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또다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은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늙은 성중독자처럼, 관계하는 동안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흑거미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p 35 재인용) -
해답 없는 국제적 난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ㅣ지난해,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19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기서 '1967년 이전'이란 1967년에 발생했던 이스라엘 대 아랍권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의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개전 초 아랍 국가들의 공군기지를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장악한 뒤 지상전에서도 승전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 등을 점령했다. 아랍 국가들은 결국 전쟁 시작 엿새 만에 요충지를 점령당하고 UN이 제안한 정전협정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2만 7000㎢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 6일 만에 6만 8000㎢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오바마의 언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 중에서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던 이스라엘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며칠도 못 가 자신이 거론한 문제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자신의 '1967년 전 국경선 회귀' 발언은 국경선을 근거로 협상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협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아랍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심한 반발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사실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단 3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선언문이 가져온 중동의 혼란
그 동안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핍박의 슬픈 역사를 안은 채 떠돌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오마바의 발언에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 명시된 서류 원본
하지만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오래된 기원전 시대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게 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선언문 한 장으로 인해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은 커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년 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 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가 탐낸 '성전' 예루살렘
역사가들은 중동 분쟁의 신호탄을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중동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내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으며 무고한 중동의 사람들은 시퍼런 칼과 무시무시한 총탄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특히 중동 내전의 중심에는 바로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담당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동시에 거듭된 파괴와 재생의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구약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다윗 왕 이후 이 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였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성전' 예루살렘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게도 '위대한 성지'였고, 문명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치는 최전선의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이 도시는 많은 세월동안 뺏고 뺏기는 전쟁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묘사한 옛 문헌 기록이나 오늘날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왜 그토록 수천년동안 예루살렘 하나를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도시', '성지', '성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루살렘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 위에 세워진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은 경제학적이나 입지조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춥다. 게다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들은 험하기로 악명 높아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이렇게 피를 흘려야하는 전쟁을 치뤄면서까지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일리야 레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 1870년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성전', 즉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은 이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싶었고 점점 예루살렘을 신성화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신성이 무수히 만들어 낸 신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예루살렘이 '거룩함의 원형'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윗 왕이 지은 성전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세운 지성소 때문이다. 하지면 역설적이게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파괴가 예루살렘의 신성화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를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한 예레미야에게 붙잡히고 마는 신세가 된다. 공포와 망상으로 가득한 채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사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도시들이 겪는 지옥 같은 약탈을 경험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굶주림 끝에 신열로 저희 살갗을 불가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시온(예루살렘 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습니다. 저들의 손에 고관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p 101)
성전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자신들의 화려했던 영화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시온의 영광'을 기록하고 호소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를 '전설'로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영화만큼이나 예루살렘 또한 '성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수많은 군주와 영웅들마저 영토 확장의 목표물로서 탐내는 곳이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평화와 환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수많은 십자군, 이슬람의 살라딘과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예루살렘에 눈독을 들였다.
학살과 약탈이 멈추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있게 한 1967년 6일 중동 전쟁까지 예루살렘과 관련된 모든 인류의 방대한 역사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독자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수많은 당사자들의 각각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대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지만 학살과 약탈이 만연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역사를 일부 독자들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서막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첫 내용부터 '전쟁'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침략한 로마 군뿐만 아니라 혼란의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 예루살렘 내부에서 유대인 군벌들이 자행했던 학살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인간의 폭력성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고 있었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지난 몇 달간 티투스는 모든 죄수나 탈주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500명의 유대인이 매일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티투스의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사지를 기괴한 자세로 벌린 채 묶어져 못질하는 것을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p 36)
네로 이후 세 명의 로마 황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혼란스러운 권력승계가 나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고 있을 당시, 이 도시는 세 개의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대인 군벌들은 가장 먼저 성전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전투를 벌였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의 전사들은 부유한 이웃과 협력하면서 가정집을 약탈하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희롱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오락거리였다." (중략)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매음굴이자 고문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였다. (p 37)
로마의 티누스 침략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성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영역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한 삼두정치로 인해 분할된 권력을 만족하지 못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의 탐욕을 예루살렘에 뻗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솔로몬 왕의 신성한 업적이 남아있는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 곳을 드나들었고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습격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성스러운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확보하는 데 쓰였다.

에밀 시뇰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847년
1096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말까지 이어져 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에게 파괴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폐쇄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절정이 만들어 낸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피 비린내나는 전쟁이었다. 원정단들은 자신들을 예수로부터 보호받는 '순례자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예수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과 밖을 막론하고 성벽 주위에선 사라센(중세의 유럽인들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들의 썩어가는 시체에서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시체들은 학살당한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 363)
인류의 죄악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흑거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단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으며 파괴와 재건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그마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추방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를 제외하고는 신의 축복보다는 잊고 싶은 저주가 많이 기억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중동의 화약고이며, 서구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과거 티투스, 네부카드네자르, 십자군 전쟁 시기와 같이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긴장의 연속 상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로지 핏빛의 미래만 보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파괴를 자초하는 마력을 지닌 흑거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 속에는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동의 분쟁을 예루살렘에게만 죄를 가중하는 건 못마땅하다. 평범한 흑거미를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다툼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인류 또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공범자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