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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Scene #1 판타스마고리아의 산책자

 

휴식 삼아 천천히 거니는 일을 산책이라 한다. 어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혼자 등하교할 무렵이 아마도 누구에게나 처음 세상 밖으로 산책하는 경험일 것이다. 입학식을 하고 일주일 정도 부모의 손을 잡고 다니다가, 드디어 혼자 큰길로 나가서 학교까지 오가는 길은 두려우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이때 세상은 새삼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모르던 질서가 길 위에 무섭게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그동안 읽어내지 못하던 책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혼자 걷는다는 것은 행간을 읽게 되는 것이고 ‘세상 속 존재’로서 자신을 깨우는 순간이기도 하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진전에 발맞춰 휘황찬란하게 돌아가는 도시를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요술환등)’라고 비유한 바 있다. 당시 그가 관찰했던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산책자’는 그 도시의 불편한 징후를 읽어내는 예민한 관찰자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도시가 불러일으키는 끝없는 욕망의 포화상태, 그 속에서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을 예견하는 존재인 셈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시인 보들레르야말로 당대의 산책자였다. 보들레르에게 산책은 존재의 조건과 같은 것이었고, 벤야민에게 산책자라는 유형을 만든 것은 파리라는 도시였다.

 

근대화된 도시 공간 속에서 산책하는 일은 풍경 속에서 거닐며 사색하던 철학자들의 산책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뚜렷한 목적 없이 군중 틈에서 배회하며 거리의 풍경을 관조하는 산책자는 자신이 본 대도시의 충격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묘사하는 동시에 이러한 충격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현실과 대조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도시의 산책자, 그들은 걷는 자들이며 방랑하는 자들이다. 걷는다는 것은 도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의 형태다. 그들이 도시의 공간을 이용하여 움직이면서 어떤 구속이나 장소의 확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동안 도시라는 ‘텍스트’가 완성되어 간다.

 

 

 

 Scene #2 구보와 벤야민, 2014년 서울을 거닐다 

 

구보는 스물여섯 살인데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직업도 딱히 없고 버는 돈도 시원찮지만, ‘가지 못했다’보다 '가지 않았다' 쪽이다. 어머니에게는 능력이 있는 자식이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긴 하지만 말이다. 그 아들은 낮에 집을 나서 늦은 밤이 돼서나 들어온다.

 

그의 산책은 물속에 뜬 꽃가루의 브라운 운동처럼 목적이 없다. 구보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새벽에 지하철이 끊겨 집에 도착해 피곤한 몸을 눕히기 곤란하다.

 

경성 시내를 주유했던 구보 씨를 2014년 지금의 서울로 소환해 서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탐사한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발표된 지) 80년 만에 구보 씨는 서집을 나와 서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서관 속에 파묻히다시피 살고 있는 벤야민을 만난다. 80년 만에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고’(『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구보 씨는 소설, 시, 회화, 조각 등의 문화 텍스트를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벤야민식 도시 읽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 산책자 페르소나를 에세이처럼 창조한 것이 매력적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꿈을 꾸던 어린 자본주의는 20세기를 거치며 나치즘, 전체주의라는 추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다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거친 어른 자본주의가 전지구를 휩쓸고 있는 시점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넘어선 텍스트로 자리할 수 있다는 전망은 과장이 아니다.

 

 

 

 Scene #3 서울 곳곳에 숨겨진 물신 찾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외국계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멀티플렉스 상영관, 대형서점 등은 별다른 화젯거리가 없는 커플, 시험 끝난 중·고생,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맞이한 직장인들의 성스러운 순례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현대는 ‘쇼핑하는 세계’다. 현대인은 마트를 돌며 카트에 물건을 담듯이 심리상담, 외국어 회화 수강, 철학 강좌 모두를 ‘쇼핑하며’ 다닌다. 맞다. 우리는 그 맛에 산다. 쇼핑으로 얻은 활력 덕분에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되돌아가 버티는 것이다. 일상은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매번 업그레이드되는 아이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월간 패션지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느낀다.

 

그러나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그런 현대인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뭐? 너희들의 목표가 새로운 것이라고? “새로운 것은 (…) 패션이 지칠 줄 모르고 대변하려는 허위의식의 정수이다. 이 새로운 것의 가상은 마치 한 거울이 다른 거울에 비치듯이 영원히 동일한 것의 가상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가상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문화사’라는 환(등)상으로, 이 속에서 부르주아지는 허위의식을 만끽한다.”

 

판타스마고리아. 그것은 자본주의 도시공간을 방랑하는 현대인들의 집단적 꿈이 넘실거리는 베일이다. 도시인은 그 베일을 진보라고 믿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이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적 새로움이란 새로움의 탈을 쓴 반복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하나밖에 모른다. ‘화폐’라는 가치 척도와 그것의 ‘증식’이라는 목표밖에!

