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아스 라인
기타 (DVD)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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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거야.

이유없는 시작이지.

 

- <안토니아스 라인> 속 대사 한 구절 -

 

 

* 미리 밝혀두건대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는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나는 여기서 다소 지엽적인 관점으로 영화 속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사실 이 유명한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여성학이나 영화 관련 수업이 아닌 생뚱맞게 현대미술론수업 영상 자료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미술 수업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필 교수님이 외부 사정으로 수업 진행이 어렵게 돼서 임시방편으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 한 여자의 일생으로 보는 '삶/죽음/삶'

 

안토니아스 라인은 여인 5대로 이어지는 긴 가족사가 넓은 땅과 함께 펼쳐지는 영화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딸 다니엘을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토니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에는 안토니아와 다니엘 둘만 남는다. 굵은 허리에 두리두리한 몸매를 한 아줌마 안토니아는, 평생 성적 방종으로 고통을 준 남편을 원망하고 욕하며 숨을 거둔 어머니와 달리 결혼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웃집 농부 바즈의 구혼도 물리치고, 여러 이웃들과 어울려 씩씩하게 살아간다.

 

미술학교에 입학한 딸 다니엘이 결혼은 싫고 아이만을 원한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는 것을 도와주어서 아이를 갖도록 한다. 태어난 손녀 테레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 성폭행의 아픔을 겪고 방황하지만 결국 오래 곁에서 지켜준 마을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사라를 낳는다. 그러니까 사라는 안토니아에게 증손녀, 이렇게 해서 여인 5대를 이루게 된다.

 

마을에서는 쉬지 않고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끌어안는 안토니아는 '사는 게 인생이며, 인생은 살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증손녀 사라에게 이야기한다. '이 춤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라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예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삶/죽음/삶', 이 영화는 안토니아의 모계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과

주변 인물들이 한 사람씩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교차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많이 든 안토니아가 이제 죽음을 느끼며 준비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러 모아 다가온 죽음을 알리고, 눈감은 채 죽을 준비를 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죽음이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기계 장치를 달고 문 밖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 모두가 꿈꾸는 마지막 모습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러나 끝나지 않는 인생. 영화 중반부에 점점 가족의 수가 늘어나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 식사 장면이 많이 차지한다면 영화 결말부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의 두려움을 환기시켜준다. 그래서 인생은 누군가 떠난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하나로 이어지게 처리해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러한 인생의 주기를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죽음에 의한 소멸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 생명의 부활이 시작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존재의 본질을 묻는 이 질문은 인간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국, 우리네 인생을 묘사하는 영화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인생의 단계」 1834년

 

 

노을 지는 해변에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바다에는 다섯 척의 배가 떠 있다. 다섯 사람은 인생의 시기를 뜻하고 다섯 척의 배는 인간을 의미한다. 스웨덴 국기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아이는 유년기,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청년기,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중년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의 노인은 노년기를 상징한다.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증거물이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배들은 활동적이다. 그러다가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완전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죽음')에 도착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배들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다시 한 번 돛을 활짝 펼쳐 출항할 것이다.

 

영화는 일레곤다는 안토니아를, 안토니아는 다니엘을, 다니엘은 테레사를, 테레사는 사라를 낳았다는 식의 모계(母系)가 탄생한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증손녀인 사라가 안토니아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삶과 죽음의 고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화제목인 안토니아스 라인은 단순히 안토니아 중심의 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주기라는 예고된 삶의 연대기를 함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여장부’, ‘어머니 늑대안토니아

 

 

 

 

 

안토니아는 여장부처럼 당돌하면서도 자기 기준이 확고하다. 이웃 농부 바즈가 그녀에게 '내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청혼을 한다. 그러자 안토니아의 대답. '난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러고는 오히려 되묻는다. '왜 남편이 필요하죠?' 두 가족은 종종 식사를 같이 하며 친숙한 이웃으로 지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안토니아는 바즈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시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이 아닌 제3의 장소를 고른다. 숲 속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등불 하나 손에 들고 떠나는 두 사람. 안토니아의 딸과 손녀가 배웅한다.

 

한편으로는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주장하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안토니아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머니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한 존재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으로 개척할 수 있는 당당한 풍모가 느껴진다.

 

각자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한 식탁에 온 가족이 마주 앉고, 필요할 때는 제3의 장소에서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동거에 대해서 단순한 성적,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출구냐, 수많은 결함과 문제를 안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대안이냐 하는 논의가 무성한데, 안토니아와 바즈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노년의 사랑과 결혼을 생각해 봐도 안토니아와 바즈가 하나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사랑과 결혼이 호적 문제, 재산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데, 각자 자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둘 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물론 한 쪽이 병에 걸리거나 세상을 떠났을 경우를 예상해서 분명한 약속들을 하는 것이 앞서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안토니아는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하고 건강하다. 그리고 넓다. 몸담아 살고 있는 땅을 닮았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주는 땅의 얼굴이다. 큰 나무를 닮았다. 저 땅 끝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서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생명을 묵묵히 지켜보는 나무의 모습이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빼고 여인 4대가 남자에 매이지 않고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선하다. 유쾌하기도 하다. 물론 폭력으로 상하는 어린 영혼의 이야기는 눈물 겹지만, 주변 남자들의 폭력과 오만, 위선 등이 깨져 나갈 때도 가끔은 웃음 짓게 하는 여유가 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니 동거의 한 방식이니 하는 논의에서는 비껴간다 해도, 구원은 결국 여성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소리 높이지 않고 말하고 있다. 여성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인생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인 것은 자연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안토니아가 그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고 있다.

 

남자 입장에서 본다면 영화 속 안토니아의 행동이 상당히 충격스러우면서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오랫동안 붙어 있는 수식어를 잠시 잊은 채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안토니아와 그 주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울고 웃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우리가 잊고 있던 화목한 가족애의 훈훈함, 그리고 가볍지 않은 인생사의 진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여성 출연자들의 가슴과 음모가 드러나는 베드신이 있는 19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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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05 11:2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 영화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네.
꽤 괜찮았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봤을 때만해도 유럽 영화가 익숙치 않아
조금은 뜨아하기도 했어. 다시 보면 어떨까? 지금은 유럽 영화 좋아하게 됐는데 말야.ㅋ
확실히 이 영화는 페미니즘 이상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지.

요즘은 기억이 가물거려서 어떤 영화는 옛날에 봐 놓고도 안 봤다고
다시 보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어.ㅠㅠ

cyrus 2013-11-05 20:26   좋아요 0 | URL
처음엔 이름만 들었을 땐, 별 관심 없었다가 막상 보고나니 나름 충격적인(?) 장면도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이 영화가 좋았어요. 사실 저도 유럽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언젠가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