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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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판결' 만 기억되는 <베니스의 상인> 

고전이란 누구나 내용은 알지만 읽어보지는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베니스의 상인>은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내용은 대충 안다.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인 샤일록에게 '1파운드의 살점을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는 명판결만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는 그의 이름만 대면 무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을 정도로 신용이 높은 상인이었다. 자신의 친구인 바싸니오포오셔에게 구혼하러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기 위해 샤일록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는 앤토니오에게 상당한 금액의 이자를 요구한다.  앤토니오는 샤일록의 부당한 제안에 경멸로 가득찬 비난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는 샤일록이 원하는 대로 원금을 제때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심장에서 가까운 살 1파운드' 를 주겠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빌린다. 그런데 공교롭게 상선의 사고로 원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게 되었고, 샤일록은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 1파운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앤토니오와 샤일록 간의 '살 1파운드' 논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앤토니오 측이 불리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지만 판결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법학 박사들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된다.   바싸니오의 연인 포오셔와 그녀의 시녀 니리서가 법학 박사로 변장하여 재판장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오셔는 계약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1파운드의 살을 떼어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도려내라" 고 판결한다.  이것은 계약서의 내용이나 샤일록의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므로 법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하지만 내심 앤토니오의 죽음을 원한 샤일록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판에 궁지에 몰린 샤일록은 오히려 '계약 내용에 베니스 인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 는 죄목으로 결국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데다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 처지에 놓인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처한 선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살려낸 재치 있는 판결 정도만으로 알려져 있다.  샤일록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약자에 횡포를 부리는 악덕 고리대급업자의 상징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유대인 출신' 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은 오랫동안 '돈만 밝히는 민족' 으로 왜곡, 폄하되기도 하였다.    큰 맥락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교도인 '유대교' 와의 싸움에서 기독교의 일방적 승리를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도 있다.  

 

 

 샤일록은 왜 법정에서 칼을 갈았을까?

샤일록이 법정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유대인이라는 점과 그 당시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샤일록은 중세 유럽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스테레오 타입인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채권자로 그려질 수가 있었다. 

반면 앤토니오는 부자지만 친절하고 자기희생적인 한 마디로 말해 '선한 기독교인' 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는 이교도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이다.   

 

샤일록, 나는 이자를 수수하는 금전거래를  

해본 적이 없지만 내 친구의 시급한 필요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관행을 깨려 하오.  

- 제1막 3장 중 앤토니오의 대사 (pp 26) -

 


그는 샤일록에게 빚을 청하면서도 고리대금업을 일종의 '투기' 로 인식하면서 이자수취를 경멸하는 기독교도로서의 도덕관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샤일록은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제법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라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그것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받고 증오를 받았기에 샤일록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계약서를 흔들며 앤토니오에게 이자를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 기독교에게 핍박받았던 '유대인' 민족으로서의 힘을 당당하게 과시한다.  

 

난 차용증서대로만 하겠고, 당신 말은 듣지 않겠소. 

난 차용증서대로만 할 작정이니까 말일랑 더 이상 마오. 

난 머리를 흔든다든가, 측은하게 여긴다든가, 한숨을 쉰다든가,  

기독교인 중재자들에게 주장을 굽히는 등의 우유부단하고 

멍청한 눈을 한 바보는 되지 않겠단 말이오. 따라오지 마시오. 

말하기 싫소이다.  난 차용증서대로 할 것이오. 

- 제3막 3장 중 샤일록의 대사 (pp 95) -

  

"계약대로 하겠다" 고 큰소리치며 법정 안에서 칼을 가는 샤일록의 모습은 이자에 집착하는 사악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대한 복수심에 불 탄 유대인의 모습이다.   

 

바싸니오   무슨 이유로 당신은 칼을 그처럼 열심히 갈고 있소. 

샤일록      저기 저 파산자에게서 벌금을 베어내기 위해서요.  

- 제4막 1장 중에서 (pp 115) -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당한 이론을 펼쳐도 결론은 KO패로 정해져 있다.  앤토니오를 신뢰하지 못하고, 계약서만 굳게 믿었던 샤일록은 크게 참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샤일록은 유대인으로서의 서러움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민족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어했지만 결국 신뢰보다 취약한 계약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악인' 샤일록의 외로운 최후

'악인' 샤일록과 '선인' 앤토니오의 대결구도로 인식되어 온 <베니스의 상인>은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읽게 된다면 오로지 악하기만 한 악인과 선하기만 한 선인이 없으며 다만 '악의가 선의를 넘어서는 그 순간들' 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일록은 그동안 대부분 파렴치한 악인으로 그려졌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고 난 뒤의 그의 모습은 동점심을 유발할 정도로 처량하다.   오랫동안 모은 재산의 절반은 한순간에 국가로 귀속되어지고 자신의 딸 제시커는 기독교인 청년 로렌조와 결혼하게 되어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된다.  샤일록은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아야하는 외로운 민족의 전형이면서도 딸에게서도 버림받는 외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법정 판결 이후 샤일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최후마저도 언급되지도 않는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두 딸이 아버지인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영감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파산 직전으로 몰리게 된 샤일록도 고리오 영감처럼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돈' 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돈' 때문에 자신도 상처를 입고 몰락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돈' 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법대로' 를 외치는 샤일록이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종국엔 몰락을 겪는 모습을 통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만 샤일록은 돈만 밝히는 전형적인 수전노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사회적 진출이 막혀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의 사회가 '샤일록' 이라는 악명 높은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를 만들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돈 많은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부(副)의 위력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와 평가도 달라진다.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재물을 늘리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도 무시할 수 없다.  물질만능 시대의 사회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삼겠다는 샤일록의 욕망은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정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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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 악인은 사회가 만든 부조리와 악행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예나지금이나 본인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는생각해요. 글쎄....써놓고보니 어려운 주제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cyrus 2011-10-01 11:36   좋아요 0 | URL
현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무조건 성격만 가지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잘못된 사회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과 사고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아이리시스 2011-10-0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밤 읽을 책, <베니스의 상인> 당첨! 시루스님 덕분.^^

cyrus 2011-10-01 11:41   좋아요 0 | URL
ㅎㅎ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하네요. 참고로 베니스의 상인은
민음사에서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문학동네판을 추천하고 싶어요.
민음사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최종철 교수가 번역을 맡고 있는데
이 분의 번역한 문장이 문어체라.. 간혹 대사 중에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0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또래의 극작가로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었는데 라이벌이었다네요.말로는 <베니스의 상인>에 맞서 역시 유대인이 주인공인 <말타의 유대인>을 썼답니다.이 두 작가의 관계는 상당히 재밌어서 역사가나 문학애호가들에게 회자되었죠.우리나라에도 말로의 작품이 몇 개 번역되어 있더군요.유대인이 당시의 기독교권 국가의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은 연구자들에겐 이 두 작품이 흥미로운 비교연구대상이 될 것 같아요.

cyrus 2011-10-02 20:58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번역본 해설을 보게 되면 크리스토퍼 말로는 꼭 언급하더라고요.
노자님 말씀대로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에 말로의 희곡작품이 번역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읽기에는 말로의 작품을
무시할 수 없을거 같아요. 시간이 된다면 말로의 작품을 비교하여
읽으면서 노자님이 제시한 주제(?)에 대해서 탐구해봐야겠습니다. ^^;;