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격세지감이다. 이 책이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었다니. 미셸 깽의『처절한 정원』을 처음 읽었을 때가 10년 전이다. 한창 히딩크의 월드컵 대표팀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악마'가 되어 열띤 거리 응원전을 펼치던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이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책은 2005년에 출판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3년 전에 처음 출판되었던 걸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기억이 강하게 자리잡은 이유에는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고 이 책을 읽고난 뒤에 학교 내에서 만들어진 독서기록장에 감상문을 썼기 때문이다. (가끔 창고를 정리하면 옛날에 기록한 것들(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 알림장)을 발견하곤 하는데 정작 중학생 시절 때 쓴 독서기록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불가사의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버리지 않았을텐데... 언젠가 꼭 찾고 싶은 물건이다)

 

사실 처음 이 책 읽었을 당시, 생전 처음 접해 본 프랑스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읽고난 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문자로만 '감동을 받았다'라고 적기에는 그 때 그 시절, 독서의 감동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휘말려야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와 관련한 추억들을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모리스 나치 협력자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진행될 때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광대 복장을 입고 참석한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분명 이러한 이야기라면 나름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랑스에서 출판했던 당시에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을 정도니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등극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미셸 깽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금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는지 수긍이 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 하필 이 해에 『뇌』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얇은 미셸 꺵의 소설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고 최근에 우연히 알라딘 검색하던 도중에 이 책이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앍게 되었다. 내가 좋았했던 책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절판되지 않은 채 팔리고 있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이 책이 중학생(중1)들을 위한 서울시교육청 선정 추천도서란다. 나 역시 중학생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그 때 나이 또래 지금의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고 있는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하다.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미셸 꺵이 들려주는 '처절한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내가 읽었던 2002년에 출판된 책이 도서관 서가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워낙에 얇은 책이라 자신보다 커다란 책 틈 사이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한 손에 쉽게 쥘 수 있도록 작은 판형은 여전했다. 하지만 작은 책도 무시 못한다. 짧지만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로,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리스 파퐁 (1910~2007)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의 나치 협력 전력이 밝혀지기 전에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자신의 무덤에 함께 매장한 점에 대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변절'로 점철된 나치 협력자가 죽은 넋이 되었다하더라도 과연 떳떳하게 훈장과 함께 묻힐 자격이 있을까?

 

 

 

소설의 중심 모티프는 지난 20여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모리스 파퐁 재판'이다. 파퐁은 2차대전때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다는 경력을 내세워 드골 정권하에서 예산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시 정권하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나치 협력자였다. 그의 치부는 한 역사학자의 추적에 의해 폭로됐으며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퐁은 1997년에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소설은 파퐁 재판이 열리던 법정에 어릿광대 복장의 한 남자가 입장하려다 저지당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결국 분장을 지우고 재판을 지켜본 기이한 행동의 주인공 '나'는 작고한 아버지와 삼촌, 숙모를 회상하며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된 배경을서술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틈나는대로 어릿광대 복장으로 차리고 사람들을 웃기는 일을 자청하던 괴짜였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창피하게 여겼지만 기행 뒤에 가슴을 울리는 일화가 숨겨져 있음을 삼촌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아버지와 삼촌은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하다 독일군에 잡혀 흙 구덩이에 갇히게 됐는데 당시 그들을 감시하던 독일군 초병이 익살과 묘기로 추위와 공포로 떨던 그들을 안심시키고 삶의 희망을 준 적이 있다. 총은 들었지만 인간미로 가득했던 보초병은 뒤에 자신의 전직이 어릿광대라고 그들에게 전한다.

소설의 진가는 막판의 대반전에서도 발휘된다. 주인공의 눈에 촌스럽게만 보였던 숙모에게 슬프면서도 장엄함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이 독일군에게 잡혀 구덩이에 갇힌 것은 열차역 변압기를 폭파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끝낸 뒤 독일군에 잡힘으로써 처형될 위기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와 삼촌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든 '그'는 누구일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겠다. 리뷰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고 아직까지 이 감동적인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무언의 독자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직도 삼촌이 말하는 모습과 문장들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삼촌의 이야기는 자신이 겪었던 잔인한 순간들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의 문을 나에게 열어 준 것이다.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삼촌이 전해준 그 생생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 미셸 깽『처절한 정원』중에서, 문학세계사, pp 40 -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인공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절한 정원'은 독일 나치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변절자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터전이며,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가족의 희생적인 삶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역사을 의미한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광대 복장을 하고 파퐁 재판의 방청석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주인공은 아버지가 그토록 부활시키고 싶어 했던,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의 이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조용히 되뇐다.

 

 

 

 

범죄자가 아닌 자의 속죄 (사진출처: 한겨레)

 

반인륜적인 전쟁이 할퀴고 간 역사의 상처는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남아 있다. 그러한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약자들이 있는 반면에 모리스 파퐁처럼 자신의 행위에 반성하지 않은 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회개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며 무릎을 꿇은 채 참회하고 있다. 그는 위안부에 대해서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반성했다. 이러한 분들이 있기에 지금도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자 하는 '진실'이 존재하며 더 나은 역사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원래 광대였던 독일군 보초가, 훗날 광대가 된 화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자신의 편' 때문에 죽어가야 했던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왜 진정한 범죄자들이 아닌 그들이 속죄의 짐을 져야 하는가. 반대로 속죄해야 할 누구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지 않은 채 죽어서도 끝까지 허울뿐인 '명예'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려고 한다. 그와 같은 질문을 숨겨둠으로써 소설 속의 화자 그리고 작가는 역사 앞에서의 철저한 반성의 연대를 촉구하는 것이다.

 

비중이 작지만 소설 속에 독일 병사 베른이 보여 준 포로에 대한 친절은 시대의 잔혹함에 고뇌하는 인간의 '양심'을 느끼게 해 준다. 양심과 용기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가능케 하는 실마리가 된다. 모든 것을 참혹하게 무너뜨리는 전쟁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전쟁은 수많은 인간관계를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중첩시킨다. 프랑스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시련과 고통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나라 잃은 슬픔과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이 치유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아픔을 무조건 묻어두기보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겐 곧 역사를 바로 알고 가슴에 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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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도 몇년 전에 읽었는데.
얇은데도 참 잘 쓴 것 같아.
그런데 감동스럽고 처절하고 이러진 않았던 것 같아.
아무래도 내 현실이 아니라고 느껴서 그럴까?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네.

cyrus 2012-02-21 19:1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읽으니깐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소설, 영화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영화로 본다면 정말 감동적일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