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의 이 시를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백석의 밤에도 눈이 푹푹 날리고, 강원도의 밤에도 눈이 오지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밤에, 백석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자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만 눈으로 덮인 도시에 갇혔다.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 소리 대신 쓸어도 쌓이는 하얀 쓰레기 때문에 짜증나 미칠 것 같은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학창시절, 백석의 시는 그가 늘 동경하고, 때로는 모방한 러시아 시인들보다 무게가 없고 감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날 때 읽을수록 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에게 뭔가 애틋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백석의 밤에서 멀어지기 때문일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雪夜)」 -

 

 

 

예전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애처럼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아무리 큰 고통도 하얀 눈이 어루만져 줄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은 마음도 따뜻했다. 그래서 저런 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좀 야한 은유. 지금도 이 구절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이 밀려올 정도로 지루한 국어시간에 이 시의 문제(?) 구절만 소리 내서 읽으면 모든 남학생들을 웃게 만드는 웃음 폭탄이 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마도 김광균 시인은 이 구절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설야」는 화자가 왜 슬퍼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화자 즉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떤 여인이라는 점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이 시에서는 과거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애상만이 감돌뿐이다.

 

이젠 저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슬픔이 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싸늘한 추회가 왜 시인을 애타게 했는지 알 것 같다. 먼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 늘 시인의 귀에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 벗는 그 여자 없었다. 아련하지만 이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누군가는 눈 소식이 썩 반갑지 않을 것이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백석의 밤이 아니라 눈보라가 내리치는 백색의 계엄령일 것이다. 눈은 눈이 올 때면 심장이 콱 옥죄이는 것은 모두 그때 그 기억 탓이다. '대설주의보'가 문득 몸서리 쳐지도록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온 게 아니라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낮게 읊조린 곡조와 함께 돌출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그러니까, 저 오래되고 유구한 기억 속에는 '백색의 계엄령'에 대한 공포가 깊게 새겨져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대설주의보가 걱정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짧게 흩날리는 눈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를 하라고 했던 구절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중에서 -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그러니까 아픔과 아픔이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해도 무관심한 사회적 풍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저 ‘백색의 계엄령’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도 필요한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엄혹한 한기는 마치 진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어쩌면 삶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황홀경에 매혹되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과 같은 자본은 한 개인의 무릎을 닳게 만들 터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고립되는 삶.

 

그러므로 '대설주의보'가 기후에 따른 경고발령이거나 1980년대 군부독재가 발령한 국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계엄령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발밑에, 바로 옆에 있는 존재나 자연과 손을 맞잡지 않는 데에 대한 처절한 내적 울림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형도가 지적했듯, ‘가누기 힘들어 제 목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우는 시절이니 말이다. 모두, 살아남으시라. 암울한 백색의 계엄령이 아닌 마음을 밝게 만드는 백석의 밤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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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1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에도 눈이 내려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쌓인 눈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는 울산, 눈이 오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울산이기에 아아아.. 잠이 오질 않네요.

cyrus 2014-02-10 23:2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포핀스님. 잘 지내시죠? ^^ 올해는 대구가 눈구름이 피하는 곳인가봐요. 부산에도 눈이 왔다던데.. 이 곳은 조금 눈이 내리긴했는데 눈이라기보다는 금방 녹아서 비처럼 내렸어요. 그래도 눈 엄청 쌓여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질거에요. 눈길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