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의 편지는 시가 된다. 그리움이 넘치면 시인은 편지를 쓴다. 곽재구는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새벽편지), 윤동주는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절절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그리움으로 쓰는 편지가 인연의 끈이 되기도 한다. 괴테의 시에 차이코프스키가 곡을 붙인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라는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주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이 노래만큼이나 구구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화가가 있다. 이중섭이다.

 

 

 

 

이중섭하면 일단 고등학교 때 배운 대충의 지식으로 무지하게 가난했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이중섭은 신화적인 존재였다. 민족적 정서를 화폭에 옮겨놓으면서 한국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서 또는 천재화가로서 인정받아왔다. 그의 궁핍했던 삶이 이런 신화에 보다 많은 후광을 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신화적 요소를 벗고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다시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의 삶 자체 하나하나가 역사와 예술 속에서 얼마나 고단했는지 반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가 이중섭의 편지는 수많은 편지 중 언제나 애잔한 빛을 띤다. 이중섭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한 번도 부치지 못한 편지를 그림으로만 남겼다. 화가의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있는 편지는 그림이 된다. 불우한 천재. 한 뼘의 수식어로 남은 그의 삶을 편지가 전하고 있다.

 

작가들은 보통 자신의 세계를 작품으로 말한다. 거기에 몇 가지 기록이나 주위 사람들의 소회가 덧붙여져 한 작가의 생애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작가의 삶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간혹 그들이 속살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일기나 편지를 통해서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 온 서귀포에서의 2년이 채 못 되는 시간이 이중섭에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꿈같은 나날이 된다. 어쩌지 못하는 가난 때문에 아내 이남덕 여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중섭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년

 

 

“빨리빨리 아고리(이중섭, 턱이 길다고 붙인 애칭)의 두 팔에 안겨서 상냥하고 긴긴 입맞춤을 해주어요. 언제나(지금도) 상냥한 당신 일로 내 가슴은 가득 차 있소. 하루빨리 기운을 차려 내가 좋아하는 발가락 군(이남덕, 발가락이 예쁘다고 붙인 애칭)을 마음껏 어루만지도록 해주시오. 아! 나는 당신을 아침 가득히, 태양 가득히, 신록 가득히, 작품 가득히, 살아하고 사랑하고 열애해 마지않소.” (73쪽)

 

 

일본에 있는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면 이중섭은 잠을 설쳤다. 여비를 마련해 준다는 친구 시인 구상의 권유에도, 서울에 여는 전시회를 위해서 새벽부터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아들 태성이도 그리고 태현이도 그렸다. 그 아이들이 이중섭을 타고 엉덩이를 굴러대는 그림도 그렸다. 두 아이와 아내가 자신과 함께 과일 따먹는 그림도 그렸다. 고기하고 노는 아이도 그렸다. 그리고 밤새 그 그림과 이야기를 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이중섭의 그림

 

 

한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못내 아쉬운 이중섭의 그리움은 편지지의 귀퉁이마다 작은 삽화로 다시 그려진다. 떨어져 있는 세 식구를 향해 팔을 벌린 자신의 모습, 네 식구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 아내의 얼굴 등을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이중섭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살포시 껴안고 싶고, 아이들과 마음껏 뛰어놀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예술가만큼 불완전한 존재가 있을까. 예술가란 이중섭이 그린 벌거벗은 어린이의 모습처럼 천진하고 현실감이 없어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지독한 궁핍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이중섭이 몸과 마음을 부려놓고 기댈 곳은 아내뿐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마치 늘 가까이에 있는 아내에게 일상에 대해서 소곤거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자신이 얼마나 궁핍한지,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예술에 대한 갈망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그의 육성을 듣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거짓 없는 희망의 봉오리, 나의 귀여운, 나의 기쁨의 샘, 가장 아름다운 나의 아내, 소중한 나의 남덕 군’ 이렇듯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랑의 수식어가 넘친다. 그러나 그 수식어들은 공허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들을 무작위로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아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또 보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울었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화가의 애절한 사연과는 다르게 그림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분명 가난 속의 행복이 느껴진다. 고통스럽거나 찌들려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몸짓이 즐거워 보인다. 가족들이 행복해 보인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 여겨진다. 적어도 서귀포에 생활하면서 그렸던 그림들이 그렇다.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린 그림들, 저토록 좁은 공간에서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이중섭 그림의 진가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이중섭  「바닷가에서 물새와 노는 소년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은 없었지만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뒹굴어가며 게를 잡고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내에게 전하는 저 아름다운 말은 가족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행복을 말해주고 있다. 가난의 고통을 홀로 뼈저리게 느꼈을텐데 이중섭은 행복이 물질적인 조건에 있다는 것을 강력히 거부한다.

 

 

“돈 걱정 때문에 너무 노심하다가 소중한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맙시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돈이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59~60쪽)

 

 

 

어떤 이들은 이중섭의 그림이 단지 이중섭의 이상향을 그렸을 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그림 속의 행복은 현실에 가장 가까웠을 것이다. 이중섭은 가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줬다. 그걸 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그 어떤 것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행복감을 표현하려 했던 수단으로 다가온다.

 

제주도 피난민 시절,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생활에 또 무엇이 필요했겠는가. 마음이 편하면 입는 것 먹는 것 잠자리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중섭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참 인간성의 일치이자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이중섭에게 예술은 지고한 애정의 표현이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마음이 맑아지고 그로써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추어 훌륭한 작품이 탄생된다고 했다. 사랑이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술혼으로 승화된다.

 

이중섭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기능공보다는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변조하는 창조자의 꿈을 가지고 좀 더 엄밀하고 강렬한, 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갈망이 컸다. 대담하고 다이내믹하면서도 몽환적인 붓 터치나 단순화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선묘(線描) 그리고 선명하고 강렬한 원색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이중섭  「소」  1953년경

 

 

작품 제작에 대한 열정은 지극했다. 그는 오로지 가족과의 재회를 고대하며 매일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제작에 몰두했다. 작품제작에 대한 불같은 열정은 그의 아내에 대한 진한 사랑과 바로 조응한다. 그가 그린 소는 단순히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는 한가한 소가 아니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황소의 눈빛은 무언가 강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다. 내가 가난과 불행 속에서 버텨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사랑과 열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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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joker 2014-04-2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드마라에 나왔었죠 ㅡ 책이랑 그의삶에 대해 ㅡ 반가운 마음이 한켠에 댓글을 남깁니다 ㅡ 좋은글 감사합니다

cyrus 2014-04-30 14: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tjjoker님. 맞아요. 갑자기 이 책이 관심을 받길래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드라마 덕분에 책이 뜬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