 

그러나 상품은 고도의 화장술을 지니고 있기에 소비자는 결코 자본주의의 ‘쌩얼’을 볼 수 없다.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빚을 권하는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내가 주인이라고, 선택권은 내게 있다고, 그 선택으로 하루하루 고귀해진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소비와 소유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마르크스의 ‘물신(物神)’ 개념을 벤야민은 그런 식으로 구체화했다. 그리고 2014년 구보는 오직 두 다리만으로 서울 곳곳에서 자본주의 소비 욕망이 꿈틀거리는 채 숨어있는 물신을 찾아낸다. 어떤 도시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영혼과, 그 도시 사람들의 영혼과 교감한다는 뜻”(고종석 『도시의 기억』)이라는 말처럼, 구보는 사사로운 기억과 도시의 역사, 문화, 예술, 언어, 인종을 인용된 텍스트의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도시의 영혼을 탐색한다.

 

 

“날아간 비둘기를 쫓아 소공동으로 길을 건넌 구보는 을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롯데호텔 로비로 들어가 지하 아케이드로 내려가면서 벤야민이 말한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아케이드는 교통수단의 위험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비바람도 차단하여 궂은 날씨에도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안락한 기분 속에서 진열된 상품을 구경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유리 지붕만 없을 뿐이지 롯데호텔 지하 아케이드는 지상의 아케이드와 마찬가지로 산책자 구보가 무의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아케이드의 통로는 실내이면서 거리였다.”

 

(‘롯데호텔 아케이드’, 99쪽)

 

 

19세기 파리의 상가 아케이드를 관찰했던 벤야민의 통찰처럼 서울의 도시 공간은 내용물을 대중의 환상과 꿈으로 포장한다. 서울은 생존과 효용 가치에 목매단 이 시대 대한민국을 포장한 아케이드다. 박물관이다.

 

구보가 서울을 산책하는 목적은 ‘오늘, 우리의 삶을 둘러싼 대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인 셈이다. 구보는 자본의 이익에 따른 공간의 불평등한 재분배, 철학의 부재 속에서 공간을 다만 정치구호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서울’이라는 구호 속에 숨어있는 음모와 허구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서울이 진짜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던지겠다는 뜻이다. 관찰과 탐구 그리고 인용된 텍스트를 모아 구보는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아 만든다. 그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Scene #4 구보의 산책은 아직 많이 남았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경성역은 구보가 본 건물이 현대화한 서울역의 한 켠에 있다. 그러나 80년 후에 가본 눈앞의 경성역 아니 서울역은 이제 ‘마땅히 인생’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오늘날 서울역은 소설가 구보 씨가 낭만적인 여행의 출발점으로 동경하던 경성역과는 너무 다르게 진화했다. 출발과 도착이라는 정거장의 역할 이외에 부차적인 기능이 너무 많이 입점했다. 소설가 구보 씨가 느꼈을 여행의 행복을 맛보기에는 역사가 너무 상업화됐다. 추억을 담기에는 역사가 너무 자동화됐다. (중략) 지하철과 버스와 택시에서 내린 사람들이 역사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채울 수 없었던 신기루 같은 욕망을 환멸하는 듯 보였다”

 

(‘서울역’, 61~62쪽)

 

 

판타스마고리아의 산책자 구보는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인 아름다운 서울’(패티김 ‘서울의 찬가’)이라는 판타지에 빠진 도시인들에게 말한다.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34년, 1964년 그리고 오늘 2014년, ‘서울역의 풍경은 많이 변했을지 몰라도 서울역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류신『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서울역’, 62쪽)

 

구보는 벤야민처럼 19세기 말의 아케이드에서 같은 걸 서울에서 목도했다. 도시를 수놓은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그 안에 들어선 휘황찬란한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는 군중. 철골이 보이는 투명한 지붕 아래 길게 이어진 상점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 축소된 하나의 세계”였다. 순식간에 아케이드는 “상품들의 신전”이 되었고, 아케이드가 점점 증식되어 비대해진 서울은 “영혼 없는 군중이 사는 고립된 섬’이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화려한 신전들에서 넋을 잃었다.

 

물신의 유행은 낡은 옛것이 새것으로 둔갑해 회귀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를 새롭게 할 수 없다. 자기계발서도, 아이폰으로 접속하는 다량의 정보도, 쇼핑하듯 골라 듣는 강의도 마찬가지다.

 

가끔 우리는 기억상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소설을 만난다. 주인공이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킬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다 기억해야 할 일을 문자로 새겨 넣는 영화 <메멘토>처럼, 그런 소설의 글귀는 도시의 육체에 새겨 넣는 문신과 비슷하다. 도시의 기억을 보존하려고 하는 소설의 안간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그 산책자 구보의 안간힘을 좇아갈 수 있다. 서울을 그린 소설로 걷기 코스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 문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어머니와 도시인들에게는 백수로 보이지만 구보의 산책은 나름 투철한 ‘직업정신’과 그를 향한 연마의 자세가 있다.

 

구보의 산책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가 자신을 새롭게 만든 길은,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도시 안에서 모든 게 낯설다는 듯 질문하고 관찰하고 답하는 행위 자체였다. 그럼으로써 구보는 동시대인들이 갇혀 있는 매트릭스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맴도는 기괴한 환상들을 정지시킬 힘을 얻었다. 기존의 세상이 정지되는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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