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걷다 노블우드 클럽 4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초등학생 때 수업이 끝나면 항상 학교 도서실에 갔다. 친구들이랑 뛰어놀면서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도서실에서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학교 도서실에 가면 무조건 한 권씩 꼭 읽는 책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동용 추리소설전집이었다. 책을 펼치면 눅눅한 곰팡내가 내 코를 먼저 반겨준다. 누렇게 변색한 종이, 잉크가 희미하게 사라지려고 하는 활자. 책의 보존 상태를 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책이었다. 오래 읽으면 눈이 침침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절대로 책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즐겨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잊게 하였다. 개성 있는 탐정의 매력에 푹 빠졌고, 예상하지 못한 트릭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한 권을 다 읽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 읽으면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학교에 너무 오래 남아 있어서 경비 아저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추리소설전집은 한 권당 유명 추리 소설가들의 대표작 두 편씩 실려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 중 한 편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아로 시리즈 중 한 편이 같이 실려 있다고 보면 된다. 한 권으로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두 편이나 읽을 수 있다. 이 추리소설전집 덕분에 새로운 추리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남은 작가가 존 딕슨 카였다. 그가 쓴 작품이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과 함께 수록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작가의 이름이 기억이 난다. 유독 소설 제목은 기억나지 않은데 아마도 ‘유령성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먼저 나온 포의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탓에 그 뒤에 있는 존 딕슨 카의 작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카의 소설은 일단 음산한 고딕 분위기로 시작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다음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마술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독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카는 밀실 추리의 대가이다. 밀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한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소년 탐정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이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메가 나오는 만화 원작을 보게 되면, 밀실 살인 사건이 제일 많이 나온다. 할아버지인 코스케의 명예를 거는 소년 탐정은 카의 명예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1930년에 발표한 『밤에 걷다』(It Walks By Night)는 밀실 추리의 유행을 알린 카의 처녀작이다. 사교계에 이름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한 라울 드 살리니 공작과 결혼을 앞둔 루이즈 부인은 페넬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여는 화려한 파티를 즐긴다. 그런데 즐거워해야 할 파티에 루이즈 부인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두려워한다. 그것은 전남편 로랑의 협박편지 때문이었다. 로랑은 루이즈 부인을 면도칼로 공격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 병원에서 격리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부인은 로랑의 곁을 떠났고, 공작과 재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랑은 정신 병원을 탈출하여 전 부인의 재혼 소식을 알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을 막기 위해 로랑은 협박편지를 보낸 것이다. 공작은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로랑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해서 파리 경시청 총감 앙리 방코랭에게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공작의 요청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행복한 결혼식 전야제의 흥을 깨뜨린다. 시끌벅적한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루이즈 부인은 키라르 부인의 방 창문 밖에 서서 기분 나쁘게 웃는 로랑의 눈을 마주친다. 불쾌한 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페넬리 가게의 카드룸에 공작이 목이 잘린 주검으로 발견된다. 방코랭은 로랑이 공작을 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를 범인으로 단정하기에는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다. 두 개의 문이 있는 카드룸 밖에 방코랭의 부하 경관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의 감시망을 교묘하게 피한 범인은 카드룸에 혼자 있는 공작을 살해한 것이다. 과연 범인은 어떻게 카드룸을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카는 방코랭이 밀실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는 이야기 속에 독자에게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는 단서를 넌지시 제시하거나 그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은 뜻밖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소재들은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공작이 카드룸에 죽어가고 있을 때 흡연실에서 누군가가 놓고 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있었던 공작의 친구 보트렐리. 루이즈 부인 몰래 공작과 밀애를 즐기던 샤론 그레이. 공작의 복잡한 관계까지 밝혀지게 되면서 사건의 수사는 여러 가닥의 실이 한꺼번에 뭉쳐져서 꼬이듯이 엉뚱하게 전개된다.

 

샤론은 방코랭의 조수나 다름없는 작품 속 화자 ‘나’(이름은 제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매력적인 팜 파탈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반대로 너무 불필요하게 묘사된 장면이 제프와 샤론이 ‘썸’ 타는 장면일 것이다. 제프는 복잡한 연애관을 가진 샤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내적 갈등에 빠진다. 자신은 샤론을 좋아하지만, 공작과 보트렐리와 이미 정분을 나눈 그녀의 마음을 믿지 못한다. 제프와 샤론은 단둘이서 정원에 식사할 정도로 관계가 깊어졌는데, 여기서부터 카는 두 사람의 썸을 지루하게 지켜보던 독자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선사한다. 이 반전은 ‘그 인물’을 범인이라고 예상했던 독자들의 추리를 단번에 뒤집어엎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화자와 샤론의 관계를 지나치게 묘사한 장면은 신인작가 카의 미흡한 이야기 설정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카의 작품을 꽤 읽어 본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밤에 걷다』에 선배 추리 작가들의 장점을 답습하려는 신인 작가 카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마무리를 향해가면서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전모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아몬틸라도 술통’ 결말과 흡사하다. 논리적인 범죄 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추리를 반박하는 그라펜슈타인 박사를 무시하는 방코랭에서 차갑고 쿨내(쿨한 느낌이) 나는 ‘까도남’ 홈즈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건 해결의 단서를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짝사랑에 빠진 소심한 사내처럼 샤론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제프의 모습에 방코랭은 따끔하게 일갈한다.

 

“이보게, 난 중매쟁이가 아니라 경찰이라네. 오늘 저녁에 들은 그런 유치한 재잘거림 속에서 내가 뭘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나? 사랑이라는 감정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 (145쪽)

 

“당신이 존 딕슨 카를 안다면 당연히 이 책을 읽을 것이다.” 출판사는 띠지에 위대한 작가의 처녀작을 이렇게 홍보한다. 나는 어렸을 때 카를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가 처음으로 펜을 쥐고 써내려간 처녀작을 읽었다. 이미 카의 원숙한 작품들을 읽어 봤을 정도로 카를 잘 아는 독자도 당연히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최상의 레벨을 자랑하는 작가의 전성기 작품을 계속 읽어오다가 레벨 초기화에 가까운 처녀작을 읽어 보라. 명성 있는 작가의 처녀작에도 어설픈 티가 눈에 보인다. 이래서 어떤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으려면 집필, 발표 연도순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작가의 문학적 레벨과 성숙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카의 이름만 알고,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면, 처녀작 『밤에 걷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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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0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 진진한 추리소설 한 권 추천 부탁드립니다. <13번째 마을>정도의 포쓰가 되는 추리소설이요~^^ 엄청나게 재밌게 마지막으로 읽은 추리소설이 바로 13번째마을 이거든요..ㅎ

cyrus 2014-12-05 21:26   좋아요 0 | URL
야무님~ 제가 이제 막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입문자라서 감히 소설을 추천할 수준은 아니에요. 사실 <여섯번째 마을>도 아직 안 읽었어요.. ㅠㅠ 저보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으신 블로거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제가 아는 분은 카스피님이에요. 추리, SF 장르 소설을 즐겨 읽었고, 많이 알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