 위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마크는 삼촌의 죽음을 의심한다. 사망 원인은 위염이 아니라 비소 중독으로 인한 독살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비소로 독살하는 방식은 17세기의 여자 독살범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했다. 스티븐스는 아내가 데스파드의 삼촌을 죽인 독살범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삼촌의 죽음에 둘러싼 기괴한 정황들이 밝혀지면서 여자 독살범과 닮은 스티븐스의 아내가 용의자로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삼촌의 방에서 홀연히 나타난 여자 독살범의 유령을 봤다는 증인도 있다. 삼촌의 사망 원인을 독살 쪽으로 무게가 실린 가운데 스티븐스 일행은 삼촌의 시체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비소를 확인하기 위해 납골당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무 관 속에 있어야 할 삼촌의 시체가 사라졌다. 납골당에 사람이 출입한 흔적이 전혀 없는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스티븐스는 아내가 용의자로 몰지 않으려고 마크의 아내 루시도 용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추리를 펼친다. 하지만 스티븐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독살범에 관한 내용이 있는 크로스의 책 일부와 함께 아내가 돌연 사라지고 만 것이다.
《화형법정》에는 카가 창조한 예심판사 앙리 방코랑, 밀실 사건 해결의 달인 기드온 펠 박사가 나오지 않는다. 경찰청 소속의 브레넌 경감이 등장하여 추리를 해보지만, 계속 헛다리만 짚을 뿐이다. 스티븐스, 마크 그리고 브레넌 경감 등 불가사의한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게 된 인물들이 나름 용의자 후보를 내세워보지만, 삼촌이 독살당하는 과정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독살범의 유령이 누군지도 밝혀내지 못한다. 카는 마법, 납골당, 독살범의 유령 등 공포문학의 단골 소재를 내세워서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편,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탐정의 역할을 과감하게 제한함으로써 더욱 더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이 무척 궁금해서 이 책을 절대로 손에 놓지 못한다.
자신들의 아내가 독살범으로 의심받는 상황 속에 펼쳐지는 스티븐스와 마크 데스파드와의 미묘한 설전 또한 흥미롭다. 소설 초반부에 스티븐스는 추리를 펼치는 과정에서 사적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 탐정의 원칙을 어긴다. 자신의 아내가 범인으로 몰지 않기 위해 스티븐스의 아내가 범인이라는 가정 하에 가설을 내세운다. 마크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삼촌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적극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독살범이 아니기를 바란다. 카는 소설 초반부에서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스티븐스가 탐정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는 독자의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작가에게 살짝 배신감(?)이 든 독자는 이 소설을 어찌 안 읽을 수 있으랴. 카가 의도한대로 독자는 사건의 진상이 궁금하고, 이 초자연적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해 줄 '사이다' 같은 인물이 소설 종반부에라도 꼭 나오기를 믿는다.
하지만 소설이 거의 다 끝나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카는 독자를 배신한다. 에필로그격인 '평결'에서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명확한 결말을 원하는 독자의 뒤통수를 날려 버린다. 지금도 추리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화형법정》의 결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결말에 따라서 《화형법정》을 정통 추리소설로 인정하는 독자들이 있는 반면에, 추리 기법이 들어간 호러소설로 보는 독자들도 있다. 어떤 서평에 의하면 명성을 떨친 카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화형법정》은 2%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완전 범죄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탐정물에 익숙하거나 이러한 탐정이 나오기를 고대했던 독자에게는 《화형법정》의 결말이 실망할 수도 있다. 방코랑이나 기드온 펠 박사가 나오는 카의 작품을 먼저 읽은 뒤에 《화형법정》을 읽었다면, 《화형법정》이 정말 카가 쓴 것이 맞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